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다음 날이 되면 멀쩡해질 거란 기대와 달리 무호는 여전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지난번엔 그래도 금방 돌아왔던 것 같은데, 이 상태가 오래 지속되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거긴 잡지 마. 진짜 아프단 말이야.”
청연은 자신의 왼쪽 손목을 강하게 그러쥔 무호에게 사정하듯이 말했다. 안 그래도 어깨가 박살 나서 움직일 수 없는데 자꾸만 팔을 잡고, 결박하고, 또 끌어당기기까지 하니 죽을 맛이었다.
‘이래서 뼈가 붙을 리가 있나.’
방 밖으로 나가는 건 고사하고 그에게서 한 걸음도 떨어질 수 없었다. 그는 청연이 아주 조금이라도 멀어지려고 하면 화를 내며 옆에 있는 물건을 부쉈다. 이러다간 어깨를 제외한 다른 신체 부위마저 부러질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청연은 그의 곁에 딱 붙어 몸을 사려야 했다.
어제 의원에게 잠깐 보내 준 건 기적이었을까. 아니면 그때 나갔다 온 일로 더 불안해져서 이러는 걸까.
“그만 쳐다보고 이거나 먹어.”
청연은 무호의 무릎 위에 앉은 채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그의 입 속에 넣어주며 말했다. 결코 이러고 싶었던 게 아니다. 부서지지 않은 의자가 아직 몇 개 남아 있었고, 자신의 하반신도 멀쩡했다. 그러나 그는 청연이 의자에 앉는 걸 끝내 허락하지 않을 모양이었다.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은 팔뚝 때문에 소화가 안 되고 밥을 먹다가도 체할 것 같았다. 그리하여 너나 먹어라 하는 심정으로 어미 새가 되기를 자처했다. 무호는 음식을 우물우물 씹어 삼키는 동안에도 청연의 얼굴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식사 가져다주시던 분한테는 왜 그랬어. 아무리 시비라도 그렇게 막 대하면 안 되는 거예요, 교주님.”
처소에 누군가 찾아오기라도 하면 당장 죽여 버릴 기세로 살기를 흘리는 그 때문에 청연은 여러 번 진땀을 뺐다. 그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사용했던 기상천외한 방법들 같은 건 나열하고 싶지 않았다.
“알겠어? 나는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까 너도 한 가지 약속해. 아무나 때리고 죽이지 않겠다고.”
이게 맞나. 마교주한테 사람 죽이지 말라고 당부하는 게 맞는 일인가.
청연은 제 입으로 뱉으면서도 의문스러웠지만 그래도 그가 제정신이 아닌 동안 그런 짓을 저지르도록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그 말을 들은 무호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청연의 어깨 위에 턱을 걸쳐 놓았다. 그러면서 젓가락질조차 하지 못하도록 손을 깍지 끼워 잡았다. 손바닥이 뜨거웠다.
“너 이러는 것도 나중엔 다 잊어버릴 거지? 기억 안 난다고 할 거지?”
이번에는 호위를 전부 물린 탓에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려 줄 사람도 없을 텐데.
“그러니까 후회할 일 더 만들지 말라는 말이야.”
여태 청연의 얼굴만 죽어라 바라보던 그는 이제 잔소리 같은 건 듣기 싫다는 듯 외면하고 있었다. 청연은 그의 눈을 가까이 들여다보며 물었다.
“교주님, 듣고 계세요?”
“…….”
“제가 잔소리할 때만 그렇게 귀를 닫으시면 어떡… 읍.”
손으로 입을 틀어막기까지. 청연은 눈알만 데굴 굴렸다.
무호는 더 이상 식사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는지 자리에서 일어섰다. 물론 무릎에 앉혀놓았던 청연을 들어 올린 채였다. 마음대로 걷지도 못하게 할 셈인가 싶었다.
“누가 보면 나 들어 올리려고 무공 익힌 줄 알겠어.”
“맞아.”
“맞긴 뭐가 맞아. 이러다 걷는 법 까먹겠다.”
“좋아.”
“…….”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왔지만 그래도 대답을 하는 걸 보면 천천히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청연은 실낱같은 희망을 품은 채 가만히 안겨 있었다. 그가 또 침상으로 향하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무호는 청연을 탁자 위에 내려놓은 뒤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 시선이 너무 열렬해서 차마 눈을 맞추기도 어려웠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눈을 내리깐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마침 처소 밖을 지나가는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무호의 얼굴이 문을 향해 돌아가며 청연의 허리를 감싼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자신의 것을 다른 이에게 빼앗기기라도 할까 경계하는 모양새였다. 그에게서 조금씩 흘러나오는 살기에 숨이 막혔다.
“나 봐.”
청연은 한 손으로 무호의 뺨을 감싸 다시 자신을 바라보도록 돌려놓으며 말했다.
“괜찮으니까 나 좀 봐. 저 사람은 그냥 지나가게 두고.”
“…….”
“뭐가 그렇게 불안해.”
어차피 여기에 널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데.
“안 간다고 했잖아. 그리고 너희 교인들은 나한테 관심 하나도 없어.”
부드러운 말투로 타일렀음에도 불구하고 날이 선 눈빛은 여전했다. 그 모습이 마치 누군가에게 사탕을 빼앗길까 전전긍긍하는 어린아이처럼 보여, 청연의 마음 한구석에는 왠지 모를 안쓰러움이 차올랐다.
