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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객잔 정상 영업합니다 (115)화 (116/145)

115

“그러니까….”

방으로 돌아와 침상에 걸터앉은 청연은 자신의 손에 꼼꼼히 약을 바르는 여운의 얼굴을 응시했다.

“네가 이 몸에 들어왔을 때 세화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는 거지?”

애써 침착하게 묻고 있었지만 사실은 하나도 침착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청연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손이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미련이 남아서… 혼백 한 조각을 두고 가는 바람에 혼자서 귀계를 떠돌았다고.”

“응….”

“십 년 동안.”

십 년, 발음을 짓이기듯 중얼거린 그는 붕대를 꺼냈다.

“내가 한다니까.”

청연이 다른 쪽 손을 뻗어 빼앗으려 했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붕대로 상처를 감쌌다. 세화의 몸이니 상처 치료도 꼭 자신이 직접 해야 한다는 것처럼 말이다.

“너는 꿈을 통해 과거를 봤다고?”

“응. 꿈을 꿀 때마다 세화의 감정에 크게 영향을 받았어. 그러다가 기억을 완전히 찾았을 때는 내가 누군지도 헷갈릴 정도였어.”

일부러 속인 게 아니라고 다시 한번 말해야 하나. 청연이 고민하는 사이 여운이 건넨 질문은 뜻밖의 것이었다.

“꿈속에서 그 애는 어땠어?”

“…….”

“세화의 감정에 영향을 받았다며. 날 떠난 뒤에 어땠어? 조금이라도 행복해졌어?”

그의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붉게 충혈된 눈을 차마 마주하기 힘들었던 청연은 시선을 떨궜다.

단 한 번도 행복하지 못했어. 죽을 때까지 너만 그리워했고 지나간 날들을 후회하며 살았어.

“아니구나.”

행복하지 못했구나. 청연의 침묵에서 깨달음을 얻은 그는 마른세수를 했다. 입술을 깨물던 청연이 말했다.

“그래도 한 가지 알아야 할 건… 세화도 네가 행복해지기만을 바랐어. 떠나는 그날까지도 말이야.”

그러자 여운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방 안을 서성거리며 돌아다니다가 창가 앞에 서서 노을 지는 후원을 내다보았다. 깊은 한숨을 내쉬는 뒷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사실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

“…….”

“네가 바로 여기 있는데, 어떻게 세화가 아니라는 건지.”

이해가 안 되는 게 당연했다. 머리로는 이해하더라도 그걸 바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 그게 사람인가. 청연은 그저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몇 날 며칠 밤을 새우면서 고민해 봐도 나는….”

청연도 지난번 고백 이후 밤을 새워가며 고민했다. 여운에게 끌리는 감정이 세화의 것인지, 자기 자신의 것인지. 하지만 그런 건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게 누구의 것이든 간에 정리해야 한다는 거였다.

“몇 번을 시험하든 내가 세화가 아니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래도 네가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된다면 뭐든지 할게. 더 때리고 싶으면 때려. 혹시 내가 사라지길 원한다면 멀리 떠나서 앞으로 네 눈에 띄지 않을게.”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내린 결론이었다. 잠을 설치고 끼니를 거르며 슬퍼하기도 했지만 결론을 내린 순간 모든 게 명확해졌다. 여기서 멈춰야 한다.

감정을 끊어 내야 했던 자신과 반대로 모든 걸 혼자서 안고 살아가야 할 여운에게는 더욱 가혹한 나날이 될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지 천천히 생각해 보고 결정해. 준비되면 말해 줘. 난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당분간 못 와.”

여운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곤륜이 봉문할 거라는 소문, 사실이야. 그전에 마지막으로 찾아온 거야.”

그의 말에 청연은 생각에 잠겼다. 정말로 마교에서 곤륜을 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해 줘야 하나. 하지만 그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곤륜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무호의 상태 이상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그러면 일단 그 검이라도 가져가. 세화한테 소중한 물건이었잖아.”

