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5화
청연이 잔을 더 가져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자 무호가 말했다.
“필요 없어.”
“응? 뭐가?”
그는 대답을 하는 대신 여유롭게 손을 뻗어 청연의 잔을 가져갔다. 그러고는 잔을 유심히 보며 청연의 입술이 닿았던 곳을 찾더니, 아주 느릿하게 그곳에 입을 가져다 댔다. 찰랑이는 액체가 천천히 비워지는 동안, 제하는 손에 쥔 잔을 꽉 움켜쥐었고 여운은 이를 악물었으며 청연은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보통이 아니다.’
다른 두 사람을 분노하게 만드는 실력이 수준급이었다. 청연은 다시금 검 자루를 잡으려는 두 손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빈 잔이 탁자 위에 툭 놓였다. 청연은 한숨을 내쉬며 주방에 들어가 잔 두 개를 더 가지고 나왔다. 하나는 자신의 앞에 놓고, 또 하나는 여운의 앞에 놓으며 정말 마시지 않아도 된다고 거듭 당부했다.
“객주님께선 앞으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제하가 술잔을 채우며 물었다.
“건강한 몸이 되셨으니 이루고 싶으신 게 있으십니까?”
“음….”
청연은 술을 한 모금 넘기며 곰곰이 생각했다. 무공을 익힐 수 있는 몸을 되찾았지만 천하제일인이 되겠다거나 하는 거창한 욕심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객잔 주인으로 있는 편이 즐거웠고, 스스로 잘 어울린다고 여겼다.
그런데도 단전을 만들고 곤륜의 무공을 되짚어 본 건 자기방어를 위해서였다. 소중한 객잔과 직원들, 그리고 자신의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어야 하니까. 언제 사건사고가 터질지 모르는 세계에서 혹시 모를 일들에 대비하고 싶었다.
“글쎄. 아직은 잘 모르겠네.”
청연은 애매한 대답을 내놓고는 미소 지었다. 그러는 사이 자신의 술잔을 강탈당한 것도 몰랐다.
“이 자가 또….”
제하는 주먹을 꾹 쥐며 무호를 노려보았다. 청연이 새로 가져온 잔을 쥐도 새도 모르게 훔쳐 간 그는 조금 전과 같은 방식으로 남은 술을 비워 냈다. 그러면서 은근한 눈빛을 보내오는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청연은 이마를 짚으며 여운을 곁눈질했다. 그는 언제나처럼 덤덤한 표정으로 말없이 앉아 있었다. 이런 자리에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라 고단한 수행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차라리 얼른 한 모금 마시고 자러 가면 좋을 텐데,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반면에 제하는 무호의 행동에 자극받은 것인지 빠르게 잔을 채우기 시작했다. 이걸로 자신의 강함을 보여 주기라도 하려는 듯, 술을 물처럼 마셔대는 모습에 조금씩 걱정이 되었다.
“천천히 마셔. 그러다 큰일 나.”
“걱정 마세요. 저는 취해본 적이 없습니다. 강한 사내라면 술 따위에 지지 않는 법입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잔을 말끔하게 비운 제하는 차게 식은 눈으로 무호를 바라보며 눈썹을 까딱했다. 주량으로 승부를 내자는 대결 신청이자 도발이었다. 이쯤 되니 청연은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거 딱 한 병만 마시고 자러 가는 거야. 알았지? 우와… 술 마셨으니까 다들 잠 잘 오겠다….”
청연은 영혼 없는 목소리로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그러나 제하는 꿋꿋하게 말했다.
“한 병으로는 성에 차지 않을 듯합니다.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길, 독한 술을 버텨내기 위해서는 강건한 육체뿐만이 아니라 정신력 또한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진정한 강자를 가리기에 좋은 방법이지요.”
“여기서 왜 강자를 가려야 하는데….”
아아, 대인. 제자에게 도대체 뭘 가르쳐 주신 건가요.
그래도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는 이게 나으려나. 청연은 불안한 눈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제하의 도발에 걸려든 사람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여운이 술병을 가져가 자신의 잔을 채웠다.
“어? 너도 마시게?”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말릴 틈도 없이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청연은 긴장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딱 한 잔만 마시게 두자. 그리고 취하면 바로 데려가자, 생각하면서.
묵묵히 술을 넘긴 여운은 잔을 내려놓았다. 겉으로는 아주 멀쩡해 보여, 청연은 그의 눈앞에 살며시 손을 흔들어보았다.
“취했어?”
“…아니.”
아직 이른가.
청연은 조금 더 기다린 뒤 다시 물어보았다.
“취했어?”
여운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다시 술병을 집어 잔을 채우려고 했다. 청연은 놀라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왜! 왜 또 마셔!”
너 벌써 주량 넘겼잖아.
그러나 그는 고집스럽게 술을 따르더니 또 한 모금 마셨다. 예상과 다르게 곧장 취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당황해하던 청연의 머릿속에, 비웃는 듯한 무호의 전음이 울렸다.
‘비겁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