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6화
“뭔 소리를 하냐니? 누가 좋냐고 물어본 건 너잖아.”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마침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두 사람의 대화가 끊겼다. 청연이 잠갔던 문을 열어주자 문밖에 서 있던 점소이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객주님, 아까 그 손님들 다시 오셨어요.”
“…나중에 오랬더니 그새를 못 참고.”
“출입 금지당한다고 들어오지도 못하고 대문 앞에서 서성거리시더라고요.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 들여보내야지, 뭐.
청연은 하는 수 없이 민아와의 대화를 중단하고 아래층으로 향했다. 열린 문 밖에 시무룩한 얼굴의 제하와 무표정한 여운이 서 있었다. 무호는 이미 떠난 것인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또 밥 못 먹이고 그냥 보냈네.’
괜스레 마음이 무거워졌다. 청연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제하와 여운은 그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폈다.
“저, 객주님.”
제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는 제 생각이 짧았던 것 같습니다. 객잔 안에서 싸우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객주님께서 입으실 텐데, 순간 흥분하여 경솔한 행동을 하였습니다.”
“미안해.”
그의 옆에 서 있던 여운 또한 말을 보탰다. 청연은 고개를 저었다.
“알면 됐어. 다음부턴 그러지 마.”
“세화야, 하지만 그 사람은….”
청연이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표정으로 여운을 바라보자 그는 냉큼 입을 다물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천마에 관해 묻고 싶다는 기색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눈치를 보느라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들어와서 저녁이나 먹어.”
식탁 주변에 둘러앉은 세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보아하니 여운과 제하 둘 다 청연에게 용건이 있어 찾아온 건 아닌 듯싶었다.
“세화야, 누님은 좀 어떠셔?”
“이제 많이 괜찮아지셨어.”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왜 객주님을 세화라고 부르시는 겁니까?”
“…….”
“…….”
정말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청연은 밥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 몰랐다. 그 와중에 식사를 하러 내려온 민아의 시선이 느껴졌다.
“손님, 이것 좀 드셔보시겠어요?”
어느새 민아에게 다가간 점소이가 무언가를 건네고 있었다.
“이게 뭐… 어라, 팝콘이네?”
“예? 이건 튀수라고 부릅니다. 옥수수를 튀긴 거예요. 객주님께서 손님들께 무료로 나눠드려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별짓을 다 하네요.”
튀수가 와그작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의 따가운 시선이 뒤통수에 꽂히는 것만 같아, 청연은 시선을 내리깐 채 차만 꼴깍꼴깍 마셨다.
아직 민아와 나눠야 할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식사를 마친 후 그와 조금 더 시간을 보내려던 계획은 이미 틀린 듯했다. 청연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두 남자 때문이었다.
여운과 붙어 있으면 제하가 다가와 두 사람을 갈라놓았고, 제하와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여운이 다가와 새 이불을 찾았다. 둘 다 특별한 용건도 없으면서 어쩜 그렇게 쫓아다니는지, 아무래도 청연을 혼자 내버려 둘 사람은 없는 듯했다.
“이제 늦었어. 나 자러 갈 거니까 둘 다 그만 따라와. 응?”
“객주님, 밤새 잘 주무시도록 침이라도 놔드릴까요?”
“세화야, 네 방에서 잠깐 얘기 좀 해도 돼?”
“안 됩니다!”
제하의 단호한 외침을 들으며 청연은 마른세수를 했다. 어린놈은 그렇다 쳐도 왜 멀쩡하던 여운마저 저렇게 됐는지 모를 일이었다.
“둘 다 각자 방에 가서 쉬어. 할 얘기 있으면 내일 해.”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그는 속으로 다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내일은 꼭 탈출한다.’
청연은 여전히 튀수를 씹으며 자신을 구경 중인 민아에게 눈짓을 보냈다. 아침 해가 뜨자마자 아무도 모르게 튀자고.
***
다음날, 청연은 해가 뜨기도 전에 잠에서 깨어났다. 일찍이 준비를 마치고 방을 나선 그는 발소리를 죽인 채 살금살금 일 층으로 내려갔다. 이미 그를 기다리고 있는 민아의 모습이 보였다.
“장비는 챙겼어?”
민아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청연은 조용히 하라고 손짓하고서는 창고로 향했다. 창고에서 천에 둘둘 말린 무언가를 꺼낸 뒤 민아와 함께 객잔 밖으로 나섰다.
“어디로 가는 줄은 알고?”
“그럼. 내가 여기서 몇 년을 살았는데.”
두 사람은 마차를 빌려 길을 떠났다. 아침 해가 밝게 떠올랐을 때쯤, 마차는 어느 한적한 강가에 도착했다. 비밀 이야기를 나누기에 딱 적합한 장소였다. 평소와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강변에 커다란 배 한 척이 정박해 있다는 거였다.
“여기가 많이 잡혀?”
“어. 명당이야.”
청연은 민아와 함께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창고에서 꺼내온 물건을 집어 말려있던 천을 풀자 낚싯대 두 개가 나왔다. 민아는 낚싯대를 집으며 말했다.
“너랑 낚시하는 것도 오랜만이다. 왜, 내가 고민 있을 때마다 너한테 낚시하러 가자고 졸랐잖아. 그러면 너는 무슨 아저씨 같은 취미냐고 투덜거리면서도 따라왔지.”
“몰라. 난 이제 기억도 안 나. 이건 제하네 스승님이 좋아하시는 거라서 챙겨 둔 거야.”
“진짜? 소명이가 낚시를 좋아해?”
