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화
버티던 중, 드디어 무호가 입을 열었다.
“아니야.”
그 한마디에 불안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가슴을 쓸어내린 청연은 긴장이 풀려 중얼거렸다.
“하 씨…. 다행이다….”
“뭐가.”
너 아니라서. 혹시라도 네가 그런 거라면 뭐라고 잔소리해야 하나 고민했잖아. 물론 잔소리로 끝날 문제는 아니겠지만. 이라고 답하고 싶었으나 그러기엔 너무 길었다.
청연은 마지막 남은 기력을 다해 말했다.
“누군지 알려 줘.”
누가 이런 일들을 꾸미는 건지. 왜 너한테 뒤집어씌우려는 건지. 너는 다 알고 있잖아.
허리를 안고 있는 무호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주저하던 그는 결국 청연의 귓가에 나지막이 털어놓았다.
“혈교.”
…혈교? 여운이 말하길 혈교는 수십 년 전에 사라졌다고 했는데.
청연은 이어지는 무호의 설명에 집중하려 애썼다. 그러나 의식이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혈교, 혈마, 소교주 같은 단어들이 머릿속을 둥둥 떠돌다가 문장으로 이어지지 않고 흩어져버렸다.
머지않아 눈앞이 새까맣게 점멸했다. 잠이 드는 건지 혼절하는 건지 구분할 수 없었다.
***
열다섯 살의 무호는 처마 위에 앉아 객잔 후원을 바라보았다. 여름이 되어 푸릇푸릇한 이파리들이 바람에 잔잔하게 흔들렸다.
“얜 또 어딜 간 거야?”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려오자 무호의 시선은 자연히 지붕 아래쪽을 향했다. 시장에 다녀온 청연이 한 손에 사과를 든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지난번에 청과상에서 빼앗아 먹은 걸 들킨 이후, 그는 시장에 갈 때마다 사과를 두둑하게 사 오고는 했다. 가끔은 저걸로 배를 불려 죽일 셈인가 싶었다.
“밖에 나갔나?”
무호는 후원에서 방황하는 청연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더운 날씨 탓에 얇아진 옷차림과 가끔 머리를 위로 틀어 올리면 드러나는 하얀 목덜미를 볼 때마다 기분이 못마땅해졌다.
그때, 날카로운 시선을 느낀 청연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처마 위에 앉아 있는 무호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가왔다.
“장 보는 동안 방에서 공부하고 있으랬더니 거기서 뭐 해? 책은 좀 봤어?”
“그거 주면 볼게.”
무호는 그의 손에 들린 것을 눈으로 가리키며 답했다. 그러자 청연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를 던져 주었다. 한 손으로 가볍게 받아 낸 초록 사과를 베어 물자 떫은맛이 났다.
그러고 보면 특별한 맛도 아닌 것 같은데.
“이리 내려와. 얘기 좀 해.”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는 그의 태도를 보아하니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알 것 같았다. 무호는 그를 무시하며 딴청을 피웠다.
“내 말 안 들려?”
“안 들려.”
“…안 들리면 대답은 어떻게 하는데. 그러면 계속 거기 있든가. 안 내려오면 내가 갈 거야.”
그렇게 말한 청연은 담벼락을 오르더니 지붕 위로 걸음을 디뎠다.
“내가 체력이 약해서 그렇지 운동신경은 좋은 편이라고.”
그는 무호의 곁으로 다가와 자리를 잡고 앉으며 말했다.
“해령이가 그러는데 너 오늘 밥값 제대로 했다며?”
“…….”
“손님 둘이 피떡이 돼서 나갔다더라.”
그거야 그 사람들이 객잔 안에서 치고받고 싸우는 바람에 시끄러웠으니까. 입 좀 닥치기를 바란다는 의사를 말이 아닌 주먹으로 전달했을 뿐이다.
“내가 여러 번 말했잖아. 너 그러다가 소문이라도 나면 큰일 난다고. 얌전히 있는 게 그렇게 어려워?”
“…….”
“밥값을 하고 싶으면 차라리 일을 도우라니까? 내가 언제까지 이걸로 잔소리를 해야… 읍.”
무호는 말을 하느라 벌어진 청연의 입에 자신이 먹던 사과를 물렸다. 덕분에 말문이 막힌 그의 원망스러운 눈길만이 전해져왔다.
“하여간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지.”
청연은 포기한 듯 사과를 쥐고 한 입 깨물어 먹으며 투덜거렸다. 아삭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이상하게 식욕이 돋았다. 무호는 그의 손에 있는 사과를 다시 빼앗아 베어 물었다.
이전보다 훨씬 달았다.
“많이 사 왔으니까 방에 두고 먹어.”
“맛없어.”
“아주 맛있게 먹고 있는 것 같은데.”
청연은 조금 전 무호가 그랬듯이 후원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처마 위에서 보는 전망이 꽤 마음에 든다며 그 자리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다리 좀 빌리자.”
제멋대로 허벅지를 베고 눕는 그의 행동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무호는 혀를 쯧 차며 시선을 돌려 먼 산을 바라보았다. 스멀스멀 올라오려고 하는 망측한 생각을 애써 지워 냈다.
그걸 알 리 없는 청연은 후원 한쪽 구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 공간이 비었잖아. 안 그래도 나무 한 그루 심을까 고민 중이었는데 사과나무를 심어야겠어.”
“그걸 언제 키워 먹게.”
