121화
다음 날 아침, 잠을 설친 청연은 직원들이 출근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주방에서 재료를 손질하는 중이었다.
“객주님, 오늘은 일찍 내려오셨네요?”
“응….”
“손님은 가셨어요?”
손님이라는 단어에 오이를 산더미처럼 쌓아 둔 채 썰던 청연의 손이 우뚝 멈췄다.
“객주님 방에서 머무시던 그 공자님이요.”
“아직 안 갔을걸….”
나 몰래 도망간 게 아니라면 말이야.
청연은 지난밤, 차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유령처럼 객잔을 떠돌았다. 그런 일을 아무렇지 않게 넘길 만큼 뻔뻔하지 못했다.
이전에는 무호가 제정신이 아니었던 데다가 기억도 잃었으니 대충 넘어갔다지만, 이번에는 그가 일부러 벌인 짓이며 모든 걸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견디기 어려웠다. 게다가….
‘소리까지 냈던 것 같은데.’
그의 손길에 참지 못하고 솔직하게 반응했던 자신을 생각하면 혀라도 깨물고 싶어졌다. 청연은 벌게진 얼굴로 정신없이 복도를 거닐었다.
다시 방으로 돌아가 무호의 옆에 붙어서 자다가는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두려웠고, 그가 자신의 신체 반응에 대해 언급한다면 무어라 반응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렇다고 무작정 빈방에 들어가 눈을 붙일 수도 없었다. 다른 방에서 잠든 사이 무호의 상태가 정말로 악화될까 봐 불안해 오도 가도 못하고 혼자서 텅 빈 복도를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밤늦게 돌아온 손님이 날 보고 귀신으로 오해해 거의 기절하시기는 했지.’
밤새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자신의 기척이 느껴졌을 텐데 무호는 방 밖으로 나와 보지도 않았다. 머리카락 한 올 비추지 않는 그를 생각하며 벌써 잠든 걸까, 아니면 상대의 기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걸까 고민하다 보니 별안간 서운한 마음까지 들었다.
하지만 청연은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다. 그가 지금까지 보였던 행동들을 돌아보면 청연의 기분을 신경 쓰지 않는 건 아니었다. 어쩌면 그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몰라서 방 안에 틀어박혀 있는 건지도 몰랐다.
‘아니면 제가 잘못한 걸 알아서 조용히 눈치 보고 있는 걸지도….’
뭐가 어떻게 됐든 내가 이해해야지, 뭐.
청연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오이를 썰었다. 예전 같았으면 가차 없이 쫓아냈겠지만 그를 이해해 보기로 결심한 바였다. 연애 경험도 없는 왕성한 놈과 한 침상에서 붙어 잤으니 그럴 수도 있지, 하는 합리화를 이어 가고 있을 때였다.
“화났어?”
“아니, 화난 건 아니고… 어?”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무의식적으로 대답하던 청연은 칼질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소리 없이 다가온 무호가 그곳에 서 있었다. 주방 안에 있던 직원들도 그의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몰랐는지 흠칫 놀랐다.
무호의 얼굴을 보자 청연의 머릿속에는 즉각적으로 어젯밤 일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덕분에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맴돌았다.
“…몸은?”
일단 몸 상태부터 확인해 보는 게 좋겠다 싶어 묻자 무호가 무덤덤하게 답했다.
“괜찮아.”
직접 확인해 보고자 칼을 내려놓고 다가가니 무호는 순순히 고개를 숙여 주었다. 청연은 그의 이마를 짚어 보고서는 도로 한 발짝 물러났다.
“괜찮은 것 같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머쓱해진 청연은 다시 뒤로 돌아서 칼을 들었다.
“아침 해 줄 테니까 나가서 기다려.”
그러나 무호는 주방에서 나가기는커녕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그가 손목을 쥐자 청연은 저도 모르게 손의 힘이 풀려 칼을 뚝 떨어뜨렸다.
“왜, 왜….”
청연은 당황한 목소리로 더듬더듬 물었다. 어젯밤 자신의 손목을 침상으로 잡아 누르던 그의 모습이 겹쳐 보여 눈을 둘 곳이 없었다.
