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9화
힘없는 노인의 목소리였다. 이 늦은 시간에 거리에서 뭘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비를 맞아 잔뜩 지친 듯했다.
‘사람이 있는 걸 어떻게 알고 왔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고 해도 빗소리에 묻혔을 텐데. 무작위로 아무 곳이나 두드려보는 걸까.
“도와주시오.”
애달픈 목소리가 세 번째로 울려 퍼졌다. 고민하던 청연은 발소리를 죽이고 문 앞으로 조심히 다가갔다.
“비가 많이 와서 잠시 쉬어갈 곳을 찾고 있소.”
누군지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문을 열어줄 수는 없었다. 워낙 이상한 사람들이 많은 데다가 여긴 제 가게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비에 젖은 노인을 외면하기에도 찝찝했다.
‘시랑을 깨워야 하나?’
술에 취해 깊게 잠들었으니 아침까지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를 제외하면 이 시간까지 여기 남아 있을 사람은 아픈 누님을 포함한 기녀들뿐이고.
청연이 한참을 고민하고 있을 때, 작게 중얼거리는 듯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도 없나.”
이어서 문 앞에 서 있던 왜소한 그림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몇 걸음 가다가 미련이 남은 듯 멈칫거렸다. 푸념 섞인 긴 한숨 소리가 양심을 쿡쿡 찔렀다.
“늙으면 죽어야지 뭐.”
아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어떻게 무시합니까….
청연이 고통스러워하는 동안 노인의 발걸음은 멀어져 갔다. 험한 빗길을 뚫고 걸어가는 발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안 되겠다.”
남의 가게에 마음대로 사람을 들여놓기는 좀 그렇고, 우산이라도 내어 드려야지.
습하고 비가 자주 오는 호북성답게 손님방 안에 여분의 우산이 놓여 있는 걸 보았다. 청연은 잽싸게 방으로 올라가 우산을 집어 들었다.
침상 위에는 여운이 곤히 잠들어 있었기에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용히 문을 닫은 뒤 일 층으로 향했다. 노인은 걸음이 느린 듯했으니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우산값이야 날이 밝은 뒤 제가 대신 치르면 되고.
청연은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을 꼼꼼히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우산을 쓴 채 빠른 걸음으로 걷다 보니 저 멀리 발을 질질 끌며 걸어가는 노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르신!”
요란한 빗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귀가 어두운 건지, 그는 청연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했다. 속도를 높여 달려간 청연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어르신.”
그러자 걸음을 우뚝 멈춘 노인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움푹 팬 두 볼과 앙상하게 마른 몸이 보는 이를 안타깝게 했다. 청연은 들고 있던 우산을 그에게로 기울이며 말했다.
“이거 쓰고 가세요.”
“…나는 쉬어갈 곳이 필요하네만.”
“저도 이곳 사람이 아니라서 남의 집에 머무는 처지입니다. 저기 길가에 객잔이 있는 걸 보았으니 그쪽으로 가보시는 게 낫겠습니다.”
청연은 노인의 손에 우산을 쥐여 주었다.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그의 눈빛이 오묘했다.
‘혹시 돈이 없으신 건가.’
하긴, 객잔에 머물 돈이 있었다면 야밤에 아무 집 문이나 두드리고 다니지 않았을 것이다. 청연은 품속에서 전낭을 꺼내 은자 하나를 그에게 내어 주었다.
“이 돈으로 객잔에 가세요.”
그러고는 돌아서서 빠르게 걸었다. 내리는 빗물에 온몸이 흥건하게 젖어 들고 있었다. 감기에 걸리기 전에 어서 기루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보게.”
“…예?”
갑작스러운 노인의 부름에 뒤를 돌아본 청연은 흠칫 놀랐다. 손을 들어 몇 번이고 눈을 비볐다. 제가 헛걸 보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안 그래도 마른 노인의 얼굴이 겨우 몇 걸음 걷는 사이 더욱 홀쭉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거의 뼈와 가죽밖에 남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기이한 일이었다. 한순간에 사람 얼굴이 말라비틀어진다는 건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였다.
‘설마 또 내가 내 무덤 판 건가.’
몇 초 사이에 얼굴이 저렇게 변했는데 멀쩡한 인간일 리 만무했다. 이래서 남 일에 지나치게 관심 가지면 안 되는 건데. 아무리 그래도 비에 젖은 노인이 ‘늙으면 죽어야지.’ 하는 걸 어떻게 무시하냐고.
“어느 쪽으로 가는 겐가?”
“…….”
그의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저런 사람을 아픈 누님이 잠들어 있는 기루에 들여서는 절대 안 된다. 가만히 서서 비를 맞던 청연은 조금씩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이곳 사람이 아니라서요. 막 고향으로 돌아가 보려던 참이었….”
노인의 얼굴에 일어나는 변화를 실시간으로 목격한 순간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청연은 두 눈을 똑똑히 뜬 채 그의 얼굴에 하나둘씩 돋아나는 핏줄을 지켜보았다.
뛸까. 뛰면 쫓아올까. 오히려 더 자극하게 되는 건 아닐까.
“나는… 쉬어갈 곳이 필요….”
빗소리를 뚫고 들려오는 목소리가 조금 전과는 사뭇 달랐다. 마치 노인과 젊은이, 두 사람의 목소리가 섞인 듯했다.
