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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객잔 정상 영업합니다 (117)화 (118/145)

117

청연은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났다. 창문으로 밝은 아침 햇살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이렇게 오래 잤다고?’

분명 어제 해 질 녘쯤 잠든 것 같은데. 잠깐 꿈에서 깨어나 무호를 만났던 건 기억한다만, 그 이후로 쭉 잠만 잤나 보다.

‘무호는 어디 갔지?’

옆에 있으라고 그렇게 당부했는데 또 도망간 건가. 그럼 그렇지.

청연은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꿈틀꿈틀 반대 방향으로 돌아누웠다. 그러자마자 자신의 눈을 의심하게 되었다.

눈앞이 온통 살색이었기 때문이다. 설마 아직도 꿈을 꾸는 건가 싶어 고개를 흔들어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손을 들어 흐릿한 눈을 벅벅 문지르니 시야에 들어온 것은…

가슴?

누군가의 가슴이었다. 근육으로 다져진 두툼한 몸이 코가 닿을락 말락 가까운 거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청연은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앉으며 외쳤다.

“깜짝이야!”

놀라서 기절할 뻔했네.

청연은 씩씩거리며 아무렇지 않게 누워 있는 무호를 노려보았다.

“거기 있으면 제발 숨소리라도 좀 내. 간 떨어질 뻔했잖아. 게다가 옷은 또 왜 벗고 있어?”

“벗고 자면 안 되는 건가.”

“가슴이 너무 크잖아!”

“뭔….”

무호 역시 조금 전 잠에서 깨어난 듯, 나른한 얼굴로 청연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청연의 팔을 끌어당겨 도로 침상에 눕혀놓았다.

“밤새 거기 있었어?”

“응. 이렇게 안고.”

낮은 목소리와 함께 단단한 팔뚝이 허리에 감겨왔다.

“옆에 있으라는 게 꼭 껴안고 자자는 말은 아니었단다….”

청연은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이전 같았으면 기겁을 하며 밀어냈겠지만 이제 이 정도쯤은 익숙했다. 습관은 역시 무서운 거였다.

‘습관이 무서운 거냐, 익숙해진 나 자신이 무서운 거냐.’

그래도 무호가 떠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당분간 객잔에서 지내라는 제안을 수락한 모양이었다. 청연은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나 자는 동안 별일 없었어?”

무호는 청연의 날개뼈 부근에 묻은 얼굴을 끄덕였다.

“몸은 괜찮고?”

열감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괜찮은 것 같긴 하다만.

청연은 다시 무호를 향해 돌아누워 이마를 짚어보았다. 그 와중에 순한 양 같은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그의 모습이 왠지 낯설었다.

“얘가 웬일로 눈을 착하게 뜨고 있지?”

“…착하다며.”

아차, 속으로 생각한다는 걸 입 밖으로 뱉어 버렸다.

“그래, 사과할 줄도 알고 착하지. 그런데 나 자는 동안 진짜 아무 일도 없었던 거 맞아?”

다시 고개를 끄덕이는 무호를 보면서도 무언가 미심쩍었다. 혹시 객잔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청연이 아래층에 내려가 보기로 결심한 그때, 마침 이층 복도를 걷는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 발소리는 청연의 방 바로 앞에서 멈췄다.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도 함께였다.

“아직도 자?”

민아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울렸다. 어젯밤에 방 문을 잠갔던가 되짚어 보던 청연은 아연해졌다. 무호의 팔이 아직 허리를 꽉 안고 있는 데다가 민아는 대답이 없으면 문을 벌컥벌컥 열어젖히는 습관이 있었다.

“깨, 깼어!”

청연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옷가지를 후다닥 집어 무호에게 던졌다. 그러나 그는 멀뚱멀뚱 옷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뭘 그렇게 오래 자? 어제 저녁도 안 먹고. 어디 아파?”

