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청연은 뻐근한 목뒤를 주물렀다. 오랜 시간 서고에 틀어박혀 책만 읽었더니 온몸이 찌뿌둥하고 눈이 침침했다. 그의 옆으로는 이미 읽은 책들과 앞으로 읽을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아직 이렇다 할 수확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제하가 없는 틈을 타서 소명에게 어깨를 치료받을 수 있었다는 거였다. 부러진 뼈까지 그 자리에서 붙여버리는 솜씨에 감탄한 청연은 말끔하게 나은 어깨를 빙빙 돌려 보았다.
“아직은 접합부가 약할 수 있으니 그리 하시면 안 됩니다.”
조용히 책을 내려다보던 소명이 눈길 한번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머쓱해진 청연은 다시 자세를 바로 하며 읽던 책이나 마저 읽기로 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의문이 있었다.
“친우분께선 어딜 가셨습니까?”
“모릅니다.”
“모르신다고요?”
“워낙 자유로운 영혼인지라 뜬금없이 나타났다가 또 사라지길 반복합니다.”
“아….”
그가 함께 있으면 해주법을 찾는 데 도움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방법 같은 건 없다고 딱 잘라 말하던 걸 생각하면 차라리 없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괜히 마음만 불안해지니까 말이다.
“그분께선 어쩌다 사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셨는지….”
“어려서 혈교의 잔당들에게 가족을 모두 잃었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그러면 관심을 두고 공부하기보다는 혐오해야 맞는 거 아닌가. 청연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소명이 말했다.
“애도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른 법이니까요. 잠시 오셔서 이것 좀 보시겠습니까?”
청연은 그에게로 다가가 책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어느 사술에 대한 정보가 나열되어 있었다. 시전하고 이십 년이 지나면 발동한다는 점이 무호가 설명했던 것과 비슷했다.
그러나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이 사술에 걸리면 무조건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게 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차분하고 무기력해진 채, 시전자의 명령을 고분고분하게 따르는 꼭두각시가 될 뿐이었다.
상대의 무위가 높아 섭혼술 같은 것이 통하지 않을 때, 그 사람을 아주 느리지만 확실하게 무너뜨리는 방법이었다.
“어쩌면 여러 가지 사술을 혼합하여 사용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인의 친우분께서도 정확히 알지 못하시는 걸 보면요.”
청연이 말하자 소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도 그런 추측을 하고 있었습니다.”
“진료를 더 해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요.”
맥을 짚는 소명의 손길을 뿌리치던 무호를 떠올리자 청연의 기분은 다시 가라앉았다.
도움을 거절하는 이유는 뭘까. 어차피 방법이 없다고 생각해서일까, 아니면 자기 나름대로 무언가 방법을 찾았는데 숨기는 걸까.
청연이 고민하고 있을 때, 마침 서고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음식 냄새가 풍겨 와 코를 자극했다.
“스승님, 객주님! 식사하세요!”
저녁 식사 준비를 마친 제하의 외침이었다. 청연이 소명과 함께 서고 밖으로 나가자 소매를 둥둥 걷어붙인 채 해맑게 웃음 짓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청연은 그를 따라 방으로 향했다. 먹음직스러운 요리가 한 상 가득 차려져 향뿐만 아니라 눈으로 보기에도 좋았다.
“이걸 네가 다 한 거야?”
“예. 손님이 오셨으니까요.”
“평소에는?”
“평소에도 제가 합니다.”
제하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게 제자 된 도리이기도 하고, 또 스승님께서 요리를 하시면 매번 주방을 태워 버리….”
“시끄럽다. 그만 떠들고 앉아라.”
소명이 말을 끊었지만, 제하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헤헤 웃으며 착석했다. 청연도 그의 옆에 앉아 젓가락을 들었다.
“어떠세요?”
음식을 집어 입에 넣자마자 제하가 득달같이 물었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게 꼭 칭찬을 기다리는 어린아이 같았다.
“맛있어.”
“이것도, 그리고 이것도 드셔보세요!”
스승님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자신만 챙기는 그의 행동에 청연은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소명은 익숙한 듯 조용히 식사를 이어 가고 있었지만 말이다. 결국 제하의 입 속에 강제로 고기 몇 점을 밀어 넣고 나서야 그는 입을 다물고 음식을 씹었다.
식사를 마친 뒤, 청연은 곧장 서고로 향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그릇을 정리하던 제하가 급하게 달려와 청연의 손목을 붙잡았다.
“왜? 뭐 할 말 있어?”
“그게… 객주님께서 꼭 봐주셨으면 하는 장소가 있어요.”
“내가 꼭 봤으면 하는 장소? 그게 어딘데?”
청연이 묻자 제하는 슬쩍 시선을 피하며 얼굴을 붉혔다. 그러면서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거듭 부탁하기에 청연은 그가 원하는 대로 바깥에서 기다렸다.
