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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객잔 정상 영업합니다 (77)화 (78/145)

077화

“돌아가실 것 같다니?”

여운은 청연의 손에 들린 서신을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기루의 누군가가 쓴 그 서신은 보화가 역병에 걸려 죽어 간다는 내용이었다. 한 달 전 지인을 만나기 위해 감숙에 다녀온 뒤로 시름시름 앓기 시작해, 지금은 기루 방 안에 격리되어 있다고 쓰여있었다.

약이 완성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약을 구하려 해보았지만 역병이 도는 지역은 이미 통제 상태에 있어 아무나 드나들 수 없었다. 게다가 중원 최고의 신의가 만든 약이라는 이유로 웃돈을 얹어 파는 상인들까지 생겨났다. 평범한 사람이 구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나, 나한테 약이 있어.”

“약이 있다고?”

얼마 전 제하가 주고 간 약이 방 안에 얌전히 보관되어 있었다. 그거면 된다.

“응. 이, 있으니까 얼른 보내드리면….”

더듬거리며 말하던 청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 서신이 호북에서 사천으로 도착할 때까지 며칠이 걸렸을까. 약을 보내드리면 또 며칠이 걸릴까.

서신에서 보화는 지금 아주 위독한 상태라고 했다. 혹시 이미 늦었다면, 이 서신이 오는 동안 돌아가셨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채 끝까지 못난 아우로 보내드려야 한다면….

청연의 몸이 두려움으로 떨리기 시작하자 여운이 그의 양쪽 팔을 잡으며 시선을 맞춰왔다.

“세화야.”

“…어?”

“내가 다녀올게.”

여운의 차분한 목소리가 청연을 달랬다.

“내가 가서 전해드릴게.”

청연은 그의 경공이 얼마나 빠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라면 사천 성도에서 호북까지 반나절이면 갈 수 있을 것이다.

“시랑, 그래도….”

마음이 불안하니 자꾸만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게 되었다. 누님께서 이미 돌아가셨을 경우. 청연이 계속해서 안절부절못하자 잠시 생각하던 여운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 같이 가자.”

“같이? 어떻게?”

“일단 약부터 챙겨.”

결국 고개를 끄덕인 청연은 방 한쪽에 있던 함에서 약이 담긴 상자를 꺼내 품속에 소중히 넣었다. 제발 이 약을 사용할 기회가 남아 있기만을 바라며.

창가에서 가만히 기다리던 여운이 그를 향해 등을 돌리고는 말했다.

“업혀.”

“…뭐라고?”

설마 호북까지 업고 가겠다는 건가. 청연이 망설이자 그는 다시 한번 말했다.

“어서.”

“…….”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던 청연은 고분고분 그에게로 다가가 등에 업혔다. 전혀 힘들이지 않고도 청연의 몸을 들어 올린 그가 돌아보며 당부했다.

“꽉 잡아.”

창문을 통해 방을 나선 두 사람의 몸이 높게 치솟았다. 청연은 여운의 목에 두른 팔에 힘을 주었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훑고 휙휙 스쳐 지나갔지만 그와 함께라는 이유로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걱정되는 건 누님의 안위뿐이었다.

“누님 많이 걱정돼?”

“응…. 오랫동안 못 뵀는데 너무 늦었을까 봐….”

“아직 늦지 않았을 거야.”

괜찮을 거라고 끊임없이 말해 주는 여운의 목소리가 마음을 진정시켰다.

시간이 지나 어느 정도 이성을 되찾은 청연은 빠르게 멀어지는 주변 풍경을 바라보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그때 생각난다.”

“언제?”

“네가 나 데리고 도망쳤을 때.”

스승에게까지 검을 뽑아 들면서 자신을 지키려 했던 여운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팠다. 당시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깨어나기를 반복했는데, 눈을 뜰 때마다 자신을 업고 달리는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 후에 한참을 앓았다. 겨우겨우 기력을 회복해 주변 사물을 분간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처음으로 본 것은 낯선 집의 천장과 제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여운의 얼굴이었다.

“그 집은 지금 어떻게 됐어?”

청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운과 함께 은거 생활을 했던 설산 위의 집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었다. 곤륜파에 입문하기 전까지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했다.

“아직 남아 있어.”

“…많이 낡았겠네. 먼지도 쌓이고.”

“틈날 때마다 가서 청소해.”

“…….”

너는 그동안 거기 갈 때마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떤 마음으로 텅 빈 집을 바라봤을까. 차마 짐작할 수도 없었던 청연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두 사람은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아 기루 앞에 도착했다. 여운의 등에서 내려와 땅에 발을 디뎠는데 여전히 허공에 붕 뜬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들어갔다 올게. 너는 근처에서 잠깐 쉬고 있어.”