청연이 말하자 검을 내려다보던 여운은 고개를 저었다.

“가지고 있어.”

네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정말로 세화의 혼백이 사라진 거라면 그의 몸이라도 안전하게 지켜달라는 부탁을 청연은 무시할 수 없었다.

여운이 방을 떠난 뒤, 청연은 검을 원위치에 돌려놓았다. 검이 마치 두 사람분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듯 무겁게 느껴졌다. 붕대를 칭칭 동여맨 손으로 매끈한 검집을 쓸어보던 그는 이내 침상으로 걸어가 드러누웠다.

‘제하 저녁상 차려 주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손은 요리하다가 다친 거라고 둘러대자.’

수많은 걱정이 몸을 짓눌러 좀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청연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문지르며 눈을 감았다.

***

이렇게 꿈을 꾸는 것도 오랜만이다. 세화의 기억을 찾게 된 이후로는 처음인가.

청연은 눈알을 도르륵 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겨울이 지나 봄이 찾아온 곤륜산에는 꽃이 피어나고 푸른 잎사귀가 돋아났다.

나뭇가지 위에 걸터앉은 세화는 두 다리를 허공에 대롱거리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누구인지는 고민하지 않아도 뻔했다.

“사형!”

소리 내서 불러도 못 들은 척 나무 아래를 휙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세화는 곧장 뛰어내려 그의 뒤를 쫓았다.

“사형, 어디 가세요? 바쁘세요?”

“바빠.”

여운은 성가시다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걸었다. 그에 질세라 세화도 발걸음을 빨리했다.

“아, 또 왜 그러시는데요. 어젯밤 일 때문에 아직도 화나셨어요?”

“저리 가.”

“일부러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저는 진짜 계곡에 아무도 없는 줄 알았다고요. 옷만 덩그러니 놓여 있길래 누가 두고 간 거라고 생각해서 주인 찾아 주려고 가져간 거예요. 사형이 물속에 있는 걸 알았으면 절대 안 그랬죠.”

“…….”

“그러게 그 차가운 폭포 물 좀 작작 맞으시라고 말씀드렸잖아요. 폭포 소리가 하도 요란해서 옷 가져가는 소리도 못 들으시고 말이에요.”

등 뒤에서 누가 열심히 떠들든 말든 여운은 제 갈 길을 가기 바빴다.

“시랑, 나 좀 봐.”

세화는 후다닥 달려가 여운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고서는 불쾌함에 찡그려지는 그의 미간을 엄지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그렇게 부르지 말랬잖아.”

세화에게 쏘아붙이는 여운의 얼굴은 아직 앳돼 보였다. 많아 봤자 열여섯 정도일 것이다. 날카로운 눈매로 아무리 노려보아도 하얀 얼굴에 올라온 홍조가 귀엽게만 느껴졌다.

‘사형을 앞에 두고 귀여워하면 안 되는 건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어젯밤 자신에게 화를 내던 여운의 얼굴을 생각하면 비실비실 웃음이 나왔다. 사실은 화내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일부러 꾸민 짓이었다. 그러다가 또 몇 대 얻어맞았지만 말이다.

그를 놀리는 건 유난히도 즐거웠다. 무슨 짓을 하든 반응이 크게 돌아오니 놀릴 맛이 났다.

“화 풀어, 응? 내가 잘못했어. 사제가 이렇게 사과할 테니까 용서해 줘.”

“…….”

“다시는 그런 실수 안 할게. 그리고 철없는 장난도 안 칠게!”

전부 거짓말이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실수할 거고, 철없는 장난도 칠 것이다.

세화가 거듭 사과하자 드디어 여운의 표정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화낼 때를 제외하면 늘 무덤덤한 얼굴인지라 크게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 그의 눈치를 살피는 데 도가 튼 세화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역시 대인배야. 마음이 장강보다 넓어.”

“그만해.”

