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8화
민아는 잠에서 깨어나기 무섭게 귀를 틀어막았다. 매일 아침 단잠을 깨우는 음악 소리에 좀처럼 익숙해지지를 않았다.
‘얘 또 시작이네….’
며칠 전부터 아침만 되면 청연이 연주하는 비파의 구슬픈 선율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정신을 반쯤 놓은 듯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연주에 몰두하는 그 얼굴이 애처롭기 짝이 없었다.
벌떡 몸을 일으킨 민아는 머리를 긁적이며 방을 나섰다. 오늘이야말로 참지 않을 것이다. 당분간 이곳에서 지내기로 한 이상, 달콤한 아침잠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었다.
그는 청연의 방 앞에 멈춰 서 문을 쾅쾅 두드렸다.
“야, 나 들어간다?”
한마디 경고를 내뱉은 민아는 문을 벌컥 열었다. 동시에 청연의 손이 멈추며 음악이 뚝 끊겼다.
“일찍 일어났네? 어디 가?”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를 건네는 그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어디 가겠냐? 너 때문이잖아.”
“나? 내가 뭐?”
“아침부터 손님들 다 깨우려고 작정했어? 벌써 며칠째야?”
“아….”
순간 시무룩해지는 청연의 얼굴을 보니 왠지 마음이 약해졌다. 잔소리를 퍼붓기 위해 찾아왔건만. 저런 얼굴을 보고도 그를 다그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와보라고 하고 싶었다.
빠르게 포기한 민아는 고개를 까딱하며 말했다.
“청승 그만 떨고 나와. 나랑 아침이나 먹어.”
청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섬주섬 비파를 내려놓았다. 식사를 하러 아래층으로 향하는 길, 민아는 그에게 물었다.
“비파 같은 건 또 언제 배운 거야?”
“세화가 어렸을 때 기루 누님들한테 배웠지. 넌 몰랐어?”
“나도 다 알지는 못한다니까.”
“이것저것 많이 배웠더라고. 재능은 있는데 성격에 안 맞아서 다 때려치운 게 문제지.”
두 사람은 일 층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탁자에는 소박한 아침상이 차려졌다. 민아는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깨작거리는 청연의 눈치를 살피다가 물었다.
“이따가 나랑 나가서 기분전환이나 하고 올래?”
“어디?”
“음…. 글쎄. 간단하게 산책이라도 할까? 저녁 먹고 들어와도 좋고.”
“…좋지.”
좋다고 말하면서도 그의 표정은 울적하기만 했다.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그 심정은 이해한다만, 계속 방 안에 틀어박혀 슬픈 곡조만 연주하는 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터였다.
그때, 옆 탁자에 앉은 남자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네, 그 얘기 들었나? 곤륜이 곧 봉문1)할 거라는 소문이 있던데?”
“봉문? 어째서?”
왜 하필 이 시점에 곤륜 이야기가 나오냐. 눈치도 없이.
민아는 그들을 찌릿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대화를 이어 갔다.
“자발적인 봉문이라는군. 곤륜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건 다들 아는 사실이잖아. 이렇다 할 인재가 나오지 않은 지도 오래됐고. 그러니 수련에만 몰두해 힘을 키우려는 거겠지.”
“하긴, 이대로 가다간 곤륜이 구파에서 밀려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네.”
민아는 식은땀을 흘리며 청연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는 가만히 눈앞의 접시를 응시하면서도 한쪽 귀를 쫑긋 열어놓은 채였다.
“그래도 유서 깊은 명문 정파였는데,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군.”
“나는 짐작 가는 이유가 하나 있는데….”
“뭔데?”
그러자 남자는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곤륜이 십몇 년 전에 중요한 신물을 잃어버렸다는 거야. 내부에서는 이 일을 아직도 쉬쉬한다는데, 그 시기가 곤륜이 약해지기 시작한 시점과 딱 들어맞는 거지.”
마침 차를 마시던 청연은 사레가 들려 콜록거렸다. 민아는 손수건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며 옆자리 남자들에게 매서운 눈빛을 쏘아 보냈다.
“내 생각에는 그 신물을 잃어버려서 망조가 든 게 아닐까 싶어.”
“이러다 마교가 중원으로 쳐들어오기라도 하면 속수무책으로 뚫리겠는걸.”
마교가 어쩌고, 곤륜이 어쩌고 하면서 이야기를 이어 가던 그들은 이내 흥미가 떨어진 듯 화제를 돌렸다. 더욱 침울해진 청연의 표정 같은 건 그들에게 알 바 아니었다.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곰곰이 생각하던 민아는 제하 이야기를 꺼내 보기로 했다. 청연이 아끼는 아이니까 기분전환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제하는 여기 올 때 주로 뭐 먹어? 걔가 무슨 음식 좋아하는지는 아는데, 또 네가 해 주는 거라면 뭔가 다를까 해서.”
“내가 해 주는 건 다 잘 먹어. 면 요리도 좋아하고 매운 것도 잘 먹고… 아, 맞다.”
청연은 무언가 생각난 듯이 물었다.
“혹시 귀한 영약 같은 거 구할 수 없을까?”
“영약이라니? 네가 먹게?”
“아니. 제하 때문에. 그 애가 가졌어야 할 교룡의 내단을 내가 가지게 됐잖아. 그걸 대체할 무언가가 있으면 찾아 주고 싶어. 너는 뭐 생각나는 거 없어? 네가 나보다 더 잘 알 거 아니야.”
“으음….”
