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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객잔 정상 영업합니다 (113)화 (114/145)

113화

“제하야, 나는….”

“다 압니다.”

청연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자 제하가 말을 끊었다. 얼굴은 벌게졌고 눈동자는 흔들렸지만 내비치는 의지만큼은 확고했다.

“제가 객주님께 어린 동생 이상으로 보인 적 없다는 거 다 압니다. 어려서부터 당신만 바라봤는데 저를 보는 눈빛 하나 못 읽겠습니까.”

“…….”

“다 알면서도 객주님 곁에 있었던 건 접니다.”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런 청연을 가만히 바라보던 제하가 살며시 손을 잡아 왔다.

“저를 선택해 주신다면 좋겠지만… 강요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제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객주님의 행복이었고, 마음 없이 오시는 것은 안 오시는 것만 못하다고 여겼습니다.”

“…….”

“다만 저를 이토록 조급하게 만드는 것은….”

망설이던 제하는 깍지 낀 손을 들어 올려 청연의 손등을 뺨에다 가져다 댔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두 눈이 오늘따라 슬퍼 보였다.

“그자 때문에 객주님께서 또 위험한 상황에 처하시거나 다치실까 봐 겁이 납니다. 혹여나 그자를 선택하셨다가 크게 상처 입으신다면 저는 정말 견디지 못할 겁니다.”

“제하야.”

“이런 생각들이 자꾸만 저를 조급하게 만들어 마음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의젓하게 말하면서도 초조함을 꾹 억누르고 있다는 걸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토닥여 달래 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더 힘들게 할까 차마 손이 나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제발 그 사람한테 가지 마세요. 차라리 제 곁에 계세요.”

청연은 사실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자꾸 무호를 선택한다거나, 그에게 갈 거라는 말을 반복하는지.

무호를 바라보는 자신의 눈빛이 그렇게도 특별해 보였던 걸까. 하지만 그런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안타까워하고, 돕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아무리 상대가 마교주라고 해도 그와 어려서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면 말이다.

‘어쩌면 제하의 질투와 불안이 만들어 낸 환상일지도….’

청연이 고민하는 동안, 제하는 자신을 봐달라는 듯 손등에 뺨을 비비며 말했다.

“말씀드렸다시피 마음을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제게 더 노력할 기회를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기회?”

“예. 저는 객주님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많습니다. 오랜 시간 객주님과 친분이 있었으나 부끄럽게도 많은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말해 주세요. 객주님의 과거부터 현재까지 전부 다요.”

“…….”

“알려 주시기만 하면 그에 맞춰 노력하겠습니다. 싫어하시는 행동은 절대 안 할 거고, 객주님께 맞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 사람보다 더 잘할 자신 있습니다.”

청연은 골치가 아팠다. 제하가 가진 마음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는 잘 알겠다. 자신을 이렇게까지 중요하게 여긴다니 그 고마움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왜 또 여기서 무호랑 비교를 하냐는 말이다.

“그 사람 때문에 다치지 않도록 제가 지키겠습니다. 객주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도록….”

“제하야, 그만.”

청연의 말에 제하는 하던 말을 멈추고 조용해졌다. 긴장과 두려움이 그의 얼굴에 스쳤다.

‘어디서부터 얘기를 꺼내야 하나….’

고민하던 청연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음… 일단… 그 마음은 항상 고맙게 생각해. 그런데 정말 그 애 때문에 다칠까 하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그럴 일 없을 거야. 지난번에도 별일 없었거든.”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 애 손에 부러진 어깨를 치료받은 지 몇 시진 안 된 시점인 데다 신강에 계속 남아 있었으면 또 어딜 다쳤을지 몰랐다.

“그리고 네가 원한다면 과거든 뭐든 다 알려 줄 수 있어. 너도 나한테 정말 특별한 존재니까. 그런데… 음….”

상처 주는 말은 정말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래도 희망 고문보다는 이게 낫겠지.

“그걸 기회라고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아. 나는 네 노력에 보답할 자신이 없거든.”

“객주님, 그래도….”

“얼마나 노력하든 마찬가지일 거야.”

애초에 내가 뭐라고 너한테 기회 같은 걸 주겠어, 청연은 덧붙이며 제하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니까 나한테 맞추려고 애쓰지 마. 있는 그대로 널 좋아해 줄 사람도 분명히 있을, 아니, 많을 테니까….”

“그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제하의 침울한 목소리에 청연은 거절을 위해 이어 가던 상투적인 위로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말들이 위로가 되지 않을 거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정말 그자를 선택하시겠다면 저는 객주님께서 위험해지는 걸 가만히 지켜봐야만 하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냔 말입니다.”

“아니, 왜 자꾸 무호 이야기를 꺼내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그 애랑 하나도 상관없는 거야.”

청연은 답답해졌다. 그러나 제하는 여전히 청연이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있어 거절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혹시라도 그자 때문에 다치신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이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기다릴 것입니다. 객주님께서 절 봐주실 때까지요. 막무가내라고 하셔도 소용없습니다.”

“그러기엔 네 시간이 너무 아깝잖아.”

“아깝지 않습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대꾸하는 그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것 같기도 했다.

“제 마음대로 좋아하기 시작했으니 끝내는 것도 제 마음입니다. 제 시간을 어떻게 쓰든 객주님께선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어떻게 걱정을 안 해….”

“객주님께선 객주님 몸 걱정이나 하세요.”