“그릇이 넓고 재능도 타고났으니 분명 큰 사람이 되겠지. 혹시라도 나중에 마교에서 쳐들어오면 저는 대협만 믿고 있겠습니다.”

“그런 소리 좀 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

여운은 누가 듣기라도 했을까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그를 바라보던 세화는 헤헤 웃었다.

두 사람은 이제 꽃나무 아래를 나란히 걷고 있었다. 빨랐던 걸음걸이는 어느새 느려져 봄 특유의 느긋한 기운과 잘 어울렸다. 여유롭게 콧노래를 부르던 세화는 여운의 옆얼굴을 곁눈질하며 말했다.

“우리는 전생에 부부였던 게 아닐까?”

“또 뭔 소리야.”

“그렇잖아. 별것도 아닌 걸로 싸우고, 화내고. 그다음 날 되면 또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화해하고 붙어 다니는 거 봐.”

“그건 다 너 때문에….”

“그래. 다 내 탓이야. 내가 전생에 부인을 못살게 굴고 장난치던 게 습관 돼서 그래.”

부인이라는 단어에 발끈한 여운의 손등에 힘줄이 돋았다. 세화는 모르는 척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이번 생에는 마음껏 치고받을 수 있게끔 사형제로 환생한 거지. 어차피 혼인할 일도 없겠다, 둘이 평생 싸우고 화해하고 우애를 다지면서 살면 되겠다. 어때?”

“알아서 해.”

주먹을 꽉 쥔 여운의 대답에도 세화는 입을 다물지 않았다.

“다음 생에는 뭐가 되려나. 원수지간만 아니면 좋겠는데. 원수가 될 운명이라면 척지기 전에 빨리 찾아야겠다. 너한테 원한을 샀다가는 내 모가지가 남아나지 않을 거야.”

“…….”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내가 먼저 알아봐야겠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거야. 허여멀건 얼굴에 입 꾹 다물고 있으면 그게 너지, 또 누가 있겠어?”

내가 꼭 널 찾아서 먼저 친한 척할 테니까 나랑 척지지 말아 주라. 그때도 나랑 친우 하자. 세화는 뻔뻔하게 말하며 여운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실은 다음 생에도 그를 실컷 놀려 먹으려는 속셈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키가 비슷했는데,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훌쩍 커버린 그의 키 때문에 발꿈치를 약간 들어올려야 했다. 세화는 종종걸음으로 걸어가며 자신의 팔을 뿌리치지 않는 여운을 뿌듯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와 함께 있으면 항상 아무런 말이나 나오는 대로 지껄이게 된다. 성격은 정반대에 가까웠지만 그래서인지 더욱 편하고 즐거웠다. 다시 태어나도 친우가 되고 싶다는 건 거짓이 아니었다.

생김새가 달라져도 알아볼 것이다.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다. 그를 마주하는 순간 하늘과 땅이 알려 줄 테니까. 너의 친우가 여기에 있다고.

“사형, 오늘 저녁 식사 뭐 나오는지 아세요?”

“몰라.”

“또 맛없는 거 나오면 국수나 한 그릇 끓여드릴까요? 저번에 보니까 잘 드시던데.”

“내가 언제. 그건 네가 좋아하는 거잖아.”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사형 입맛은 기가 막히게 잘 맞추죠. 오늘 저녁도 맡겨만 주세요.”

“…….”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는 두 사람의 머리 위로 꽃비가 내렸다. 추운 겨울을 보내고 맞이한 봄이 반갑기 그지없었다. 세화는 할 수만 있다면 이 계절 속에 영원히 머물고 싶었다. 다시는 혼자서 외롭지 않도록.

***

이런 꿈을 꾸다니, 정말 그와 작별할 마음의 준비가 되었나 보다.

청연은 살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언제 해가 저물었는지 방 안이 온통 캄캄했다.

무거운 눈을 깜빡이던 그는 누군가 침상에 걸터앉아 있음을 알아차렸다. 어둠 속에 몸을 완벽하게 감춘 그 사람이 숨을 죽인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손이 청연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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