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화
※ 본 회차에는 폭력적이고 잔인한 묘사가 등장하오니 감상에 유의하시기를 바랍니다.
청연과 제하가 물에 빠진 뒤에도 배는 거세게 요동쳤다. 가만히 서 있기도 힘들 지경에 이르자 사람들은 하나둘씩 싸움을 멈췄다. 각자 난간을 꼭 붙들고 버티며 배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아무리 물과 가까이 지내는 수적일지라도 저 정도로 거친 물살에 휘말렸다가는 살아 돌아오기 힘들 터였다.
“채주!”
수적 하나가 그들의 수장을 향해 외쳤다. 난간을 붙든 커다란 팔뚝에 힘줄이 잔뜩 돋아 있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곳은 원래 이러지 않았는데….”
“조금 전에 사람 몇이 강물로 떨어지는 걸 보았다. 곧 진정될 것이니 기다리거라.”
장강수로십팔채, 그중에서도 구당협 부근에서 활동하는 흑수채의 채주가 답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하게 말했지만 사나운 강물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에도 의아함이 깃들어 있었다. 확실히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상단 나부랭이들이 협곡에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기 시작한 건 불과 몇 달 전 일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배가 뒤집히거나 난파되기 일쑤였으니까.
그들은 이 모든 게 할 일 없는 신선의 농간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제 생각은 달랐다.
그는 강물 속에 수귀가 산다고 믿었다. 인간을 산 채로 삼켜 배를 불려야만 만족하고 잠잠해지는 수귀.
“그놈 때문에 여기까지 나왔건만….”
상단에게 통행세를 받아 가는 장소는 주로 협곡 안쪽이었다. 매복하기 쉬웠고, 강의 폭이 상대적으로 좁아 여차하면 뭍으로 도망치기도 쉬웠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들이 협곡에서 먼 바깥쪽까지 나오게 된 것도 전부 그 빌어먹을 수귀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놈의 배가 많이 고팠던 건지 이 사달이 나고 말았다. 싸우다가 죽은 시신이 강물에 떨어지는 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꼭 산 사람이어야만 놈을 진정시킬 수 있었는데, 마침 누군가 물속으로 뛰어드는 걸 보았으니 이제 곧 하던 일을 끝마칠 수 있을 것이다.
“수면이 잠잠해지면 곧장 갑판 아래로 내려가 물건을 꺼내온다.”
“예, 채주.”
그의 예상대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니 물살이 진정되었다. 배 위의 사람들은 상황을 지켜보며 조심스럽게 난간에서 손을 떼어 냈다.
“끝인가? 정말 끝난 건가?”
“그런 것 같은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무섭게 그들은 다시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갑판 아래로 내려가려는 자들과 막으려는 자들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다.
그때, 무언가가 쿵쿵 울리는 소리와 함께 배가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뭐야? 왜 갑자기….”
당황한 그들은 제자리로 돌아가 난간을 붙들고 수면을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강물이 휘몰아치는 게 아니라, 진동하고 있었다. 마치 강바닥에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이건 또 무슨 일이지?
그 순간 사방에서 불기둥이 솟구쳤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배의 난간에 옮겨붙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덕분에 난간을 잡고 몸을 지탱하던 사람들은 뜨거운 열기에 데어 손을 화들짝 떼어 냈다.
마치 이 배에서 내릴 수 없도록 불꽃으로 장벽을 두른 듯한 모양새였다.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나무가 타들어 가는 소리가 났다. 놀란 이들이 미친 듯이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저, 저기!”
누군가가 소리치며 손가락질했다. 그는 아주 멀리 떨어진 육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모두 그가 손짓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눈이 특별히 밝아야만 사물을 분간할 수 있는 거리인지라, 몇몇을 제외하고는 그들의 정체를 쉽게 알아채지 못했다.
채주는 나이가 들어 침침해진 눈을 끔뻑거렸다. 젊어서는 이 눈도 제법 쓸만했는데.
“마교, 마교다!”
조금 전에 손가락질하던 사람이 외쳤다.
“무슨 소리야. 마교가 여길 왜….”
“천마다!”
“…….”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천마가 이런 곳에 있을 리 없었다. 마교의 수장이라는 자가 대낮에 신강도 아닌 사천을 배회하고 있을 리가.
그러나 그의 얼굴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자들은 기겁하여 불길을 뚫고 배에서 뛰어내리기 직전이었다.
흑의인들 중 가장 선두에 서 있는, 유독 키가 큰 남자에게서 위압적인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가 한쪽 발을 땅에서 살짝 떼었다가 내딛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지면이 진동했다. 그 영향을 받은 수면도 마찬가지였다. 금방이라도 배가 뒤집어질 것 같은 충격에, 사람들은 그의 정체를 깨닫게 되었다.
“천마, 진짜 천마야!”
혼비백산한 이들이 천마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배의 가장자리로 달려갔다. 채주는 대로하여 자신의 수하들에게 외쳤다.
“가만히 있어, 이 머저리들아!”
물에 뛰어드는 순간 정말 죽을 거라는 걸 왜 몰라.
혼란스러웠다. 어째서 천마가 저곳에 서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지, 어째서 이토록 먼 거리에서도 숨이 막힐 정도로 지독한 살기를 뿜어내는지. 모든 것이 의문이었다.
겁에 질린 몇몇은 만류에도 불구하고 불길을 넘어 강물로 뛰어들었다. 그러기 무섭게 천마가 한 발을 더 내디뎠다. 천지가 흔들릴 정도로 강한 진동이 일었다.