제하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청연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눈물을 닦아 주어야 하나 고민했지만 그럴 상황이 아닌 것 같았다. 그저 그의 곁에서 침묵을 지키며 가만히 앉아 있을 수밖에.

이제는 들판 가득 피어난 꽃들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하는 복잡한 생각들만이 머릿속을 채웠다.

***

그날 밤, 청연은 늦은 시간까지 서고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제하는 고백을 거절당한 이후 혼자 방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고, 소명은 잠자리에 들 시간이라며 자리를 떴다. 의지할 거라곤 주변을 밝히는 작은 등불 하나가 전부였다.

‘제하는 어쩌나….’

상처받았을 아이를 생각하니 제대로 집중이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무엇이든 읽어야 했다. 넋 놓고 있거나 자러 갈 수는 없었다.

‘이 중에 한 가지 공통점이….’

무호가 말한 사술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걸 찾지는 못했지만 비슷한 것을 몇 가지 찾아 정리해 본 결과, 한 가지 겹치는 사항이 있었다. 지난번 그 노인이 말했듯이, 피시전자의 생명력을 토대로 자라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주술을 억누르기 위해서는 생명력을 최소치로 낮춰 그것이 몸속에서 날뛰지 못하게끔 만들어야 하고, 완벽한 해주를 위해서는 숨이 완전히 끊어져 생명의 빛이 사라져야 한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그냥 죽으라는 거잖아.’

청연은 머리를 헝클였다. 목숨을 잃어야 한다니, 그렇다면 주술을 끊어낸들 무슨 의미가 있나.

어차피 빙의할 거 차라리 좀 더 이른 시기에 빙의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린 무호 주변의 어른으로 빙의해 그 애가 잡혀가기 전에 지켜 줄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냐는 말이다.

아니, 꼭 어른까지 안 가도 됐을 텐데. 무호 어렸을 때 어머니 약재를 챙겨 주던 약방 아들도 있었다며. 그 몸에 빙의해 미래를 바꿨다면 지금쯤 중원은 평화로웠을까.

‘마음이 답답하니까 별생각을 다 한다.’

무호가 아니었어도 또 다른 사람이 전쟁을 일으켰겠지. 쓸데없는 생각 할 시간에 책이나 한 권 더 읽자. 청연은 눈을 벅벅 비비며 다음 책을 펼쳤다.

그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청연은 고개를 치켜들고 책장 너머를 바라보았다.

“객주니임… 객주님 어디 계세요….”

제하?

혀가 꼬인 듯한 발음과 코를 찌르는 술 냄새에 청연은 아연해졌다. 그러기 무섭게 책들 사이에서 비틀거리며 걸어 나온 제하가 청연의 앞에 주저앉았다.

“한참 찾았잖아요….”

그는 울상을 한 채 중얼거리며 청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러면서 얼굴을 가슴팍에 묻다 못해 몸을 뚫어버릴 기세로 깊게 파고들었다. 청연은 당혹스러워하면서도 그의 등을 살며시 토닥였다.

“술 마셨어?”

밤새도록 마셔도 멀쩡하던 애가 대체 얼마나 마셨길래 이렇게 된 거야?

“속상… 속상해서… 참을 수가 없어….”

“야, 제하야. 알았으니까 잠시만.”

잠시만 떨어져 봐, 말을 끝내자마자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커다란 몸에서 전해져오는 압박감에 청연은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 사람 싫어요…. 마교 진짜 싫어….”

“으응, 그래. 싫었어? 에구, 힘들었겠다. 그런데 이것 좀 놔주라. 나 진짜 숨 막혀.”

“객주님은 왜… 내 맘 몰라….”

취하면 이렇게까지 애기가 된다고. 설마 술에 취해보는 것도 처음인가.

청연은 한숨을 내쉬며 계속해서 그를 토닥였다. 열심히 어르고 달래자 제하는 이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렸다. 서러운 중얼거림과 훌쩍이는 소리가 끊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덩치도 큰 애가 이럴 때마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심지어 그게 전부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고 미안했다. 청연은 간신히 호흡을 이어 가며 복슬복슬한 곱슬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해. 내가 미안해, 제하야. 울지 마.”

“좋아해요….”

“…….”

“진짜 많이 좋아해요….”

내일 아침에 다 기억나면 어쩌려고 이러나. 차라리 기억 못 하는 편이 낫겠다.

청연은 제하가 기억하지 못한다면 끝까지 모르는 척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소란스러운 상황이 정리된 건 서고의 책들이 눈물에 잠기고도 남겠다 싶은 때쯤이었다. 엉엉 우는 제하의 뒤에서 나타난 소명이 그렇게도 반가울 수 없었다.

그는 기척 하나 없이 다가와 가벼운 손놀림으로 제하의 혈 자리 몇 군데를 짚었다. 그저 스치는 손짓이었음에도 제하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잠에 빠져들었다. 청연은 그제야 갈비뼈를 부술 듯한 압박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또 폐를 끼쳤습니다.”

소명은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드러누운 제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닙니다. 이건 제 잘못입니다….”

“이놈 때문에 술을 죄다 숨겨 놔야겠습니다. 그럼 저흰 이만.”

그는 제하를 공주님 안듯이 안아 올리더니 청연을 향해 고개를 꾸벅하고는 발걸음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고약한 술 냄새와 옷을 축축하게 적신 눈물자국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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