반면에 무호는 줄곧 평소와 같은 태도였다. 그는 청연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직 화났잖아.”
“화난 거 아니라니까… 아니, 솔직히 말하면 어젯밤에 화나기는 했는데 그거야 네가 날 속였으니까 당연히 괘씸했지…. 어쨌든 지금은 풀렸어….”
청연은 횡설수설 말하며 눈을 피했다.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고 나가 있어.”
그러면서 무호를 주방 밖으로 떠밀었다. 그를 자리에 앉혀놓고는 주방으로 돌아와 요리하려는데, 이번에는 민아가 나타나 훼방을 놓았다.
“아직 안 갔네?”
그의 말에는 주어가 없었지만, 무호를 두고 하는 말이라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청연은 고개를 절레 저으며 답했다.
“내가 여기서 지내라고 했어. 당분간 안 가.”
“또 네 방에서 잤지?”
“…….”
이번에는 민아의 질문에 뜨끔하고 말았다. 청연이 답을 하지 못하고 주저하자 민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거 봐. 그러고서도 아무 사이가 아니야? 쟤가 너 좋아하는 거 뻔히 알면서 한 침상에서 끌어안고 자는 게 진짜 아무 사이 아닌 거냐고.”
“그건….”
청연은 그게 다 사술 때문이라고 변명하려 해보았지만 어젯밤 일을 떠올리니 그마저도 거짓말 같아 식은땀이 났다.
“조금 전에도 쟬 보는 눈빛이 아주 각별하던데.”
“내 눈빛이 뭐가 어쨌다고.”
제하도 그러더니 이제는 민아까지 눈빛 타령이다. 제 눈빛이 대체 어디가 그렇게 특별하고 각별하다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몸은 어떠냐면서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손목 잡히니까 얼굴 붉히면서 어쩔 줄 몰라 했잖아. 화가 났느니 안 났느니 하면서 옥신각신하고.”
“내가 언제!”
“누가 보면 객잔에 신방 차린 줄 알겠다.”
“…….”
신방이라니. 청연은 뒤로 쓰러지고 싶은 걸 꾹 참으며 요리에 집중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민아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에 바빴다.
“내가 떠나자고 한 건 생각해 봤어? 아직 안 늦었어. 둘 사이가 더 깊어지기 전에 얼른 정리하고….”
“안 가.”
청연은 단호하게 답했다. 인제 와서 모든 걸 내팽개치고 도망치듯 떠날 수는 없었다. 그 말에 민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친구 걱정돼서 그러는 건데 왜 말을 안 들어? 너 그러다 진짜 상처받는다니까?”
“내가 상처받을 게 뭐가 있는데.”
무호가 폭력적으로 변해서 내가 다치거나 죽을지도 모른다는 거? 아니면 무호가 정해진 운명대로 전쟁을 일으키고, 제하의 손에 죽는다는 거?
청연은 사실 어젯밤부터 조금 이기적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만약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제하의 무위가 원래 가졌어야 할 수준에 크게 못 미치니 무호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거 아닌가. 그러면 괜찮은 거 아닌가.
그러나 그런 생각은 얼마 안 가서 접었다. 무호가 죽지 않는다고 해서 전쟁이 나도 괜찮을 리 없었다. 제하와 여운, 그리고 그동안 자신이 알고 지낸 모든 양민의 목숨이 걸려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마교가 전쟁에서 승리해 중원 정복을 이뤄낸 이후에도 무호가 살아남을 거란 보장이 없었다.
그래도 우선은 제하가 그의 목을 칠 수 없다는 단 한 가지 사실만이라도 굳게 믿기로 한 참이었다. 그가 죽는다는 걸 상상만 해도 숨이 턱 멎는 느낌인지라 그렇게라도 해야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청연은 목소리를 작게 낮추고 속삭였다.
“너도 알잖아. 제하의 무위가 아직 쟤한테 한참 못 미친다는 거.”
“아니… 답답해 죽겠네.”
민아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그런다고 운명이 네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니까? 제하의 무위랑은 상관없는 일… 아차.”
“뭐라고?”
