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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객잔 정상 영업합니다 (119)화 (120/145)

119

아침상 정리를 마친 후, 두 사람은 시장으로 향했다. 청연은 옆에서 걷고 있는 무호의 얼굴을 힐끔힐끔 훔쳐보았다. 역용술로 변장한 외모는 여러 번 보아도 좀처럼 익숙해지지를 않았다.

그러던 중 청연의 눈길을 알아차린 무호가 물었다.

“왜.”

“그냥. 매번 같은 생김새로 바꾸는 걸 보면 그 얼굴을 참 좋아하는구나 싶어서.”

“예쁘잖아.”

“으응…. 예쁘지.”

청연은 떨떠름하게 답했다.

미인이긴 하지. 길고 시원한 눈매에 얄쌍한 콧날,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간 입매. 무호는 저런 외모가 취향인 건가.

그러나 청연의 눈에는 역용술을 쓰지 않은 그의 진짜 얼굴이 훨씬 잘나 보였다. 이목구비의 선이 굵고 짙어 강한 인상을 주는 데다가 상대를 압도하는 분위기까지. 처음에야 무서워 보일지 몰라도 한번 보면 잊을 수 없을 만큼 잘생긴 외모인 건 확실했다.

지금은 정체를 감춰야 하는 상황이라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지만, 그 얼굴 안 쓸 거면 차라리 바꾸자고 하고 싶은 정도였다. 청연은 사실 곱상한 미인상보다는 뚜렷한 미남형 얼굴을 더 선호했다. 그렇다고 자신의 외모에 불만을 가진 건 전혀 아니었지만 말이다.

“예쁘긴 한데 네 원래 얼굴만 못해.”

청연이 무덤덤하게 말하자 무호는 잠시 멈칫했다. 그는 무어라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이내 마음을 접은 듯 입을 닫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지난밤에 도둑맞은 향신료를 모두 구매한 뒤, 청연은 시장을 더 둘러보기로 했다. 딱히 살 건 없었지만 외출한 김에 바람이나 쐬자 하는 생각이었다. 그때 옆에서 나란히 걷던 무호가 청연의 손에 들린 짐을 빼앗아 들었다.

“무거운 것도 없는데 왜 그래. 내가 들게.”

무호는 말없이 청연의 다친 손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짐을 넘겨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손을 심하게 다친 것도 아니고 더 이상 비실비실한 몸도 아닌데, 어딜 가나 과보호 받으며 병약자 취급당하는 건 여전했다. 건강하다 못해 기운이 넘치던 청연은 왠지 민망해졌다.

조금 더 걸어가다 보니 익숙한 가판대가 눈에 띄었다. 청연은 그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저기 청과상 있다. 사과 사줄까?”

무호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내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어린애 취급하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왜? 너 사과 좋아하잖아. 오랜만에 사줄 테니까 얼른 와.”

이제 재력으로는 무호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청연은 그를 질질 끌고 가판대로 다가갔다. 청과상 주인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말했다.

“오늘은 처음 보는 사내와 함께 왔네. 혹시 형님이오?”

“형님… 이요?”

청연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묻자 그는 무호를 가리키며 웃었다.

“두 사람이 형제처럼 똑 닮았길래 한번 물어봤소. 다시 보니 분위기가 전혀 다른 게 피를 나눈 사이는 아닌 것 같구먼.”

닮았다고?

청연은 당황스러운 마음에 눈길을 돌려 무호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을 응시하니 이목구비 생김새가 자신과 조금 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무호는 딴청을 피우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얘가 설마….’

일부러 나랑 닮은 얼굴로 변장하는 건가?

‘그 얼굴을 참 좋아하는구나 싶어서.’

‘예쁘잖아.’

조금 전, 무호의 변장한 얼굴을 두고 나눴던 대화를 떠올린 순간 청연은 또 한 번 민망해졌다. 마치 고백 아닌 고백을 들은 듯한 기분이었다.

때마침 청과상 주인이 건넨 질문이 아득해졌던 그의 정신을 깨웠다.

“뭐 드릴까?”

“아… 사과요. 사과만 주시면 됩니다.”

청연은 얼떨떨한 채로 돈을 꺼내 건넸다. 덕분에 생각보다 많은 돈을 지불해버려 사과를 한 궤짝이나 사게 되었다. 옆에서 가만히 기다리던 무호가 사과로 가득 채워진 궤짝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 시장을 거닐었다. 청연은 궤짝을 힐끗 보며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렸다.

“어쩌다 이렇게 많이 샀지…. 열심히 먹어야겠다.”

그래도 네가 잘 먹으니까 괜찮겠지, 말하며 무호의 눈치를 살피니 그는 여전히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청연은 아무 말이나 나오는 대로 내뱉었다.

“짐꾼 있으니까 편하긴 하네. 진작 데리고 다닐 걸 그랬나 봐.”

“…….”

“어렸을 때도 나보다 힘이 셌는데. 그때도 짐꾼으로 데리고 다녔으면… 아.”

