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4화
“그때 네가 손에 들고 있던 거. 그거 가면 맞아?”
목소리가 떨렸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마교에 납치당해 신강에서 지내던 중, 지홍에게 이끌려 지하 감옥 아래로 내려간 적이 있었다. 그 어두컴컴한 계단 위에서 무호와 마주쳤을 때, 분명 그의 손에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그는 청연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손에 힘을 주어 그 물건을 가루가 되도록 부숴버렸다. 당시에는 너무 어두워서 그게 무엇인지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반지에 대한 기억을 되찾은 지금, 그의 손에 들려있던 게 무엇인지 추측할 수 있었다. 이걸 빼앗아 간 사람이 누구인지 똑똑히 알고 있었으니까.
“가면… 맞지?”
청연은 조심스럽게 물으며 무호를 바라보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심장이 요동쳤다.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그에게 확답을 받으니 진정하기가 어려웠다.
“그 사람… 살아 있어?”
“간신히.”
살아 있구나. 긴장한 몸이 차게 식었다. 기다란 소매 속에서 애꿎은 주먹만 쥐었다 폈다 반복하게 되었다.
“그 사람이 뭐래? 내가 자기 얼굴을 기억 못하더라고?”
“충격이 커서 잊은 것 같다고.”
청연은 구 년 전에 장을 보러 갔다가 그와 마주쳤던 일을 떠올렸다. 가면 벗은 얼굴을 보았음에도 그의 정체를 알아채지 못하고 물었다.
‘누구십니까?’
‘나를 모르는 척하는 것이냐. 아니면 기억을 잃기라도 한 것이냐.’
그날은 그를 눈앞에서 놓치고 말았는데.
“…그래서 너는 그 사람을 감옥 안에 가둬두고 기다린 거야? 내가 기억할 때까지?”
복잡한 감정이 차올랐다. 청연은 고개를 떨구고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청연.”
무호가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그는 청연의 바로 앞에 멈춰 서 물었다.
“복수할래?”
복수…. 오랜 시간 원하던 거였지.
청연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호와 시선을 맞췄다. 그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의 출신을 비롯해 과거에 얽힌 은원까지.
“너한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정말 알 수 없었기에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고맙다고 해야 할지, 왜 혼자서 그런 결정을 했냐고 따져 물어야 할지, 네가 내 일을 대신하게 만들어 미안하다고 해야 할지.
그는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한 손을 뻗어 청연의 허리를 감쌌다. 그러고는 번쩍 들어 올렸다. 생각에 잠겨있던 청연은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뭐야, 갑자기?”
“밥이나 먹으러 갈까.”
“지금? 이 분위기에?”
심각한 얘기 하던 중 아니었어?
“지난번에 다 못 먹어서.”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고민하던 청연은 뒤늦게 알아차렸다. 저번에 해우 일로 정신이 없는 동안 식사도 제대로 못 하고 가버렸지.
“객잔에 가겠다고?”
“밥값은 충분히 한 것 같은데.”
“…그건 그래.”
청연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밥이야 얼마든지 줄 수 있었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가볍게 걸음을 옮기는 무호의 표정이 왠지 밝아 보였다.
***
이제는 객잔 대문이 아니라 창문으로 출입하는 게 더 익숙해질 지경이었다. 무호는 안고 있던 청연의 몸을 방 안에 얌전히 내려놓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방은 모든 게 그대로였다.
“저녁 장사 시작하려면 아직 한참 멀었으니까 손님은 안 올 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얼굴 숨기고.”
“확실해?”
“응? 뭐가?”
“손님 안 온다는 거.”
그의 목소리가 오묘하게 들렸다. 그는 방문 쪽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밖에 뭐가 있어?”
청연은 무호의 얼굴과 문을 번갈아보며 물었다. 그의 눈빛이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 듯 반짝 빛났다.
“재밌네.”
그러더니 무호는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진 청연은 빠른 걸음으로 그의 뒤를 쫓으며 말했다.
“밑에 직원들 있어. 얼굴 바꿔야지. 해령이도 있을 거란 말이야.”
그는 청연의 말을 무시한 채 큰 보폭으로 복도를 따라 걸었다. 검은 장포가 걷는 박자에 맞게 너울너울 휘날렸다. 그대로 계단까지 내려갈 기세였다.
그때였다. 일 층에서 들려온 남자들의 목소리에 청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태허검께서 여기는 어쩐 일로 찾아오셨느냐 물었습니다.”
“친우를 만나러 왔다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
제하와 여운의 목소리였다. 절대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인물들이었다.
‘쟤들이 왜 여깄어?’
그것도 한날한시에. 하필 무호랑 같이 돌아온 이 시점에.
청연은 다급히 무호의 앞을 가로막고는 입 모양으로 말했다.
‘가지 마!’
제하는 안 그래도 저번에 있었던 일로 무호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고, 여운은 뼛속까지 정파인지라 마교와 절대 섞이지 못한다. 그들이 동시에 무호와 마주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장담할 수 있었다. 난장판이 될 것이다. 개박살이 날 거라는 소리다.
‘제발….’
청연은 무호의 옷자락까지 붙들고 애처로운 눈길을 보내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이러면 내 객잔 무너진다, 이놈아.
그러자 무호는 씩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이미 들켰어.”
“…어?”