청연이 묻자 민아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손을 휘휘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제하의 무위랑 상관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야. 내가 말을 잘못했어.”
무언가 미심쩍었다. 청연은 들고 있던 국자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너 혹시 나한테 말 안 한 거 있어?”
“아, 그런 거 아니라니까….”
민아는 이제 땀을 뻘뻘 흘리며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급기야 그 자리에서 도망치기까지 했다.
“난 오랜만에 밖에 나가서 아침 먹고 올게! 이따 오후에 봐!”
청연은 쏜살같이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의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분명 무언가 숨기고 있는 듯한데 그게 무엇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가 오후에 돌아오면 다시 추궁해야겠다 생각하며, 청연은 완성된 요리를 들고 무호가 앉아 있는 자리로 다가갔다.
“오이가 아니네.”
무호는 그릇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
“응. 너 주려고 오이 잔뜩 썰었는데 생각해 보니까 줘도 다 태워 버릴 게 뻔해서.”
사실은 거짓말이었다. 오이를 주려다가 주방에서 나오기 직전에 괜히 마음이 약해져 전부 빼버렸을 뿐이었다.
“…진짜 화 풀렸어?”
“그래, 풀렸어. 어쨌든 앞으로는 그러지 마. 사술 때문인 줄 알고 엄청 걱정했는데 속은 느낌이라 더 기분 안 좋았단 말이야.”
너 때문에 흥분해버려 더 심란했다는 말은 절대 할 수 없었다. 안 그래도 그와 마주 앉아 어색한 걸 겨우 참고 있었다.
그래도 아침 식사가 끝나면 어색한 상황은 피할 수 있겠지 생각했건만, 오히려 할 일이 없어지니 그를 피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주방은 점점 분주해져 자신이 끼어들 틈이 보이지 않았고, 손님 주문을 받을 직원들도 충분했다.
결국 언제 발작할지 모르는 무호의 옆에 꼭 붙어 있는 수밖에 없었는데, 방 안에서 단둘이 붙어 있다 보니 자연히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몸을 짓누르던 뜨거운 체온, 질척이던 소리, 허벅지 아래쪽부터 타고 올라와 은밀한 곳에 닿을락 말락 하던 손길….
마침 침상 위에 걸터앉아 있던 청연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그는 자리에서 후다닥 일어나며 말했다.
“나 주방에 가서 찻물 좀 떠올게.”
무호는 말없이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짙은 눈동자가 모든 걸 꿰뚫어 보는 듯해 마음이 급해졌다.
“금방 올 테니까 잠시만 있어.”
“청연.”
무호의 손이 떠나려던 청연의 손목을 잡았다. 하필 또 손목이었다. 청연은 움찔한 걸 티 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물었다.
“왜?”
“미안해.”
“…….”
청연은 갑작스러운 사과를 건네는 그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속여서 미안해.”
“…괜찮아.”
사실은 부끄러워 죽고 싶을 지경이라 그다지 괜찮지 않았지만, 진심이 담긴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청연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잘생긴 얼굴을 내려다보며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는 사이 무호의 팔이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제 안 그럴게.”
몸에 닿아오는 체온이 뜨겁지는 않지만 따뜻했다. 그 따뜻함에 간밤의 서운함까지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청연은 살며시 손을 들어 올려 그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으응…. 알겠어.”
지금 와서 되짚어 보니 어젯밤 일은 자신의 잘못도 있는 것 같았다. 무호는 저보다 어리고, 연애 경험도 없는 데다가 충동적이지 않은가. 그런 그의 손길을 받으며 사리 분별도 못하고 흥분해버린 자신이 미숙했다.
역시 새파랗게 어린애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다. 이렇게 미안하다고 어렵사리 사과까지 하는데….
청연은 또다시 자신의 몸을 탓하며 무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순한 양 같은 눈동자가 시선을 맞춰왔다.
그러나 청연은 이내 다시 움찔했다. 조금 더 시선을 내려 무호의 검은 옷깃 사이로 드러난 무언가를 발견한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어…?’
옷 안쪽에서 그의 가슴을 감싼 하얀 붕대의 끄트머리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