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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객잔 정상 영업합니다 (78)화 (79/145)

078화

“갑자기 왜 이러는데. 그게 그렇게 민망했어?”

청연의 질문에도 그는 묵묵히 앞만 보았다. 잘생긴 옆얼굴이 오늘따라 고집스러워 보였다.

“에휴…. 난 모르겠다.”

혹시나 그가 더 마실까 싶어 상 위에 놓인 술병을 저 멀리 치워 버렸다. 이미 주량을 훌쩍 넘어설 만큼 마시기는 했지만 말이다.

청연은 여운이 태어나서 처음 술을 마셨던 순간을 떠올렸다. 자신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에게 술을 먹인 게 저였으니까.

‘이거 운남에서 건너온 차래. 향이 좀 특이하긴 한데 마실만 해. 한번 마셔볼래?’

‘싫어.’

‘그래? 맛도 진짜 독특하고 괜찮은데. 이 귀한 걸 마다하다니.’

그러면서 계속해서 술을 권했다. 여운에게 술버릇이 있다는 걸 몰랐기에 저지른 일이었다. 그날 밤, 술에 취한 그에게 한참을 시달린 끝에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게 되었다.

“술이 좀 도나….”

청연은 여운의 눈앞에 손을 휘휘 흔들었다. 그러자 그가 낚아채듯 손목을 잡아 왔다.

“취했어?”

여운은 말이 없었다. 그저 손목을 단단히 붙들고 청연의 손에 젓가락을 쥐여 주었다.

“젓가락 왜. 나 밥 먹으라고?”

그 말에 그는 청연을 찌릿 노려보았다. 여전히 입은 꾹 다문 채였다.

“먹여달라고?”

“…….”

그럼 그렇지. 먹여달라는 거구나.

오늘 그가 저를 위해 해 준 일을 생각하면 밥 정도는 백번도 먹여 줄 수 있었다. 청연은 반찬 한 가지를 집어 그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아 해봐.”

“…….”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젓가락을 내려다보던 그는 이내 고개를 반대쪽으로 휙 돌려 버렸다.

“맞다, 너 고기 안 먹지.”

청연은 하는 수 없이 들고 있던 고기를 내려놓고 소채를 집었다. 여운의 입가에 가져다 대니 이번에는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입 안에 소채를 밀어 넣어준 청연은 그가 음식을 우물우물 씹어 삼키는 모습을 지켜보며 이마를 짚었다.

여운은 술에 취하면 서너 살짜리 어린애처럼 변한다.

“다시 아 해.”

그래도 은인을 굶길 수는 없으니 성심성의껏 먹여보기로 했다. 그가 먹을 만한 반찬을 골라 입 안에 쏙쏙 넣어주던 청연은 마치 어미 새가 된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이건 싫어? 음…. 향이 별론가.”

술에 취하니 호불호가 확실해지는군.

“이것도 싫어? 왜? 아, 고기 옆에 있던 거라서?”

까다롭기도 하지.

청연은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가 평소 입에 맞지 않는 음식도 저와 함께라면 아무 불평 없이 먹어주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내가 널 챙길 기회가 생겼네. 자, 아 해보세요, 사형.”

“…….”

“잘 먹는다, 우리 사형.”

그렇게 어린애 밥 먹이듯 식사를 끝내고 나니 해가 완전히 저물어 있었다. 청연은 저녁상을 대충 정리한 뒤, 탁자 위에 놓인 등 하나만 남겨 놓고 등불을 모두 껐다. 어스름한 빛을 받으며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여운의 눈길이 느껴졌다.

“술 마셨으니까 얼른 자자. 알았지?”

“…….”

“또 왜. 뭐가 불만인데.”

그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품속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그게 뭐… 아, 빗이네. 머리 빗겨달라고?”

빗겨 줄 때까지 그 자리에서 노려보고 있을 기세였다. 청연은 한숨을 내쉬며 그의 뒤로 다가갔다.

“내가 너한테 엄청나게 고맙고 미안하니까 이런 어리광도 다 받아 주는 거야. 알아?”

청연은 여운의 머리칼을 단정하게 고정해 놓았던 머리끈을 풀었다. 그러자 결 좋은 까만 생머리가 차르르 흘러내려 목덜미와 어깨를 덮었다.

“빗질 굳이 안 해도 되겠는데.”

“…….”

“알았어. 하면 되잖아.”

피식 웃음을 흘린 청연은 조심스레 빗질을 시작했다. 촘촘한 나무 빗이 매끄러운 머리칼을 타고 미끄러졌다. 그동안 머리를 묶고 있었음에도 엉킨 부분 하나 없었다.

“고개 살짝만 숙이자. 응, 착하지.”

청연은 그의 긴 머리를 뿌리부터 끝부분까지 꼼꼼하게 빗었다. 안 그래도 좋은 머릿결에 점점 윤기가 더해지는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다 됐다. 사형 더 예뻐지셨네요? 이제 주무실까요?”

“…….”

“…싫어? 알겠어.”

결국 팔에 쥐가 날 때까지 그의 머리를 빗겨 주어야 했다. 종일 긴장 상태에 있었던 터라 이 정도 노동으로도 온몸이 피로했다.