“까마득한 어른한테 소명이가 뭐야?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
“아, 맞다. 나는 실제로 만난 적이 없다 보니까 현실 인물처럼 안 느껴져서.”
민아는 헤헤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제하는 주인공이라서 그런지 역시 빛이 나더라. 아주 후광이 비치던데. 그런 애가 주인수랑 안 이어졌다니 좀 슬프기는 해.”
“…내가 미안하다.”
“이미 벌어진 일 뭐 어쩌겠어. 그나저나 제하랑 잘해 볼 생각은 없는 거야?”
“야, 내가 걜 몇 살 때부터 봤는데. 무슨 도둑놈도 아니고.”
“그렇게 치면 원작에서 스승님은….”
할 말이 없어진 청연은 입을 다물었다.
멀쩡한 객잔을 두고 여기까지 나온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객잔 안에는 안 그래도 듣는 귀가 많은데, 제하와 여운까지 따라다니니 제대로 된 대화가 가능할 리 없었다. 그러니 낚시를 핑계 삼아 멀리까지 나온 참이었다.
청연은 가장 먼저 혈교에 관해 물었다. 무호에게 설명을 듣기는 했지만 그에게서 나온 정보는 중간이 많이 생략되어 있는 느낌이었으니까.
민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
“나도 아는 건 없어. 내가 만든 세계라고 다 내 뜻대로 돌아가는 건 아닌 것 같아. 너도 알겠지만 원작에서 혈교 같은 건 한 번도 언급한 적 없단 말이지.”
“그렇지. 너는 절반을 씬으로 채우느라 바빴으니까.”
“…조용히 해.”
“그럼 너도 알지 못하는 뒷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는 거네?”
“맞아. 하여간 나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다.”
청연은 입질이 오지 않는 낚싯대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분명 명당이었는데, 오늘따라 물고기들이 잠잠했다. 저기 있는 배 때문인가.
“아, 내가 네 얘기 듣고 어젯밤에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민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천마가 일 년 일찍 교주가 된 건 아마 너 때문이지 않을까?”
“나? 내가 뭘 어쨌다고?”
“걔가 널 좋아한다며.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좋아서 납치까지 했다며. 그 정도면 너랑 떨어져 있는 동안 각성한 걸지도 몰라. 빨리 재회하고 싶다는 마음이 반역을 앞당긴 거지.”
“그건… 너무 잔인한데.”
민아의 말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랐다. 무호는 마교주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목숨을 비롯해 모든 걸 걸어야 했을 텐데. 그게 사실이라면 커다란 마음의 짐이 생길 것만 같았다. 청연은 시선을 피하며 화제를 돌렸다.
“됐고 그 얘기나 마저 해봐. 네가 쓰려고 했다던 그 외전. 어떻게 끝낼 생각이었는지.”
“어떻게 끝내긴. 여운이 죽었겠지.”
“시랑이 죽었을 거라고?”
“응. 전쟁터에서 미친 듯이 싸우다가 죽을 예정이었어. 세화를 더 일찍 찾지 않은 걸 뼈저리게 후회하면서 천마한테 복수하겠다고 달려들다가 그만.”
“…진짜 잔인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나라고 이렇게 될 줄 알았겠냐.”
“그건 그래.”
청연은 미동도 없는 낚싯대를 응시하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제하와 소명을 제외하면 전부 죽을 운명이었구나. 주인공, 수가 아닌 모두에게는 새드엔딩이었다.
“시랑이랑 다시 만나서 다행이다….”
그는 푸념하듯 중얼거렸다. 그러자 민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너 어제부터 말하는 게 좀 이상하다?”
“뭐가.”
“꼭 네가 세화인 것처럼 말하잖아. 아니, 물론 지금은 세화인 게 맞긴 맞는데. 넌 빙의했잖아.”
“어… 빙의했지. 그걸 누가 몰라?”
청연이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하자 민아의 얼굴에 더욱 복잡한 감정이 떠올랐다.
“그런데 너는 지금 빙의 전 세화인 것처럼 굴고 있다고. 시랑을 그리워했다느니, 다시 정인이 되고 싶다느니 하면서 말이야.”
“…어?”
“그건 네가 아니라 네 몸 주인의 기억이잖아. 너 설마 일부러 그러는 거야?”
“…….”
순간 청연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걸 눈치채지 못한 민아는 낚싯대를 보며 불평했다.
“여기 명당이라더니 왜 이렇게 안 잡혀? 아무래도 미끼가 문제인 것 같은데.”
“…….”
“오는 길에 보니까 장터가 있던데, 강변이니까 미끼도 팔겠지. 내가 빨리 가서 사 올게.”
“어… 어.”
민아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더니 빠른 걸음으로 장터를 향해 사라졌다. 홀로 남겨진 청연은 멍한 눈으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 들은 말이 귓가에 메아리처럼 맴돌았다.
‘몸 주인의 기억.’
맞아…. 나는 빙의했는데. 몸 주인은 따로 있었지.
혼란스러웠다. 그렇다면 자신이 여운을 볼 때마다 느낀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싶었다. 그 모든 떨림과 애틋함이 거짓이었다는 건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깊은 생각에 잠긴 청연은 누군가가 자신의 뒤로 다가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쿵.
온 세상이 진동하는 것 같은 충격과 함께 무언가가 머리를 내리쳤다.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주르륵 흘러내린 붉은 액체가 시야를 가렸다. 청연은 그대로 바닥에 풀썩 쓰러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모든 것이 붉었다. 하늘도, 허공에 펄럭이는 커다란 깃발도.
“이런 데서 다 만나네.”
반가움을 가장한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청연은 깃발에 쓰인 네 글자를 똑똑히 읽었다.
‘대경상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