잠시 후 식탁 정리를 마치고 나온 제하는 청연을 숲길로 이끌었다. 해가 완전히 저물어 어둑어둑해진 산속에 달빛이 내리쬐어 길을 밝혀 주고 있었다.
“오래 걸릴까? 나 하던 일이 있어서 금방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사실 청연은 식사할 때부터 마음이 조급했다. 여유롭게 앉아 밥이나 먹고 있어도 괜찮은 걸까 하는 의문이 끊이지 않았다. 그 말을 들은 제하는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답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 그는 청연의 한 마디에 바로 얼굴을 굳히고 조용해졌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눈치였다.
내가 애한테 너무 야박하게 굴었나, 걱정이 된 청연은 조급함을 가라앉히기로 했다. 어차피 밤새 서책을 찾아볼 것이니 지금은 잠시 쉬자고 마음먹었다.
“객주님.”
“응?”
다시 입을 연 제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자가 가진 사술을 풀어낼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정말 전쟁이 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 그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지.”
청연은 담담하게 말하면서도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정말로 전쟁이 난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무호는… 제하는 또 어떻게 될까.
“사실 제 눈에는… 사술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전쟁을 일으킬 사람으로 보입니다.”
제하의 말에 청연은 고개를 저었다.
“나쁜 사람 아니야.”
“…….”
객주님께서 그런 거라면 그런 거겠지요, 하며 작게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청연은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제하가 말은 이렇게 해도 정말 착한 아이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마교주의 상태 이상에 대해 소문이 퍼졌을 것이다. 무호를 진심으로 싫어하면서도 전부 자신을 위해 참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숲길을 따라 걷던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드넓은 들판이었다. 청연은 감탄하며 들판을 바라보았다. 온갖 색의 꽃이 가득 피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이쪽입니다.”
제하가 청연을 이끌고 간 자리에는 평상 하나가 놓여 있었다. 누군가 이 광대한 자연을 감상하려고 일부러 가져다 둔 것 같았다.
청연은 평상 위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오랜만에 마음을 놓고 쉬는 것 같았다. 신강에 찾아갔을 때부터 바짝 긴장한 상태였는데, 드디어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
“객주님께서 피곤해 보이시기에 모시고 왔습니다. 저도 마음이 힘들 땐 여기 와서 쉬거든요.”
“고마워.”
끝도 없이 펼쳐진 들판을 바라보며 숨을 크게 들이쉬니 신선한 밤공기가 폐 속 가득 들어찼다. 그러는 동안 제하는 청연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객주님.”
“응?”
“그자가 그렇게 걱정되십니까?”
또 무호 얘기네.
“그래 보여?”
청연이 묻자 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 숨길 수 없는 불안함이 묻어 있었다.
“걱정돼.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잘 아는 사람한테 그런 일 생기면 당연히 걱정되지. 너였어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아뇨….”
제하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언가… 다른 것 같았습니다.”
“다른 것 같다니? 뭐가?”
그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평상 위에 놓인 손끝이 파르르 떨린 것도 같았다. 그가 다시 입을 연 건 시간이 조금 지난 뒤였다.
“아닙니다. 객주님 편히 쉬시라고 모시고 온 건데 제가 괜한 이야기를 꺼낸 것 같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제하는 표정을 갈무리하며 급히 수습하려 했다. 청연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다 해도 돼.”
“…….”
“응? 해도 괜찮아. 뭐가 달랐는데?”
“객주님….”
신경 쓰지 말란다고 정말 신경을 끌 수는 없는 일이었다. 청연은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수습에 실패한 제하는 결국 고개를 툭 떨구며 말했다.
“저를 걱정하실 때의 눈빛과 달랐습니다.”
“그게 지금 무슨 말….”
“더 특별해 보였습니다.”
청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얘가 지금 질투가 나서 이러는 건가, 고민하며 제하의 갈색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야 상황이 특수하잖아. 안 그래?”
잘못하면 전쟁이 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신경 쓰였어?”
“…객주님.”
떨리는 제하의 목소리를 들은 청연은 말문이 막혔다. 마음이 많이 상한 것 같은데 어떻게 풀어 주어야 할지, 애초에 풀어 주는 게 맞는 일인지 고민되었다. 오히려 희망 고문을 하게 되는 건 아닐까.
“드리고 싶은 말씀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응, 해봐.”
“이런 말씀드리면 어떤 답이 돌아올지 잘 압니다. 빼앗길까 두려운 마음에 너무 충동적인 결정을 내린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금이 아니면 말씀 못 드릴 것 같아서….”
잠깐, 설마 고백하려는 건가.
청연은 복잡한 심경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막막했다.
“준비가 되면 제대로 말씀드리겠다고 했으니 그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
한참이 지나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린 제하는 청연과 눈을 맞췄다. 그러고는 이전보다 더욱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해요, 객주님.”
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투명하고 맑은 눈동자에 청연의 모습이 가득 담겼다.
“아주 오랫동안 좋아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