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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객잔 정상 영업합니다 (105)화 (106/145)

105화

그는 하려던 말을 하지 못하고 청연의 눈치만 살폈다. 제 앞에서 하기는 어려운 말인 듯했다. 애써 정신을 차린 청연은 무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괜찮으니까 가봐.”

“…….”

“어서. 나는 먹고 있을게.”

무호는 영 자리를 비우고 싶지 않은 기색이었지만,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그가 떠난 뒤 청연은 홀로 남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머릿속이 멍해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한참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흘려보낸 끝에, 그는 결국 다시 젓가락을 들고 조용히 식사를 이어 갔다. 딱히 배가 고프거나 입맛이 도는 건 아니었지만 더 이상 걱정을 끼칠 수 없었다.

대충 식사를 끝내고 나니 시비들이 그릇을 치워갔다. 할 일이 없어진 청연은 방 안을 서성거리며 돌아다녔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로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걸 여운에게 솔직히 말해 줘야 할까. 그에게도 진실을 알 권리가 있지만, 이걸 말했다간 당장 곤륜을 떠나려고 할 텐데. 곤륜에서 그를 곱게 보내 줄 리 없었다. 지금까지 그가 쌓아 온 무공을 폐하려고 할 것이다.

여운의 성격을 고려하면 그는 다른 꼼수를 쓰지 않을 터였다. 당당히 떠나겠다고 의사를 밝힌 뒤, 그에 맞는 처분을 기다릴 것이다. 결국엔 단전이 파괴되고 말겠지. 절대 안 되는 일이었다.

“세화야….”

너라면 어떻게 할래.

창밖을 바라보며 물었다. 답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세화라면 진실을 알고도 침묵했을 것이다. 여운이 모든 걸 잃고 문파에서 나오느니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채 살아가길 바라면서.

청연은 한숨을 내쉬며 창가에서 멀어졌다. 정처 없이 방 안을 돌아다니다 보니 협탁 위에 놓인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종이 몇 장이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종이에 쓰인 글자를 들여다보았다. 자신의 것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닮은 무호의 서체였다. 마침 주의를 돌릴 것이 필요했던 그는 종이를 집어 들고서 침상에 풀썩 드러누워 읽기 시작했다.

무호가 교주가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새로 써 내려간 조직도인 듯했다. 기존의 조직을 토대로 어떤 것을 빼고 어떤 것을 더할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얘 진짜 다 컸네….’

자기 이름 석 자도 못 쓰던 애가 이제는 이런 것도 할 줄 알고.

손가락으로 글자를 가만히 더듬어보던 청연은 피로한 눈을 문질렀다. 사천에서 먼 길을 온 데다 정신력까지 크게 소모했더니 몸이 휴식을 요구하고 있었다.

‘무호 올 때까지 잠깐 눈 좀 붙일까.’

혼란스러운 마음도 잠재울 겸.

이 침상이 그리 낯설지 않은 청연은 자연스럽게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눈을 감았다.

***

무호의 싸늘한 시선이 눈앞의 남자를 훑어보았다. 그와 한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불쾌해 전각을 통째로 날려버리고 싶었다.

“용건만 말하고 꺼져.”

무호는 혈 자리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저놈은 꼭 청연과 함께 있을 때 찾아와 자신의 심기를 건드렸다. 청연과 대화를 나누느라 산을 오르는 그의 기척 같은 건 개처럼 무시하고 있었는데.

“…왜 아직도 멀쩡하지?”

그의 앞에 앉은 남자, 혈마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지난번 무호에게 얻어맞으면서도 징그럽게 웃어 대던 것과 달리, 오늘은 그에게서 초조해하는 기색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멀쩡하지 않으면 어때야 하는데?”

무호가 삐딱한 자세로 묻자 그는 찻잔을 꽉 움켜쥐었다. 붉은 눈동자 속에 숨길 수 없는 불안이 비쳐 보였다.

“지금쯤이면 분명….”

“계산이 틀렸나 보지.”

“뭐?”

“이십 년이면 될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백 년이라든가.”

무호의 머릿속에는 저 벌레 같은 놈을 빨리 쫓아내고 청연에게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살이 많이 빠졌던데 밥은 다 먹었을까 하는 걱정에 벌레가 윙윙거리는 소리 같은 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을 노려보는 눈빛이 느껴졌으나 무시했다. 저 눈이 다른 놈들에게는 사술을 걸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지만, 제게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내가 이십 년 동안 겨우 네놈 하나만 믿고 있었을 것 같아?”

“…….”

“내게도 다른 대안이 있어.”

네가 하지 않으면 내가 직접 할 것이다, 경고하는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무호는 자신의 찻잔만 내려다보았다.

관심 없었다. 혈교가 중원으로 쳐들어가든 말든. 오히려 그가 먼저 나서서 곤륜을 무너뜨린다면 그 늙은이들을 따로 잡아 족치지 않아도 되니 수고를 크게 덜 것이다. 정파 놈들이야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니었다.