민아는 가물가물해지려는 기억을 열심히 되짚어 보았다. 제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영약은 제하가 가져갔기에 그의 몫이 아닌 걸 떠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 그 도박장에서 구해보는 건 어때?”
민아가 묻자 청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거긴 망한 지 오래야. 그 사람들 목숨까지 걸고 도박하다가 관아에 걸려서 다 잡혀갔어.”
“이런….”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 드디어 무언가를 생각해 낸 민아는 기쁘게 외쳤다.
“아! 공청석유는 어때?”
“공청석유?”
공청석유라면 무협 세계관에 등장하는 영약 중에서도 최상급이었다. 주로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동굴 깊숙한 곳에 위치했는데, 이것을 마시면 죽어 가던 사람도 살아날 수 있었고, 한 번에 수 갑자의 내공을 쌓는 것 또한 가능했다.
“그게 어디서 나왔더라?”
청연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아주 잠깐 스치듯이 언급했으니까.
“어떤 마교도 한 명이 그걸 우연히 발견하고 냅다 마셔버렸는데, 귀한 영약을 교주한테 바치지 않았다는 죄로 갈기갈기 찢겨 죽었지. 영약 먹고 강해지면 뭐 해. 어차피 천마한테는 새 발의 피였는데.”
그저 천마의 탐욕과 잔인함을 강조하기 위한 서술이었을 뿐이다. 청연의 말에 따르면 그게 다 제 머릿속에서 나온 건 아니라는 것 같지만 말이다.
이야기를 들은 청연은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그럼 제하가 그걸 마셔도 마찬가지인 거 아니야?”
“아니지. 그 마교도는 고작 삼류무사였고, 제하는 그동안 쌓아 온 게 많잖아. 분명 효과가 클 거야.”
“그래서 그 사람은 그걸 어디서 찾았는데?”
“마교가 곤륜을 멸문시킨 직후였으니까 아마도 곤륜산 근처… 아.”
민아는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잠시 밝아졌던 청연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내가 거기 갈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러네…. 다른 걸 생각해 볼게.”
식사하는 동안 골똘히 머리를 굴려보아도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그 와중에 청연의 앞에 놓인 음식은 전혀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보다 못한 민아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차라리 다른 사람을 만나보는 건 어때?”
“응?”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다고 하잖아. 너 좋다는 애들도 많은데 왜 굳이….”
“됐어.”
청연은 듣고 싶지 않았는지 빠르게 말을 끊었다. 그의 손에 들린 젓가락이 음식 주변을 맴돌며 의미 없는 움직임을 반복했다.
평생 저러고 살 셈인가. 세화와는 다르게 잘 털어 내야 할 텐데.
민아는 안쓰러운 눈으로 청연을 바라보았다. 아픈 마음을 시간이 낫게 해 주길 바라면서.
***
그날 오후, 외출을 했을 때도 청연은 비슷한 상태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 밥을 먹고, 술을 마셨지만 그의 앞에 놓인 음식은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잡담도 나눴지만 웃지는 않았다. 결국 예상보다 일찍 객잔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청연은 이제 비파를 일 층까지 가지고 내려와 연주하기 시작했다. 현을 뜯는 손놀림에 맞춰 퍼져 나가는 구슬픈 선율이 객잔 손님들까지 숙연하게 만들었다. 민아가 조심스럽게 그를 말렸다.
“그… 미안한데 이제 좀 방에 가서 하면 안 될까?”
이러다 객잔 망하겠다, 친구야.
“아니면 차라리 다른 곡으로 바꾸는 건 어때?”
“왜? 별로야?”
“그건 아닌데….”
청연은 꿋꿋하게 연주를 이어 갔다. 어떤 손님은 밥을 먹다 눈물을 훔치기까지 했다.
그래, 될 대로 돼라. 그렇게 해서라도 기분이 좀 나아진다면….
결국 포기한 민아는 탁자 위에 엎어져 가만히 그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젊은 남자 손님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슬그머니 다가왔다. 청연이 연주를 멈추자 손님은 그의 귀에 대고 낮게 물었다.
“주인장, 혹시 다른 곡은 없습니까?”
“어떤 곡을 원하시는데요?”
청연이 되묻자 그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저쪽에 앉아 있는 저 낭자가 보이십니까?”
“예….”
“제가 남몰래 연모하고 있는 낭자인데 오늘 처음으로 함께 식사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좋은 식사에 한 곡조 곁들이고 싶으니, 밝고 서정적인 곡으로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품속에서 전낭을 꺼냈다. 그리고 돈 몇 푼을 청연에게 찔러주었다. 돈을 건네받은 청연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뭐…. 그런 거라면야.”
“감사합니다!”
남자는 싱글벙글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이윽고 청연이 다시 비파를 연주하기 시작하자 민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이 미친놈은?’
그의 비파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은 분명 대학교 교양 수업 시간에 들어본 적이 있는 드뷔시의 피아노 독주곡이었다. 대체 이걸 어떻게 비파로 연주하는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돈이면 다 되는 거였어?’
눈물 나게 슬픈 음악도 돈으로 멈출 수 있는 거였냐고.
민아는 로맨틱한 한때를 보내는 커플의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마치 현대의 고급 레스토랑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남자는 곡 선정이 꽤 마음에 드는지 중간중간 청연에게 눈길을 보내며 입을 벙긋거렸다.
‘주인장 최고.’
청연은 비파의 신이 들린 듯 현을 뜯었다. 곡은 바뀌었어도 처연한 얼굴로 악기를 연주하는 미인의 자태는 그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