“그동안 이렇게 불안한 거 어떻게 숨겼어?”
숨긴 게 아닌가. 그냥 지금 정신 상태가 불안정해서 그런 것뿐일까.
뭐가 어떻게 됐든 그를 돕고 싶었다. 자신이 받은 만큼 돌려주고 싶었다. 조심히 손을 뻗어 머리를 살살 쓰다듬자 그의 눈빛이 한층 가라앉았다.
“나중에 정신 돌아오면 숨기지 말고 말해 줘.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는 너처럼 강하지도 않고 정보력도 없어서 말 안 해 주면 아무것도 모르잖아.”
“…….”
“네가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만큼, 네 얘기도 해 달라는 말이야.”
쓰다듬던 손을 살며시 떼어 내려 하자 무호가 손목을 잡았다. 그는 손바닥 위에 쪽 입을 맞추고는 더 만져달라는 듯 자신의 뺨을 비볐다. 이런 모습은 제하와 별반 다르지 않구나 하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꼭 내가 아는 의원님 만나보기로 약속해. 또 필요 없다고 하지 말고. 알겠어?”
청연은 그의 뺨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너도 이름 들으면 알 만큼 유명하신 분이야. 아, 내 뒷조사 다 했으니까 이미 알겠구나. 제하가 스승으로 모시는 분이거든. 그분이 와서 보시면 아마….”
말을 이어 가던 청연은 순식간에 뒤바뀐 무호의 표정에 입을 다물었다. 제하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다시 새빨개진 눈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이… 제하를 불러 오겠다는 게 아니잖아. 이름 언급도 안 되는 거야?”
“안 돼.”
“알았어…. 안 할게…. 아니, 안 하겠다니까? 잠깐만!”
다급하게 외쳐보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릇들을 대강 밀어서 치워 버린 무호의 손이 청연의 어깨를 밀쳤다. 아픈 어깨 탓에 저항도 하지 못하고 탁자 위로 쓰러진 청연의 눈에는 눈물까지 찔끔 고였다.
“하… 아파…. 제발, 제발 어깨 좀 건드리지 마. 부러졌다고. 네가 부숴서 아파 죽겠다고….”
“이번엔 발목.”
“…뭐라고?”
놀란 청연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무호를 바라보았다. 그는 탁자 위에 드러누운 자신의 두 다리 사이에 서 있었다. 그의 손이 양쪽 발목을 잡아 왔다.
‘미쳤어? 진짜 부러뜨리려고?’
청연은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나려 해보았지만 발목을 단단히 잡은 손이 그를 다시 끌어당겼다. 커다란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힘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심이 느껴졌다.
“이건, 이건 너무한 거 아니야? 어떻게 이름 한번 불렀다고 발목을 부러뜨려!”
청연은 황급히 상체를 뒤집어 엉금엉금 기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또 무지막지한 힘에 억지로 끌려가고 말았다.
“내가 후회할 일 만들지 말라고 했잖아!”
발목이 부러진 건 숨기지도 못할 텐데,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감당하려고.
“아파! 아프다고! 조금 전까지 안고 입 맞추던 사람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버둥거리는 두 발목이 점점 비틀리고 있었다. 내가 잘못했다, 살려 달라, 차라리 접문을 해라 온갖 말을 내뱉으며 애원해보아도 소용없었다.
“아무 데도 못 가.”
으르렁거리는 낮은 목소리와 함께 발목에 압력이 가해졌다. 정말 발목마저 부러지겠구나 직감한 청연은 어떻게든 버텨보자 다짐하며 이를 꽉 깨물었다.
‘그래, 발목 부러진다고 죽기야 하겠냐. 대신 이건 나중에 꼭 사과받아야겠다. 정신 돌아오기만 해봐라.’
강한 의지와 다르게 몸은 통증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청연의 눈에는 눈물이 촉촉하게 차오르고 있었다. 그래도 버텨야 한다, 마음을 굳게 다지며 눈을 질끈 감고는 말했다.
“빨리 끝내.”
어차피 부러뜨릴 거면 한 번에 또각 하라고. 질질 끌면 더 아프니까.
청연은 눈을 감은 채 크게 심호흡했다. 어깨도 버텼는데 발목이라고 못 버틸까. 아, 이번에는 양쪽이지. 당분간 기어 다니지도 못하겠다. 모든 걸 내려놓은 그는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기다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발목에서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오히려 발목을 잡은 손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청연은 의아한 마음에 감았던 눈을 슬그머니 떠보았다.
“…너….”
무호가 사색이 된 얼굴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이내 청연의 발목으로 옮겨졌다. 이미 퉁퉁 부어올라 보기만 해도 아픈 발목이 붉은빛을 띠었다.
반면에 검은색으로 되돌아온 그의 눈동자에는 엉망이 된 방의 광경이 담겼다. 여기저기 부서져 널브러진 가구들, 그리고 탁자 위에 무력하게 쓰러져 있는 청연.
때마침 청연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져 내렸다. 당황하여 눈을 빠르게 깜빡이자 눈물이 줄줄 새어 나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본 무호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어? 울려던 건 아니었는데.’
청연은 얼굴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눈만 깜빡거렸다. 그냥 눈을 감고 있었더니 눈물이 더 많이 고인 것뿐이었는데.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