“몇 년 기다리면 먹겠지 뭐. 그때쯤엔 너도 다 컸으려나? 와, 그땐 지금보다 더 잘 먹는 거 아니야?”
헤헤 웃는 청연의 웃음소리에 왠지 마음이 간지러웠다.
“열매 열리면 너 실컷 먹어. 난 안 건드릴게.”
그 말은 그때까지 여기에 머물러도 괜찮다는 뜻일까. 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쌓아 올린 기대가 한순간에 무너질까 두려웠다.
이곳에서 보내는 나날이 길어질수록 기대감은 커져만 갔다. 어쩌면 남은 평생을 이렇게 살 수도 있지 않을까. 목숨 걱정 따위는 접어 둔 채 소소하게, 일상이란 걸 누리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아니다. 너한테 다 주는 건 불공평하니까 나도 하나 먹고 해령이랑 해우도 주고, 손님들도 좀 나눠드리고…. 이거 한 그루로 안 되겠는데? 몇 그루 심을까?”
그와 함께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시답잖은 나무 이야기나 하면서 평범한 삶을 사는 거. 딱 그거 하나면 충분한데.
“내 말 듣고 있어?”
“…너 다 먹어.”
무호는 다시 청연의 입 안에 사과를 밀어 넣어 그의 입을 막았다. 아무래도 말이 많은 건 좀 성가셨다.
한층 조용해진 여름의 후원은 평화로웠다. 내리쬐는 햇볕과 초록색 나뭇잎, 새들의 지저귐 같은 사소한 것들이 주는 평화였다. 어두컴컴한 지하 감옥 안에서는 절대 가질 수 없었던 것이었다.
모두 그가 알려 주었다. 여름에는 왜 해가 길어지는지, 저 나뭇잎은 어떻게 숨을 쉬는지. 또 저 새가 우는 이유는 무엇인지. 이전에는 눈여겨보지 않았던 모든 것들이 새롭게 다가왔다.
그러니 기회가 된다면 보답하고 싶었다. 보답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아직은 낯간지럽지만.
“근데 너 어젯밤엔 뭐 했어?”
…또 성가시게 시끄럽네.
“너한테 책 줄 거 있어서 한참 찾았는데 안보이더라? 어디 갔었어?”
“알아서 뭐 하게.”
“뭐하긴. 어디 좋은 데 간 거면 나도 같이 가려고 하지.”
청연의 말에 무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젯밤 혼자 후원에 숨어서 욕구를 해소한 일이 떠오른 탓이다.
“말해봐. 응? 재밌는 거면 같이 하자.”
“…….”
“말 안 할 거야? 자꾸 그러면 밤마다 몰래 따라다닌다?”
“꺼져!”
“아, 왜 또 성질을 내고 그래!”
청연은 누워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그래,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꺼진다 꺼져.”
한숨을 내쉬며 돌아서 멀어지는 청연의 뒷모습을 무호는 씩씩거리며 노려보았다. 조금 전에 했던 터무니없는 생각들을 머릿속에서 모두 지워 버리고 싶었다.
보답은 무슨.
***
“저번에 왜 그렇게 갔어….”
갑작스레 들려온 청연의 목소리에 무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뜬금없이 떠오른 옛 기억에 잠겨있던 그는 자신의 품속에서 힘겹게 숨을 내쉬는 청연을 내려다보았다.
의식이 돌아왔나. 열이 너무 심해 독한 약을 먹였는데.
무호는 그의 이마를 다시 짚어보았다. 이전보다는 열이 약간 내린 듯했다.
“해우… 해우한테 사과….”
“됐어.”
됐으니까 입 좀 다물었으면. 그런 쓸모없는 놈 이야기를 하느라 낭비하기에는 체력이 아까웠다.
약 기운 탓에 청연은 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흐느적거렸다. 깜빡거리는 두 눈이 몽롱한 눈길을 보내왔다. 그걸 바라보던 무호는 저도 모르게 긴 속눈썹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의 얼굴을 감싸 쥐고 엄지손가락으로 속눈썹을 쓸어보았다. 파르르 떨리는 감각이 여실히 전해져왔다.
“무호….”
“왜.”
지금 제정신도 아니면서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고마워….”
“뭐가.”
“반지.”
청연은 반지 낀 손을 보여 주려는 듯 들어 올리다가, 그럴 기력마저 없어 손을 툭 떨어뜨렸다. 무호는 한숨을 내쉬고 그의 손까지 장포를 덮어 주며 말했다.
“거저 아니야.”
“…응?”
“반지값.”
받았으면 값을 해야지. 나도 지금 최선을 다해 밥값하고 있잖아.
멍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청연의 입술을 응시했다. 조금 전에 속눈썹을 만지던 손가락을 내려 갈라진 틈 사이에 넣으니 입술이 저항 없이 벌어졌다. 열이 올라 입 속까지 뜨거웠다.
여린 안쪽 살을 슬슬 문지르던 무호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여전히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듯, 그가 손가락을 입에 문 채 웅얼거렸다.
“뭐 하는….”
“두 번 찾아 줬으니 두 번 받을 거야.”
지난번 접문은 기억에 없으니 이게 처음인 걸로 치겠다. 무호는 청연의 입에 넣었던 손가락을 빼내고 그의 목 뒤를 잡아 가까이 끌어당겼다.
뜨거운 입술이 닿았다. 서서히 얽히는 혀와 호흡 사이, 무호는 그제야 알 것 같았다. 그날 먹었던 사과가 어째서 유난히도 달았는지.
동굴 밖에서는 비가 그쳐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