“이제 진짜 자자. 늦었어. 나 좀 봐주라.”

여운은 불만스럽게 청연을 바라보았지만 이내 빗을 거두어갔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뚜벅뚜벅 걸어가더니 침상 위에 걸터앉았다.

“누워야지. 침상에는 눕는 거야. 앉아서 잘 거 아니잖아.”

“…….”

“그래…. 옷을 벗겨 줘야 하는구나.”

그의 눈빛만 보아도 무얼 원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청연은 목덜미를 긁적이며 침상으로 다가갔다. 겉에 입은 흰 장포를 벗겨 내는 동안 그는 고분고분 청연의 손길을 받았다.

“세상에, 옷을 몇 겹이나 입은 거야.”

열심히 매듭을 풀고 옷을 벗기는 내내 여운은 그 자리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눈은 청연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보느라 바빴지만 말이다.

“뭘 그렇게 봐.”

“…….”

“얼굴 빨개졌네?”

발가벗기는 것도 아닌데 뭘 부끄러워하는지.

“다 됐어. 훨씬 가볍지? 이제 자리에 누울까?”

여운은 그제야 만족한 듯한 얼굴로 침상 위에 몸을 눕혔다. 그의 가슴께까지 이불을 끌어 올려 준 청연은 드디어 쉴 수 있게 되어 기뻤다.

“잘 자, 시랑. 나는 저쪽 가서 잘게.”

“…….”

“싫어?”

누운 지 얼마나 됐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여운이 청연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에 똑똑히 쓰여있는 것 같았다.

‘가기만 해봐.’

그래, 내가 취한 널 두고 가긴 어딜 가겠니.

자포자기한 청연은 그를 다시 침상에 눕히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또렷하게 빛나는 한 쌍의 눈이 저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눈 감아야 잠을 자지.”

한참 동안 눈을 빛내던 여운이 손을 뻗어왔다. 그는 청연의 손을 잡고 자신의 가슴 위로 끌어다 놓았다.

“…왜?”

이번에는 뭘 원하는 건지 종잡을 수 없었다. 청연이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그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설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청연은 그의 가슴을 살살 토닥여보았다. 그러자 여운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진짜 애기가 돼버렸네.’

그런 모습이 싫지는 않았다. 그저 몸이 조금 피곤할 뿐, 이런 식으로라도 그를 챙겨 줄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그에게 형님 노릇을 해본 적 없었으니까.

늘 염치없이 받기만 했다.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병시중을 받았고, 오늘도 그에게 큰 빚을 졌다.

‘그 대가로 원하는 게 고작 입맞춤이었다니.’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면 여운은 깜짝 놀랄 것이다.

청연은 새근새근 잠든 그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쓸데없이 잘생긴 얼굴에 입술까지 예뻤다. 몰래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번 해볼까?’

망설이던 청연은 그에게로 조금씩 다가갔다. 잠든 그가 내뱉는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그때, 하늘이 번쩍하며 번개가 쳤다. 머지않아 요란한 천둥소리까지 들려왔다.

‘비가 오려는 건가?’

이윽고 빗방울이 투둑투둑 떨어지며 창을 두드렸다. 처음에는 몇 방울에 불과했던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천둥소리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여운이 눈을 떴다. 청연은 다시 그의 가슴을 토닥여 주며 말했다.

“더 자.”

여운은 눈을 감으며 청연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술기운이 가시지 않아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세화….”

“응?”

“세화… 싫어하는데.”

“뭐를?”

“비….”

드디어 입을 열었으면서 한다는 말이 겨우 그거라니. 청연은 웃으며 답했다.

“뭐래. 내가 비를 언제 싫어했어. 나 비 오는 거 좋아해.”

“싫어해….”

“좋아한다니까?”

그 순간 한 번 더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유독 크고 우렁찬 그 소리에 놀란 청연은 닫혀 있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몸이 차게 식는 것처럼 싸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비를 싫어했던가?’

청연은 다시 잠에 빠져든 여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싫어했던 것 같기도 하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졸음이 쏟아졌는데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곤히 잠든 여운의 등을 토닥이던 청연은 침상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자면 악몽을 꿀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방 안에서 서성거리던 그는 창문을 조금 열어 보았다. 장대비가 쏟아져 내리는 어두운 거리에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기분이 왜 이러지….’

무언가를 잊은 것처럼 찝찝했다. 마치 꿈속에서 헤매는 것만 같았다.

이럴 때는 몸이라도 움직여야겠지. 한숨을 내쉰 청연은 탁자 한 군데에 밀어놓은 그릇들을 발견했다. 그는 빈 그릇과 남은 음식을 차곡차곡 정리한 뒤 쟁반을 들어 올렸다. 기녀들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직접 주방에 가져다 둘 셈이었다.

축시가 되어 영업이 끝난 기루의 복도는 어두컴컴했다.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가 주방 안에 들어선 청연은 쟁반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주방에서 나서려는데, 누군가의 가느다란 음성이 빗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도와주시오.”

청연은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굳게 닫혀있는 대문 위로 왜소한 인영이 비쳐 보였다.

우산도 없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문 앞을 서성이던 그는 다시 한번 말했다.

“도와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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