혈마는 제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무호를 보며 분을 삭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를 떴다. 무호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손을 들어 자신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열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사실은 청연과 식사할 때부터 체온이 조금씩 높아지기 시작했으나 티를 낼 수 없었다.

무호는 문을 열고 들어온 흑의인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칼.”

그러자 그는 허둥지둥 품속에서 단검을 하나 꺼내 건네주었다. 단검을 응시하던 무호는 이내 그것을 거칠게 집어던졌다.

“고작 이딴 걸 쓰란 말이냐.”

“다, 다른 걸로 가져오겠습니다. 아니면 이 검이라도….”

“쓸모없는 놈.”

부하라고 있는 것들이 하등 쓸모없는 놈들뿐이니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무호는 자리에서 일어서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교주님!”

급하게 따라온 흑의인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잠시 이곳에 머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차라도 한잔 더 드시면서….”

지금 제가 누구의 앞을 막은 건지 알고는 있나.

무호는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손을 휘둘렀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전각이 크게 진동했다. 문을 뚫고 튕겨 나간 남자는 이미 목숨을 잃은 뒤였다.

다 저놈 탓이다. 겁도 없이 앞을 막아선 저놈 때문에 이렇게 화가 치밀고 열이 끓는 것이다.

무호는 시신의 머리통을 꾹 밟았다. 머리가 터지면서 뇌수가 줄줄 흘러나왔다. 더러워진 신발을 시신의 옷에 대충 문질러 닦은 후, 그는 발걸음을 돌려 처소로 향했다. 자신이 찾는 칼이 그곳에 있었다.

더 이상 누구도 그를 가로막지 못했다. 두려움 가득 찬 시선만이 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처소에 도착한 무호는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어느새 붉게 변한 그의 눈동자가 방 한쪽에 놓인 대도를 발견했다. 그곳으로 걸어가려던 무호의 걸음을 멈추게 한 건 침상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왔어?”

무호는 고개를 돌려 침상을 바라보았다. 부스스 잠에서 깨어난 청연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피곤해서 잠깐 눈 좀 붙였어. 아, 그 전에 밥도 다 먹었고.”

자다 일어나 몽롱한 눈빛과 스르르 흘러내리는 머리칼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거기서 뭐 해? 왜 그러고 서 있어?”

잠긴 목소리마저 달았다. 무호는 그를 본 순간 이미 칼 같은 건 까맣게 잊은 뒤였다.

“맞다, 돌아다니다가 네가 글씨 써놓은 걸 좀 봤는데… 너 눈이 왜 그래?”

“…….”

칼 따위가 필요한 게 아니었다. 필요한 건 저 사람이었다.

무호는 순식간에 침상으로 다가가 청연을 내려다보았다. 흠칫 놀라 몸을 뒤로 물리는 청연의 행동이 그를 더 자극하고 있었다.

“너 설마 또….”

꼼짝도 하지 못하게 잡아 누르고 싶었다. 한 걸음도 멀어지지 못하도록.

“무호야, 내 눈 좀 봐. 응? 똑바로 봐 봐.”

손목을 묶고 발목을 부러뜨려 떠나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아무도 볼 수 없는 방 안에 가둬 두고 혼자서 보고 싶었다.

방해가 되는 다른 놈들은 머리통을 터뜨려 죽이고 그를 독차지할 것이다. 나만이 가질 수 있는 나의 것이다.

“정신 좀 차려… 아!”

무호는 곧장 침상 위로 올라가 청연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도로 눕혀진 그의 얼굴에 당혹감이 차올랐다. 버둥거리는 몸 위로 겹겹이 입은 옷가지가 눈에 거슬렸다. 죄다 찢어발기고 싶을 만큼.

옷을 찢고 그와 맨 살갗을 맞대고 싶었다. 고통에 신음하다 울음을 터뜨릴 때까지. 몸속에 차오른 뜨거운 열기를 그렇게라도 풀어내고 싶었다.

“내가 도와줄게! 어떻게든 도와줄 테니까 이거 놔 봐.”

청연이 다급하게 외쳤다. 무호는 그를 짓누른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못 가.”

아무 데도 못 가. 당신은 내 것이니 죽을 때까지 이곳에 가둬 둘 것이다.

“아, 아파! 아파.”

청연이 발버둥을 치며 애원할수록 무호는 그의 어깨를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얼굴이 보기 좋았다. 거칠어지는 숨소리가 듣기 좋았다.

어깨뼈가 우두둑 비틀리자 이를 악물고 참던 청연은 결국 신음을 내뱉었다. 아파하며 헐떡이는 소리가 무호의 귀에는 마치 감미로운 노래처럼 들렸다. 평생 이 소리만 들으며 살고 싶었다.

“아무 데도 못 가.”

무호는 반복해서 말하며 청연의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살갗에서는 언제나 좋은 향기가 났다. 온통 물어뜯어 자국을 남기고 싶을 정도로.

“안 갈게….”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 무호의 등을 살며시 쓰다듬고 토닥였다.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손길이었다. 고통에 절여진 신음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이고 있었다.

“안 갈게. 이번에는 약속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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