그는 눈짓으로 난간 아래쪽을 가리켰다. 청연은 뻣뻣하게 굳은 목을 돌려 그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이런 미친.’
일 층에서 저를 올려다보는 두 남자와 눈이 마주친 그는 차라리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객주님.”
“세화야.”
동시에 청연을 부른 그들은 이미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한 손으로는 검 자루를 쥐고 당장이라도 발검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반면에 무호는 아무 감정 없는 얼굴로 그들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세화야, 이리 와.”
여운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날카로운 눈이 무호를 향해 경고의 눈빛을 보내는 것 같았다. 손끝 하나라도 까딱했다가는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객주님, 또 저자가 객주님을 겁박하는 것입니까? 하다 하다 이제는 객잔까지 찾아오다니. 이번에야말로 제가 저자를…!”
청연은 분노에 찬 제하의 목소리를 들으며 혀라도 깨물고 싶은 걸 겨우겨우 참아 냈다. 그러고는 여유롭게 사태를 관망 중인 무호를 지나쳐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폭발하기 직전인 저들을 말리는 게 우선이었다.
“무슨 일이야? 다쳤어?”
여운이 곧장 청연의 몸을 살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적잖이 놀란 듯했다. 그러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다치셨습니까?”
제하 역시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내왔다. 청연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들을 향해 손을 저었다.
“둘 다 그만해. 그런 거 아니야.”
“세화야.”
“객주님, 제게 모두 말해 주십시오. 제가 객주님의 복수를 할 것입니다.”
아니, 그런 거 아니라고! 쟤는 그냥 밥 먹으러 왔을 뿐이라고.
청연은 두 정파 놈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진땀을 빼야 했다.
“검! 제하, 너 검 집어넣어. 시랑, 너도!”
“세화야, 저 사람은….”
“나도 알아. 아니까 일단 그 검부터 넣어, 제발.”
그들이 여기서 싸우면 객잔은 통째로 날아간다. 아, 객잔이 날아갈 때까지 버티기라도 하면 다행이지. 그 전에 두 사람의 모가지가 깔끔하게 날아갈지도 몰랐다.
청연은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이 순간만큼은 옆 동네 불구경하듯이 상황을 지켜보는 무호가 원망스러웠다. 심지어 그는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영업시간이 아닌지라 청연을 만나러 온 제하와 여운을 제외하면 손님은 한 명도 없었다. 다만 휴식을 취하던 객잔 직원들이 날벼락을 맞았다. 그들은 한구석에 옹기종기 모여 놀란 토끼 눈을 한 채 청연을 바라보았다.
“우리, 우리 직원들 겁먹잖아. 쟤네 저기서 떨고 있는 거 안 보여? 그러니까 진정해. 너희 둘 다.”
“객주님, 지금 저분들이 두려워하는 건 저희가 아니라….”
제하는 말을 내뱉다 말고 움찔했다. 무호가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여유로운 몸짓으로 계단을 한 발 한 발 내려왔다. 그럴수록 제하와 여운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 청연은 다급하게 말했다.
“안 돼. 너희 싸우지 마. 싸움 시작하는 사람 제일 먼저 쫓아낼 거야.”
물론 싸움을 시작한 사람이 살아남는다면 말이야.
“무호, 너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마.”
청연은 제대로 싸움이 벌어지기도 전에 두 사람이 살해당하지 않을까 진심으로 걱정되었다. 이 둘이 아무리 강해도 당장 마교주와 맞붙어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제하와 여운은 더 이상 청연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들은 당장 코앞으로 다가오려 하는 무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경계를 잔뜩 세우고 있었다.
“세화야, 위험하니까 밖에 나가 있어.”
“객주님, 나가 계세요.”
“그냥 너희가 나가면 안 되겠니….”
제 말이라고는 더럽게도 안 듣는 세 남자를 말리느라 기운이 다 빠질 것 같았다. 청연은 다급히 그들 사이에 끼어들며 말했다.
“여기 내 객잔이야. 지금부터 뭐 하나 부서지기라도 하면 그 사람은 영원히 출입 금지야.”
그 말에 제하와 여운은 조금 주춤하는 듯했다.
“남의 집에서 함부로 싸우기만 해봐. 너희 자꾸 그러면, 어? 구경꾼들 불러서 관람료 받을 거야.”
청연은 이제 아무 말이나 생각나는 대로 지껄이고 있었다. 그러면서 무호를 슬쩍 돌아보니 그는 가소롭다는 듯 팔짱을 끼고 구경 중이었다.
“너도 마찬가지야. 예외는 없어.”
그가 최선을 다해 중재하고 있을 때, 마침 누군가가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을 힐끗 보니 여자 한 명이 객잔 안으로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영업시간 아닙니다.”
이 와중에 손님이라니. 손님에게 신경 쓸 겨를 같은 건 없었다. 누군가 이 상황을 보고 소문을 내 일이 더 커지지 않기만을 바랐다. 청연은 대충 손짓한 뒤 다시 돌아섰다.
그때, 쿠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여자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동시에 객잔 안에 있던 모두가 그쪽을 바라보았다.
여자의 혼란스러운 시선이 제하와 여운, 무호를 훑더니 마지막에는 청연에게로 향했다. 달달 떨리던 입술이 벌어졌다.
“다, 당신이 어떻게 아직도 살아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