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우리 객잔 정상 영업합니다 (114)화 (115/145)

114

다음 날 아침, 제하는 다행히 지난밤 벌어진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술을 마신 뒤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건 어렴풋이 아는 눈치였지만 정확하게 말을 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머리만 긁적일 뿐이었다.

“속은 좀 괜찮아?”

청연은 간만에 한국식으로 해장국을 끓여 제하의 앞에 대령하며 물었다. 그는 민망한지 얼굴을 붉히면서도 고분고분 그릇을 받아 들었다.

“괜찮습니다.”

“그래도 먹어.”

“객주님은요? 스승님은….”

“스승님께는 가져다드렸고 난 별로 생각이 없어서.”

“그래도 드셔야지요….”

청연이 고개를 젓자 제하는 하는 수 없이 숟가락을 들었다. 조용히 국물을 떠먹는 그를 바라보던 청연은 입을 열었다.

“어제 네가 한 말 있잖아.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다시 한번 제대로 거절 의사를 밝힐 생각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하가 자신만 바라보며 기다리도록 놔두기엔 양심이 아팠다.

그러나 청연의 의도를 귀신같이 알아차린 제하는 그가 하고 싶은 말을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국물이 좀 맵습니다.”

“아, 그래? 너 매운 거 잘 먹길래 맵게 끓여봤는데. 물 좀 부어서 다시 끓여 줄까?”

“아뇨…. 제가 하겠습니다.”

제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릇을 들고 쏜살같이 사라졌다. 마교의 누구처럼 대화 같은 건 하기 싫다며 도망쳐버린 것이다.

‘이제는 애들이 날 피해서 도망 다니기 바쁘네….’

아침 시간이 지나서도 이런 일이 여러 번 반복되자 청연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듣기 싫다는 사람 귀에다 대고 자기 할 말만 하는 것도 못 할 짓이었다.

더 이상 그 일을 입에 올리지 않으니 제하는 그제야 마음이 놓인 듯 청연을 피하지 않게 되었다. 어색해하는 기색은 남아 있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보였다.

객잔을 너무 오래 비울 수 없었던 청연이 책 몇 권을 빌려 가겠다고 말하자 짐꾼을 자처할 정도였다.

“이 정도는 내가 들 수 있어.”

예전의 연약한 몸도 아니고, 오히려 일반인들보다 훨씬 튼튼해졌는데. 제하의 눈에는 여전히 지켜야 할 상대로 보이는 듯했다. 그는 짐을 빼앗아 들며 말했다.

“사천까지 가는 길에 어떤 놈들이랑 마주칠 줄 알고요. 제가 객잔까지 안전히 모시겠습니다.”

그의 과보호는 부러진 의자조차 고치지 못하게 하던 어린 시절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청연은 결국 그의 고집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성큼성큼 앞서나가는 제하의 뒷모습이 든든해 보이면서도 마음이 한층 더 무거워졌다.

***

객잔에 도착한 청연은 방 안에 쌓인 책들을 응시했다. 어찌어찌 돌아오기는 했으나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무호를 돕고 싶어도 곁에 있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데 어떻게 도울 것인가.

어깨가 부러지지 않았다면 옆에 있게 해 줬을까. 청연은 이쯤 되니 천마의 손아귀 힘을 버텨내지 못하고 박살 난 자신의 뼈를 탓하고 있었다.

‘일단은 제하 저녁이나 챙겨 줄까.’

객잔까지 짐을 들어 준 제하는 오늘 하룻밤을 묵었다 가겠다고 했다. 청연이 또 제 발로 마교에 찾아갈까 불안해서 남아 있는 건지도 몰랐다. 어쨌든 지금은 잠시 자리를 비운 것 같으니 그가 돌아오기 전에 민아와 함께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로 했다.

청연은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문을 연 순간, 기척도 없이 찾아와 자신의 방 앞에 서 있던 누군가와 마주치고는 굳어 버렸다.

“시랑….”

아, 이제 이렇게 부르면 안 되는 건가.

늘 고강한 인상을 풍기던 여운의 얼굴은 못 본 사이 수척해져 있었다. 그늘진 눈매를 한 그가 청연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청연 또한 지난번 그를 보내고 나서 며칠간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더니 살이 많이 빠진 참이었다. 그나마 최근에는 다른 일들에 정신이 팔려 잠시 잊고 있었지만 말이다.

아마도 여운은 자신이 한 말들을 단 한시도 잊지 못하고 내내 시달렸을 것이다. 청연은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언제 왔어?”

“…….”

“그때 내가 했던 얘기는 생각해 봤어?”

묵묵히 서 있던 여운은 청연을 지나쳐 성큼성큼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밖으로 나가려던 청연도 덩달아 뒤돌아 따라가며 그의 뒤에다 대고 물었다.

“곤륜이 봉문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아니야?”

여운은 답이 없었다. 방 한쪽 구석으로 다가가 무언가를 뚫어져라 응시할 뿐이었다.

“너 지금 뭐 하는… 아.”

그가 바라보고 있는 건 세화의 검이었다. 자신이 직접 청연에게 가져다주었던, 설화라고 이름 붙여진 검. 그는 손을 뻗어 검을 집어 들었다.

“그거… 다시 가져가고 싶으면 가져가도 돼. 말했다시피 나는 세화가 아니고 그 검도 내 물건 아니니까….”