빨리 옷이나 입으라며 파닥파닥 손짓하던 청연은 목을 가다듬고 답했다.

“하나도 안 아파! 금방 내려갈 테니까 일 층에 있어.”

“목소리도 이상한데. 나 들어간다?”

“들어오지 마!”

청연이 급히 외쳤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문을 벌컥 열어버린 민아는 침상 위 두 사람을 목격하고는 아찔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는 오직 감탄사뿐이었다.

“오… 야….”

“들어오지 말랬잖아….”

청연은 고통스러워하며 옆에 있는 무호를 흘겨보았다. 그는 어느새 다른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난번,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해령에게 들켰을 때와 같은 미인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웃통을 벗은 꼴인 건 여전했다.

“야아… 미안하다. 내가 실수했네….”

민아가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말했다. 그는 주춤주춤 뒷걸음질 쳐 방을 떠나려고 했다.

“그런 거 아니야!”

청연의 해명 시도에도 불구하고 민아는 엄지를 척 들어 보이며 아련한 목소리로 마지막 전언을 남겼다.

“드디어 실연의 아픔을 극복했구나. 항상 널 응원한다, 친구야.”

“응원하지 마!”

문이 번개보다 빠른 속도로 닫혔다. 좌절한 청연은 뜨거워진 얼굴을 이불 속에 묻었다.

“너 때문에 못 살겠어…. 지금까지 했던 말 다 취소야. 하나도 안 착해.”

그러면서 손을 뻗어 무호의 벗은 몸을 찰싹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무호는 그제야 안고 있던 팔을 풀고 몸을 일으켜 주섬주섬 옷을 입으며 말했다.

“네 몸을 보인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야.”

“사람들이 자꾸 오해하잖아.”

“오해하라지.”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에휴, 됐다. 얼른 입고 일어나. 내려가서 아침 만들어 줄게.”

민아에게는 나중에 해명해야겠다. 대강 준비를 마친 청연은 무호와 함께 방을 나섰다. 그는 복도를 몇 발짝 걷다 말고 어느 방 앞에 멈춰 섰다.

“제하야, 안에 있어?”

문을 두드리며 물었으나 방 안에서는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청연은 살며시 문을 열어 보았다. 잠기지 않은 문이 손쉽게 열렸다.

방은 역시 텅 비어있었다. 제하의 물건이나 옷가지 또한 보이지 않는 걸로 봐선 이미 객잔을 떠난 듯했다.

‘아침 일찍 간다고 했던 것 같긴 한데, 식사는 하고 갔나?’

늦게까지 자는 바람에 배웅도 못 해 줬다. 서운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청연은 문을 닫고 일 층으로 내려갔다. 무호를 자리에 앉혀놓고는 주방으로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발밑에서 쩌적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바닥에 금이 가 있었다.

“이게 무슨….”

바닥을 자세히 살펴보던 청연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금 간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흔적을 따라가던 그는 금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점을 발견했다.

그 지점만 유독 바닥이 내려앉은 느낌이었다. 갈라지다 못해 바스러진 나무 파편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이 정도면 사람 무게 정도 되는 물건이 높은 곳에서 낙하해 바닥에 처박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 객주님!”

마침 옆을 지나치던 점소이가 다가와 말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아세요? 어제 퇴근할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거든요. 다른 사람들한테도 물어봤는데 아무도 모른대요.”

“아무도?”

“네. 저희끼리는 밤새 술 취한 손님이 그런 거 아닐까 생각 중이었어요. 아니면 또 누가 싸웠거나요.”

청연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무호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착한 눈을 한 그가 당당히 시선을 맞춰왔다. 순진하게 빛나는 검은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뭔가 싸한 기분이 들었다.

의심을 가득 품은 청연은 다시 걸음을 돌려 무호에게로 다가갔다. 나름대로 손에 힘을 실어 박력 있게 탁자를 짚으니 쾅 소리가 났다. 그런데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무호에게 물었다.