자신이 방금 무슨 말을 한 건지 깨달은 청연은 입을 꾹 다물었다. 괜한 말을 꺼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장에 함께 가자던 어린 무호를 거절한 사람은 자신이었고, 그 결과로 돌아온 것은 기나긴 이별이었다.

무호는 그제야 청연과 눈을 맞추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마치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 주는 것만 같았다.

눈을 굴리며 고민하던 청연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있잖아, 해우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그날 이후로 객잔에 안 나오길래 다른 숙수를 구하기는 했는데, 제대로 정리를 못 한 것 같아서 마음에 걸리더라고. 너는 걔한테 사과도 못 받았잖아.”

“마음대로 해.”

“마음대로 하라고?”

청연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넌 화도 안 나? 그 애 아니었으면 그렇게 신강으로 돌아갈 일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무호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다 내 운명이었나 보지.”

운명.

그의 입에서 나온 단어에 청연은 할 말을 잃었다. 요즘 들어 부쩍 자주 듣는 단어였다.

운명을 바꾸기 쉽지 않을 거라던 민아의 말이 떠오르자 마음이 순식간에 축 가라앉았다.

‘운명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기분 나쁜 거였나.’

청연은 언젠가 꿈에서 보았던 장면을 상기했다. 붉게 물든 하늘과 산더미처럼 쌓인 시신들, 그리고 그 가운데 쓸쓸하게 서 있던 한 사람.

‘그때 제하에게 무호를 죽이라고 명령한 것도 나였는데.’

그래서 이렇게 마음이 무거운 걸까. 꿈속에서 저지른 일에 대한 업보를 지금 받는 걸까.

왜 그러느냐 묻는 무호의 목소리가 귓가에 윙윙 울렸다. 청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별거 아니야. 이제 집에 가자.”

한가하게 돌아다닐 때가 아님을 잊고 있었다. 청연은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무호를 향해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려 보이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

객잔에 도착한 청연은 다시 방에 틀어박혀 책 속에 파묻혔다. 읽어야 할 책이 산더미인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옆에서 집중을 방해하는 한 사람이었다.

“그런 건 좀 저쪽에 가서 하면 안 돼?”

청연은 이마를 짚으며 물었다.

“옆에 붙어 있으라며.”

역용술을 풀어 원래의 얼굴로 돌아온 무호가 답했다.

그는 조금 전부터 허공섭물로 사과를 움직여 탁자 위에 탑을 쌓아 올리고, 탑의 높이가 사람 키 정도 되었을 때 무너뜨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자꾸만 책 위로 쏟아지는 사과 때문에 청연은 도저히 집중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너 일부러 그러는 거야?”

남 일도 아니고 자신의 사술을 해결하려고 읽는 책인데, 얌전히 앉아 같이 읽지는 못할망정 방해나 하고 있다니.

“그런 거 읽어 봤자 소용없다니까.”

무호는 또다시 쌓아 올린 사과 탑을 무너뜨리며 말했다. 역시 고의로 방해하는 게 맞았다.

“소용없다니. 뭐라도 찾아봐야 할 거 아니야.”

청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책을 못 믿겠으면… 그러면 의원님이라도 다시 만나 볼래? 응?”

“아니.”

“…아, 몰라. 네가 원하든 말든 난 의원님한테 서신 쓸 거야.”

청연은 탁자 위에 널려 있는 사과를 대충 밀어서 치워 버리고는 종이와 붓을 꺼냈다. 붓에 먹을 묻혀 글씨를 쓰려고 하니 이번에는 종이가 불에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누구의 짓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죽을래?”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흘리며 무호를 노려보던 청연은 이내 스스로가 내뱉은 말에 깜짝 놀랐다. 죽는다는 말 같은 거 함부로 꺼내면 안 되는데, 경솔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호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청연의 의자 뒤쪽으로 다가왔다.

“청연.”

“왜….”

청연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답하며 고개를 들어 무호를 올려다보았다. 무호는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무 애쓰지 마.”

“…….”

“위험해지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뭘 어떻게 할 건데?”

무호는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종이 한 장을 더 꺼내 펼쳐 놓았다. 그러고서는 붓을 들고 있는 청연의 손을 살며시 감싸 쥐었다.

아삭하는 소리와 함께 한입 베어 문 사과가 종이 한쪽 귀퉁이에 놓였다. 붓을 쥔 두 사람의 손이 종이 위에서 천천히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청연은 무호가 자신의 손을 잡고 마음껏 움직이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가 종이에 적어 내려간 것은 무호와 청연, 두 사람의 이름이었다. 어릴 적 그랬던 것처럼 두 이름이 종이 위에서 보기 좋게 어울렸다. 자신의 것과 똑 닮은 서체를 바라보던 청연은 마음이 먹먹해졌다.

“누구한테 배웠는지… 글씨는 잘 쓰네.”

청연은 아무렇지 않은 척, 장난스러운 투로 말했다. 그러자 무호가 겹쳐 잡은 손을 움직여 몇 글자를 더 써 내려갔다.

다 네가 가르쳐 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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