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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객잔 정상 영업합니다 (83)화 (84/145)

083화

기루에 머물기로 한 마지막 날이었다. 청연은 누님과 작별 인사를 나누며 몇 번이고 물었다.

“정말 저와 함께 사천으로 가실 생각은 없으세요? 방이야 얼마든지 내어드릴 수 있는데.”

보화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난 여기가 편해. 나중에 몸이 좀 더 회복되거든 놀러 갈게.”

“…그럼 몸조리 잘하시고 다음에 봬요.”

떠나는 게 못내 아쉬웠다. 누님과 더 긴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객잔을 오래 비우는 건 마음에 걸렸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기루를 나선 청연은 마차를 타는 대신 뒷산으로 향했다.

누님의 말대로 길이 외졌다. 밝은 대낮에 출발했음에도 산을 오를수록 우거져가는 나무들 탓에 주변이 어둑어둑했다. 수풀 속에서 강시가 튀어나와도 놀랍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무섭지도 않았고, 그저 산책을 나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길 하나 제대로 나 있지 않은 이 산속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왜 이렇게 익숙하지?’

꼭 예전에 와본 적이 있는 것처럼.

청연은 헤매지 않고 쉽게 길을 찾았다. 며칠 전에 크게 앓았던 몸이 금방 피로를 느끼기는 했지만, 지금은 궁금증을 해결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그의 발걸음이 검은 옷을 입은 남자를 발견하고 우뚝 멈췄다.

비탈길 위에 무호가 서 있었다. 그는 커다란 나무 기둥에 삐딱하게 몸을 기댄 채 청연을 내려다보았다. 표정을 읽어 내기 어려웠다.

“…기다렸어?”

“올 것 같아서.”

어쩐지 나도 네가 여기 있을 것 같더라.

무호는 따라오라는 듯 고개를 까딱하더니 등을 돌려 걸어갔다. 청연도 속도를 높여 부지런히 그의 뒤를 따랐다.

“그… 있잖아. 나 그날 일 잘 기억이 안 나.”

청연은 그의 뒤통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네 부하들이 도와준 건 알아. 네가 약 챙겨 준 것도. 덕분에 금방 나았어.”

“…….”

“기억이 안 나서 그러는데 그때 네가 했던 얘기 다시 해 주면 안 될까? 혈교 얘기 말이야. 혈마 어쩌고 했던 것까지는 알겠는데.”

그 말에 무호는 잠시 멈칫하더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걷기 시작했다. 보폭이 큰 그와 걸음을 맞추는 게 쉬운 일은 아니라, 청연은 거의 뛰듯이 걸었다.

“맞다. 소교주 얘기는 또 뭐야? 예전에 있었던 너희 천마신교 소교주 말하는 거야?”

“…….”

“그 사람 죽지 않았어? 분명 그렇게 들었는… 아!”

발을 빠르게 놀리던 청연은 튀어나온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잽싸게 그의 팔을 낚아챈 무호가 아니었다면.

“좀 천천히 가. 나 숨 찬다.”

“안 죽었어.”

“뭐?”

“소교주. 안 죽었다고.”

“…….”

어째서? 어떻게?

청연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무호는 그날 밤에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해 주었다.

혈교는 이미 중원에서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천마신교와 한바탕 전투를 치른 후, 간신히 살아남은 잔당들이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 명맥을 이어왔다고 한다. 그러면서 사술을 통해 사람들을 세뇌하여 교인을 늘리는 식으로 몸집을 부풀려 왔다고.

그들은 마교와 마찬가지로 신강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딱히 본거지를 두지 않고 이곳저곳에 퍼진 채로 음지에서만 활동해왔다. 그러던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은 일인데, 그걸 주도한 사람이 바로 혈교의 새로운 수장.

그 사람은 바로 구 년 전에 죽은 것으로 알려진 천마신교의 전 소교주였다.

“아니, 그 사람이 어쩌다가….”

청연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가 혈마가 되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무호가 그를 이미 처리하지 않았다는 게 더 놀라웠다.

분명 죽일 기회가 있었을 텐데 왜 그냥 놔뒀지?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혈교랑 싸울 거야?”

“…….”

“계속 이렇게 두면 정파가 너희를 공격할 명분만 쥐여 주는 거잖아.”

그들도 지금은 전쟁이 두려워 몸 사리고 있다지만, 그래도 여지를 주지 않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것 때문에 사술에 걸렸던 그 도사도 처리한 거겠지.

무호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입을 다물더니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조금 느릿해진 발걸음이었다. 청연은 더 캐묻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그의 옆에서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동굴 입구가 나왔다. 지난번 몸을 녹였던 그곳인 듯했다.

“이 안에 뭔가 있어?”

무언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그걸 확인하러 찾아온 참이기는 했다.

무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동굴 안으로 향했다. 청연도 그를 따라 조심스럽게 걸음을 들여놓았다.

동굴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고 깊었다. 들어갈수록 어두워져 앞을 분간할 수 없었고, 지난번과 달리 서늘한 공기에 소름이 돋았다. 오로지 감각에만 의존해 걷던 청연이 몸을 부르르 떨자 어깨 위에 무언가가 툭 하고 놓였다.

“…고맙다.”

무호의 것으로 추정되는 겉옷이었다. 청연은 어디 있는지도 모를 그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며 소매에 팔을 끼워 넣었다. 그의 몸에 맞게 기다란 소매가 양손을 완전히 덮었다. 입고 보니 조금 머쓱해진 청연은 변명했다.

“그렇게 춥지는 않아. 또 감기 걸릴까 봐 입는 거야.”

“그러든가.”