“저거 뭐야?”

“뭐가.”

“바닥에 금이 갔는데 뭐 아는 거 없어?”

“몰라.”

그의 대답에 청연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모른다고? 밤새 아무 소리도 못 들었어?”

“못 들었어.”

예쁜 미청년의 얼굴을 한 무호가 덩달아 눈썹을 치켜올리며 답했다. 청연은 그의 뻔뻔한 얼굴을 세밀히 관찰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천산 밑에서 누군가 접근하는 기척까지 귀신같이 알아차리던 애가 바닥이 저렇게 되도록 아무것도 몰랐다고? 저 정도면 자다가도 깼겠다.

모른다고 잡아떼는 걸 보아하니 그와 연관된 일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렇다 할 물증이 없어 더 이상 추궁하기도 어려웠다. 청연은 찜찜한 마음을 안고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

이상한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주방에 있던 향신료 몇 가지가 사라졌다. 그것도 고추를 포함해 유독 매운 향을 내는 것들만 골라서 말이다.

청연은 텅 빈 함들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사천, 매운 요리가 특색인 곳인데 이래서야 장사는 할 수 있겠나.

‘지난밤에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청연은 이를 갈며 오이를 꺼내 썰었다. 오늘 아침상은 오이로 가득 채울 것이다.

***

어젯밤, 무호는 정말로 여운의 사지를 찢어 죽일 생각이었다. 누군가의 다정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지기 전까지는.

‘그래, 착하다.’

조금 전에 청연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해 주던 말이 그의 행동을 멈춰 세웠다. 그 말을 떠올리자 이상하게 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착하다고 했으니 착하게 굴어야 하나?’

하지만 이놈은 청연을 다치게 한 사람이니 죽여도 마땅하지 않나?

‘그렇지만 나보고 착하다고 했는데.’

열심히 고민하다 보니 점점 살의가 사그라들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무호는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이놈을 죽이면 청연이 자신을 미워할지도 모르는 일이니, 죽이는 대신 다시는 검을 잡지 못하게끔 손을 부숴버리자.

‘그 정도로 넘어가면 착한 게 맞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여운의 손을 잘게 조각내려던 참이었다. 청연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귓가에 울렸다. 이번에는 머리칼을 쓰다듬는 손길까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래, 착하다.’

요즘 사술에 대한 책들을 읽고 있다더니, 자신에게까지 사술을 걸었나 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깟 놈 하나 처리하는 게 이렇게 망설여질 리 없었다.

‘이놈 손을 못 쓰게 만들면 청연이 날 원망할까.’

아무래도 그렇겠지. 다시는 착하다고 칭찬해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무호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한발 뒤로 물러났다. 다른 놈들이면 몰라도 이 두 놈은 자신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청연에게 미움을 사느니 거슬리는 놈들이 설치는 걸 꾹 참고 넘어가는 편이 나았다.

압박에서 풀려난 여운이 쿨럭 기침을 하며 일어나 무호를 노려보았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느꼈음에도 전혀 기죽지 않은 눈빛이었다. 오히려 왜 공격해오지 않느냐고 따져 묻는 듯했다.

“…뭐 하는 짓이지?”

이를 악문 그의 질문에 무호는 심드렁하게 답했다.

“살려 줄 테니 꺼져.”

“살려 달라고 한 적 없는데.”

여운이 답하며 검을 뽑아 들었다.

“나는 사악한 놈들로부터 세화의 육신이라도 지킬 것이다.”

영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정말 죽고 싶어서 저러는 건지는 몰라도 쉽게 꺼지지 않을 생각인 듯했다. 무호는 다시 마음을 돌려 그를 죽여야 하나 고민했다. 그의 부고를 언제까지 청연에게 숨길 수 있을지 머릿속으로 계산하던 그때였다.

“잠깐.”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제하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며 말했다.

“여운 도장을 내버려 둬. 내게 좋은 생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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