그러나 여운은 검을 가져갈 생각은 않고 그걸 청연에게 내밀었다. 청연이 움직이지 않자 나서서 손에 쥐여 주기까지 했다.

“이걸 왜….”

“나랑 비무하자.”

“어?”

청연은 손에 든 검과 여운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에 다짜고짜 찾아와서 아무 설명도 없이 비무라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 당장? 그것도 진검으로?”

“나는 목검을 쓸게.”

“…….”

“후원에서 봐.”

그러고서는 휙 돌아서 방을 떠나버린 여운이었다. 검을 들고 멍하니 서 있던 청연은 이내 그의 뒤를 따랐다.

해가 저물어가는 객잔 후원, 어디선가 목검을 가져온 여운의 뒤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다. 청연이 다가가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돌아보았다. 그러고서는 삼대제자 시절, 세화와 하던 것처럼 정식으로 예를 갖추기까지 했다.

‘진짜 하는 건가?’

그가 목검을 들고 자세를 잡자 청연도 얼떨결에 갑작스러운 비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여운은 차분한 얼굴로 청연을 바라보았다. 선공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의 의도를 파악한 청연은 마음을 굳게 먹고서는 몸이 기억하는 초식을 전개하며 다가섰다.

진검과 목검이 맞붙자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청연은 검날을 통해 전해져오는 힘에 새삼스럽게 놀랐다. 누가 봐도 여운이 자신을 봐주고 있음을 알 수 있었지만, 기본적인 힘의 격차가 상당했다. 그가 들고 있는 것이 목검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게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몸이 바짝 긴장했다. 청연은 심기일전해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으나 눈 깜짝할 새 목검에 가로막혔고, 이번에는 그 반동에 조금 튕겨 나가기까지 했다.

단전을 새로 만들고 혼자 수련했지만 아직 이전의 무공을 완벽하게 되찾지는 못한 상태였다. 반면에 지난 세월 동안 오로지 무공에만 몰두한 여운은 세화를 간단히 이기던 그때보다도 훨씬 강해져 있었다.

“이게 지금 비무의 의미가 있어? 꼭 해야 하는 거야?”

아니면 그냥 나한테 화내고 싶은 거야?

청연이 물었지만 여운은 다시 오라는 듯이 손짓했다. 하는 수 없이 검을 고쳐 잡은 청연은 그가 원하는 걸 해 주기로 했다.

‘화낼 거면 화내고 때릴 거면 때려라. 맞아 줄 테니까.’

두 검이 몇 번이고 다시 맞붙었다. 오랜 시간 겨루지 않았음에도, 그나마도 여운이 전부 봐주었음에도 청연은 금세 힘에 부쳤다. 심지어 상대가 상대인지라 그의 얼굴만 봐도 마음이 약해져 제대로 공격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내가 무슨 염치로 널 공격하겠어….’

그렇게 생각한 청연의 움직임이 느려지자 이번에는 내내 잠잠하던 여운의 목검이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그가 본격적으로 비무에 임하기 시작한 것이다.

청연은 보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날아드는 목검을 막고, 또 피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했다. 그 와중에 가장 견디기 힘든 건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얼음장 같은 눈빛이었다. 세화를 보던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 숨이 막혔다.

결국 그의 마지막 일격에 청연은 검을 놓치며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동시에 검을 쥐고 있던 손의 엄지와 검지 사이가 터져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오른손에 아릿한 통증이 번졌다. 검은 이미 저 멀리 날아간 뒤였다. 손을 대충 털어 낸 청연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여운을 향해 말했다.

“내가 졌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해.”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뭐?”

제대로 듣지 못한 청연이 되묻자 그는 목검을 발치에 툭 던지더니 한 걸음씩 다가왔다. 느릿한 걸음걸음에서 그간의 고통이 느껴졌다.

“그렇게 그만두면 안 되는 거잖아.”

“지금 무슨 소리를….”

“지더라도 인정하지 말았어야지.”

청연은 대꾸하지 못하고 제게 다가오는 여운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조금 전과는 다르게 공허한 눈을 한 채 걸어오고 있었다.

“네가 진 게 아니라 나를 봐준 거라고, 다음번에는 제대로 붙어보자고 허풍을 떨었어야지.”

“잠깐….”

“목검 말고 진검으로 덤비라고 큰소리쳤어야지.”

“…….”

“상대가 누구든 망설이지 말고 달려들었어야지.”

청연의 코앞까지 다가온 여운이 털썩 무릎을 꿇고 앉았다. 고개를 푹 숙인 그는 떨리는 손으로 청연의 피 흘리는 손을 가져가 감싸 쥐었다.

“피가 흘러도 웃으면서 나를 놀렸어야지, 세화야….”

다 알게 되었구나. 내가 세화가 아니란 걸.

이미 예견된 일이었고 기다리던 바였음에도, 청연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네가 내 곁에서 더 불행해질까 봐 두려워서… 그래서 보내 준 건데.”

그의 목소리는 이제 후회로 가득했다. 떠나가는 세화를 잡지 않았던, 그저 무사하기만을 빌며 보내 주었던 그날에 대한 후회.

“그런데 그렇게 멀리 떠나버리면 어떡해.”

여운이 낮게 중얼거리며 청연의 손바닥에 얼굴을 묻자 흰 뺨 위에 붉은 피가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런 건 안중에도 없는 듯, 그는 끊어져 가는 동아줄을 손에 쥔 것처럼 간절하게 매달렸다.

“나는 이제 어떻게 살라고….”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