그의 발이 닿은 곳부터 시작해서 지면이 터져 나갔다. 쩌적쩌적 갈라지는 소리가 강바닥에서까지 들려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면 위로 시신 몇 구가 둥둥 떠올랐다.
뛰어내린 자들은 전부 죽었다. 그가 물을 통해 흘려보낸 내력이 파장을 일으켰고, 그 충격을 이겨 내지 못해 죽은 것이다.
“허업….”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불에 타죽고, 뛰어내려도 죽는다. 등평도수1)나 허공답보2)를 하지 않는 이상.
***
지홍은 의연한 얼굴로 주군의 곁을 지키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누구보다도 초조했다. 그는 여태껏 사람이 분노하면 불처럼 뜨겁게 달아오르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분노가 지나치면 그 반대가 되는 모양이었다.
주군께서는 여느 때보다 차갑게 가라앉아 계셨다. 얼음장 같은 분위기에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만 같았다. 단순히 심기가 불편하시거나 가끔 이상행동을 보이실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불타는 배 위에서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아마 저들은 오늘 전부 죽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고통스럽게.
호북에서의 일을 전해 들은 지홍은 어젯밤, 객잔에 몰래 호위 한 명을 붙여 놓았다. 절대 눈에 띄지 않도록 기척을 숨기는 데 능한 놈으로 골랐고, 그림자처럼 행동하라고 단단히 일렀다.
그랬더니 이 망할 놈이 오랜만에 신강에서 벗어났다고 기뻐하며 술을 진탕 처마시고 늦잠을 자버린 것이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사건을 알게 된 그는 헐레벌떡 소식을 전했다. 물론 그놈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대낮에 사천 땅에서 일을 크게 벌이게 된 탓에 지홍은 사방을 경계하느라 바빴다. 주군께서 다른 일에는 신경 쓰지 않으실 수 있도록 돕는 게 자신의 소임이었다.
그때, 배 위에 있던 누군가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그러더니 비명을 지르며 이쪽으로 빠르게 끌려오기 시작했다. 주군께서는 이 정도 거리에서도 기를 운용해 사람을 들어 올리시는구나, 지홍은 내심 감탄했다.
끌려오는 그 사람은 무인이 아닌 상인이었다. 피를 묻혔음에도 번쩍거리는 옷차림새로 보아하니 상단주인 듯했다. 공포심에 덜덜 떨며 까무러치기 직전인 그의 목을 주군께서 커다란 손으로 틀어쥐셨다.
“주군.”
그가 무얼 하려는지 알아챈 지홍은 급히 입을 열었다.
“어째서 직접 피를 묻히려 하십니까. 그런 일은 저희가….”
그러나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바로 입을 닫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제 목숨까지 빼앗길 터였다.
그리 길지 않은 손톱이 상단주의 비단옷을 찢고서는 살갗을 깊게 파고들었다. 그러더니 서서히 움직여 뱃가죽을 갈랐다. 상단주의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뱃속으로 손이 쑥 들어가기 무섭게 우두둑하고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났다. 상단주가 고통에 몸부림칠수록 더욱 소름 끼치는 소리가 이어졌다. 결국 부러진 갈비뼈 하나가 그의 몸 밖으로 튀어나왔다.
주군께서는 상단주의 몸에 강제로 기를 주입하여 그가 정신을 잃지 못하도록 유지하고 계셨다. 그러면서 갈비뼈를 하나하나 부러뜨려 나갔다. 맨정신으로 그 통증을 고스란히 견뎌 내야 하는 몸이 크게 경련했다.
뼈가 뚝뚝 부러지는 소리, 그리고 내장이 질척이며 뒤엉키는 소리가 한 데 섞였다. 직접 손을 쓰지 않고도, 굳이 피를 묻히지 않고도 충분히 고통을 주실 수 있었을 텐데.
저분께서 교주로 취임하신 후 누군가에게 저렇게까지 하는 모습은 실로 처음 보았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건 아마 전임 교주가 죽은 그날이었던가.
처음에는 제발 살려달라며 비명을 지르고 발작하던 상단주는 이제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입에 거품을 물었다. 그 와중에 정신은 똑똑히 박혀있어 자신의 몸 밖으로 부러진 뼈와 내장이 튀어나오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가 죽지 않는 선에서 극한의 고통을 안겨 주시던 주군께서는 이내 손을 조금 더 깊숙하게 넣어 심장을 움켜쥐셨다. 펄떡펄떡 뛰던 심장이 뜯겨 나오자 상단주는 그제야 숨을 거뒀다. 눈도 감지 못한 채였다.
축 늘어진 몸이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너덜너덜하게 벌어진 뱃가죽은 부딪친 충격에 진동하다가 금세 잠잠해졌다.
“잘게 찢어서 들개 먹이로 주거라.”
지홍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러겠노라 답했다.
“배 위의 저놈들은….”
“…예.”
“살점 하나 남지 않게 처리하도록.”
낮은 목소리로 명령을 마친 주군께서 돌아서셨다. 지홍은 손바닥에 배어 나온 땀을 옷자락에 대충 닦으며 그의 뒷모습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머지않아 중원의 서쪽 끝부터 동쪽 끝까지, 장강 전체를 뒤지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게 뜻하는 바는 분명했다.
주군께서도 그분의 기척을 느끼지 못하신다. 기감이 그토록 예민하신 분을 상대로 기척을 숨길 방법은 단 두 가지였다.
첫째, 아주 멀리 갔거나 둘째, 이미 심장이 멎어 작은 온기까지 잃었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