그의 목소리는 한발 앞에서 들려왔다.

“그 뭐냐, 삼매진화 그런 걸로 불 좀 피워주면 안 돼?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

“아니면 말이라도 계속해봐. 네 목소리 따라가게. 나 지금 혼자 남겨진 것 같아.”

그러자 무호는 대뜸 청연의 손을 잡아 왔다. 이런 걸 원한 건 아니었는데.

“불 피우는 게 더 쉬울 것 같다는 건 나 혼자만의 착각일까.”

“내력을 다 써서.”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추워서 단전이 얼었어.”

“…기어코 내가 너한테 헛소리하는 방법까지 가르쳤구나.”

정답. 간단명료하게 답한 무호는 손을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어둠 속에서 꼭 맞잡은 그의 손이 청연을 앞으로 이끌었다. 터덜터덜 끌려가던 청연은 푸념하듯 물었다.

“너는 대체 내가 왜 좋아?”

제하에게 했던 것과 같은 질문이었다. 이번에는 술기운이 없어서인지 제 입으로 물어놓고도 민망해 눈알을 굴렸다. 그나마 어두워서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다행이었다.

“뭐…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아무래도 쓸데없는 말을 꺼냈다. 그걸 내가 알아서 뭐 할 건데.

청연이 자기 입으로 뱉은 말을 내심 후회하던 중, 귓가에 은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거라며.”

“…어?”

“넌 내 거라며.”

“…….”

뭐야? 그날 있었던 일 기억 안 난다고 했잖아. 어째서 그 말은 기억해?

갑작스레 몰려오는 수치심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청연은 얼굴에 홧홧하게 열이 오른 채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 그때는 네가 자꾸 무섭게 굴고… 막 깨물고 그러니까… 어? 달래보려고 그런 거지. 진짜 아팠단 말이야. 내가 그 말 안 했으면 계속 물어뜯었을 거잖아, 너….”

“…….”

“그게, 그게 기억나?”

“호위대 놈이 들었다던데.”

“미치겠네.”

그러고 보니 그때 문짝도 날아가고 없었지. 얘랑 침상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무슨 얘기를 했는지 다 보고 들은 거냐고. 몇 명이나?

“아무튼 무서워서 그랬어. 방에 갇혀서 꼼짝도 못 하는데 네가 갑자기… 너도 다 들었으니까 알 거 아니야.”

수치스러운 와중에도 그날을 생각하면 의아했다. 청연은 걱정되는 마음에 물었다.

“혹시 요즘도 그래? 내가 잘 아는 의원님이 계시는데 한번 만나볼래?”

“필요 없어.”

“필요 없다니. 그거 심각한 문제야.”

“또 잔소리.”

“…….”

할 말을 잃은 청연은 입을 다물었다. 하긴, 마교주씩이나 됐는데 잔소리 같은 거 듣고 있을 위치는 아니지.

“그나저나 어디까지 들어가는 거야? 이 안쪽에 뭐가 있는데?”

그 질문을 하기 무섭게 무호의 발걸음이 멈췄다. 덩달아 자리에 멈춰 선 청연은 그의 얼굴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을 올려다보았다.

이윽고 두 사람의 주위가 환하게 밝아졌다. 무호의 손바닥 위로 작은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드디어 주변을 분간할 수 있게 되었다.

“단전이 얼었다더니 거짓말… 이게 뭐야?”

문득 바닥을 내려다본 청연은 화들짝 놀랐다. 코앞이 낭떠러지였기 때문이다. 한 걸음만 더 내디뎠다가는 끝이 보이지 않는 저 어둠 속으로 굴러떨어졌을 터였다.

무호는 손 위에 있던 불꽃을 낭떠러지 아래로 휙 던져넣었다. 청연은 그곳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불꽃은 무언가에 옮겨붙더니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옆으로 번져나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청연은 눈을 의심했다.

“저거… 저거 다 시체야?”

단순한 시체가 아니었다. 꼿꼿하게 선 자세로 굳은 수십구의 시신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언뜻 보면 산 사람들 같기도 했지만, 창백한 피부에 돋은 파란 핏줄과 이마 위에 붙은 부적이 죽은 자들임을 알려 주었다.

“설마 죄다 강시야?”

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청연은 넋을 놓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섬뜩했다.

“언제 저렇게 많이….”

그동안 마교에서 이걸 다 모아서 처리하고 있었구나. 그럴 바엔 차라리 혈교를 공격해 씨를 말리는 게 낫지 않을까. 충분히 그럴만한 무력이 될 텐데 왜 안 하지?

차오르는 의문에 청연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는 사이 불길은 시체들을 말끔히 태우고 사라졌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무호는 잠시 놓았던 청연의 손을 잡고 그동안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또 단전이 얼어붙었나 보네.”

“불 피우느라 힘들어서.”

점점 뻔뻔해지는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 아무래도 이놈은 어렸을 때 제 나쁜 습관을 모두 배운 게 확실했다. 거짓말과 헛소리, 얼굴에 깐 철판까지. 청연은 무호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며 급히 자아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동굴 밖으로 나서니 눈이 부셨다. 청연은 손을 들어 올려 얼굴 위에 차양을 만들었다. 그러자 손등을 덮었던 긴 소매가 흘러내려 손가락에 낀 반지가 드러났다. 무호의 시선이 반짝이는 홍옥으로 향했다.

“아….”

청연은 그제야 기억해 냈다. 그에게 반드시 해야만 하는 질문을.

“너한테 꼭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아 입술만 달싹이던 그는 잠시 시간이 흐른 뒤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날, 우리 지하 감옥에서 마주쳤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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