청연은 경계를 잔뜩 세우며 주변을 살폈다. 이제 노인의 얼굴은 푸른 핏줄로 완전히 덮여 있었다.
‘무기로 쓸만한 게….’
우산은 이미 저 사람의 손에 들려 있다. 여차하면 머리를 내리칠 바위라도 찾아야 하나.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우두둑하는 소리와 함께 노인의 몸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쩍 벌어진 입 안쪽엔 인간의 것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길고 날카로운 이가 돋아있었다.
“미치겠네….”
그냥 뛰자. 뛰는 게 낫겠다.
청연은 곧바로 몸을 돌려 뛸 채비를 했다. 빗줄기로 인해 앞이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단 살고 보자.
그렇게 막 한 발을 떼려던 순간, 무언가 툭 하고 떨어지는 소리에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어…?”
그가 가장 먼저 목격한 것은 어둠 속에서도 반짝 빛나는 검날과 주르륵 흘러내리는 검은 액체였다. 그 밑에는 머리가 잘린 노인의 몸뚱이가 서 있었다.
몇 초가 흐른 뒤 시신은 앞으로 쿵 하고 쓰러지며 땅에 고인 빗물을 튀겼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던 머리통은 청연의 발치에 와서야 멈췄다.
‘죽었어?’
청연은 흔들리는 눈으로 잘린 머리통을 바라보았다. 섬뜩한 광경이었다. 목에서 떨어지는 순간 완전히 말라비틀어져 인간의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을까.
노인이 쓰러진 자리 바로 뒤에는 검을 든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머리에는 관을 쓰고 어느 문파의 도복처럼 보이는 것을 입은 그가 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다가왔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예…. 그런데 누구….”
남자는 바닥에 떨어진 우산과 은자를 집어 청연에게 건넸다. 그리고 자신이 무당파 소속이며 도호는 명겸이라고 소개했다.
“며칠 전 이 근방에서 밤에 강시가 출몰해 사람을 공격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으러 다니던 중이었습니다. 늦지 않아 다행입니다.”
“…강시요?”
그렇다면 방금 그 노인이 강시였다는 건가. 여운이 말하길 청해에서 강시로 만들려다가 실패한 시신들이 발견되었다고 했는데. 그게 성공한 걸로도 모자라서 이제 호북까지 온 거야?
청연이 멍한 눈으로 쓰러진 몸뚱이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명겸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많이 놀라셨겠습니다. 먼저 안전한 곳으로 모셔다드릴까 하는데 어떻습니까?”
“아…. 예, 감사합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살아 움직이는 시체를 목격한 데다가 머리통이 잘리는 모습까지 보았으니 당연히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건에 대한 불안감이 더 컸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청연은 우산을 쓴 채 그의 곁에서 걸었다. 기루까지 가는 길에 또 저런 이를 만날까 걱정되기도 했고, 그에게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이런 일이 며칠 전에도 벌어진 겁니까?”
“예. 얼마 안 된 일입니다. 건장한 사내가 거리에서 물어뜯기는 걸 몇몇 사람들이 목격하였습니다. 그런 이유로 이 근방의 주민들은 밤이 되면 외출을 삼가는데, 모르셨는지요?”
“저는 외지인이라서.”
그러고 보니 기루의 루주가 비슷한 말을 한 것 같기도 했다. 해가 진 뒤에는 밖에 나가지 말라고 했던가. 청연은 그때 누님 일로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터라 귀에 아무런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외지에서 오셨군요. 하여간 마교의 횡포가 양민과 무인을 가리지 않고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모양입니다.”
또다. 또 마교 타령이다. 청연은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고는 물었다.
“마교가 아닌 다른 이들의 소행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다른 이들이라고 하시면….”
“…….”
그야 저도 모르죠. 청연이 답을 하지 않자 그는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마교에서 사술을 통해 사람들을 일종의 병기로 만들려고 한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저런 강시술만 사용하는 게 아니라 최근에는 정파 무인들에게 섭혼술까지 걸어 세뇌….”
말을 이어 가던 그는 아차 하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청연은 그걸 놓치지 않고 물었다.
“섭혼술이요?”
명겸은 그저 입꼬리를 어색하게 끌어올릴 뿐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진 청연은 생각에 잠겼다. 얼마 전 객잔 손님들끼리 스쳐 가듯 나눈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어느 중소 문파의 어린 제자 하나가 갑자기 초점 없는 눈으로 헛소리를 지껄이고, 해가 지면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돌아다니는 행동을 반복하더니, 결국에는 아무도 모르게 실종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광증이 아니라면 마교의 섭혼술에 당한 게 틀림없다는 그들의 말을 듣고 한참을 속으로 투덜거렸다.
곰곰이 생각하던 청연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빗물에 푹 젖은 몸이 으슬으슬했다. 이대로라면 조만간 열이 오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바로 저기에 있는 기루까지만 가면 되니 이제 혼자 가보겠습니다. 도와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청연은 그에게 꾸벅 인사하며 감사를 표한 뒤 기루를 향해 걸어갔다. 날이 밝아 여운이 깨어나면 이 일에 대해 의논해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그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저….”
청연은 의아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비가 많이 오니 잠시 쉬었다 가도 되겠습니까?”
“…….”
순간 번쩍하며 내리친 번개와 함께 청연의 몸이 차갑게 굳었다. 기루에서 쉬어가도 되겠느냐 묻는 그의 눈이 초점 없이 풀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