청연은 여운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가 기루 같은 곳에 들어가고 싶어 할 리 없었다. 어려서도 잠시 들어왔다 가라고 하면 질색을 했으니까.

“세화야.”

“응?”

“약 줘 봐.”

갑자기 팔을 붙드는 그의 행동에 청연은 의아해하며 품속에 있던 상자를 내어 주었다. 약을 건네받은 여운은 망설임 없이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

“어? 너도 들어가게?”

“빨리 와.”

그는 기루를 향해 까딱 고갯짓하며 문을 열어젖혔다. 청연은 아무 거리낌 없이 기루 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

“누님….”

닫힌 문 앞에서 초조하게 서성거리던 청연은 소리 내 누님을 불렀다. 목소리가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무사하시길 바랐다.

보화는 다행히 살아 있었다. 몸 전체에 수포가 올라오고 자꾸만 피를 토해 오늘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라고 했지만, 어찌어찌 버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여운은 청연에게 절대 방 안에 들어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뒤 혼자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전염병이기에 동네 의원을 보기도 힘든 상황이라 누님에게 약을 먹이고 돌봐 줄 사람이 절실했다.

텅 빈 복도에서 한참을 서성거린 끝에 문이 열리고, 여운의 흰 옷자락이 보이자마자 청연은 그에게로 달려갔다. 아니, 달려가려고 했다.

“오지 마.”

청연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손짓한 그는 미리 안내 받은 방으로 들어가 몸을 깨끗이 씻고, 옷까지 갈아입은 뒤에야 밖으로 나왔다.

“누님은? 좀 어떠셔?”

“약 드셨으니까 괜찮을 거야. 남은 어혈도 전부 토해 내셨고 맥도 정상으로 돌아왔어.”

“아…. 다행이다.”

혼자서 속을 끓이느라 기운을 전부 소진한 청연은 여운의 어깨 위에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진짜… 진짜 고마워. 이렇게 빨리 올 수 있었던 것도, 늦기 전에 약 전해드릴 수 있었던 것도 다 네 덕분이야.”

“너희 누님이잖아.”

그러니까 고마워할 것 없어, 하고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가 든든했다. 마치 평생을 옆에서 지켜 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운은 환자를 돌보기 위해 몇 번이고 방을 들락거렸다. 그동안 청연에게는 한 걸음도 가까이 오지 말라며 접근 금지 명령이 내려졌다. 하는 수 없이 멀찍이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청연은 그에게 어떻게 보답하면 좋을까 고민했다.

주방을 빌려 요리를 해 주기에는 딱히 좋아하는 음식이 없는 사람이었고, 사치나 물질적인 걸 즐기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수련을 제외하면 그가 무언가에 욕심내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아 참, 밤에는 꽤 욕심이 많은….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청연은 손을 들어 스스로 뺨을 때렸다. 다시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런 생각을 해?

“뭐해?”

“으아, 깜짝이야.”

“…왜 뺨을 때려?”

갑자기 등 뒤에서 나타난 여운 때문에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눈살을 찌푸린 그는 청연의 붉어진 뺨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무 일도 없어!”

“그런데 왜….”

내가 잠깐 못된 생각을 하는 바람에….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던 청연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누님은?”

“점점 좋아지셔.”

“너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그리고 약을 전해 준 제하와 그의 스승님도. 청연은 그들을 다시 만나면 감사의 절이라도 올릴 생각이었다.

“너무 고마워서 너한테 뭘 해 줄 수 있을까 고민 중이었어.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먹고 싶은 거나.”

“…….”

“뭔가 있나 본데?”

없으면 없다고 바로 말했을 텐데.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망설이는 기색이 눈에 띄었다.

“뭔데? 말해봐. 다 들어줄게.”

“…조금만 이따가.”

뭐길래 저래?

시선을 피하는 그의 귓바퀴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

아무래도 누님의 상태가 호전될 때까지는 호북에 남아 있어야 할 듯싶었다. 보화를 특별히 아끼는 기루의 루주는 감사의 의미에서 두 사람에게 방을 내어 주었다. 혹시나 여운이 불편할까 주변의 객잔으로 가겠냐 물어도 그는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언제쯤이면 누님 얼굴을 뵐 수 있을까?”

“금방 뵐 수 있을 거야. 조금 전에는 나한테 말도 하셨어.”

“진짜? 뭐라고 하셨는데?”

“널 빨리 만나고 싶다고.”

그의 덤덤한 목소리에 마음 깊은 곳까지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청연은 몇 번이고 그에게 고맙다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어느새 날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기녀들이 방으로 가져다준 저녁상에는 술 한 병이 포함되어 있었다. 청연이 술을 따라 마시려고 하자 엄한 눈빛이 따라붙었다.

“나는 마시면 안 되겠구나.”

여운의 표정을 읽은 청연은 술병에서 손을 떼어 냈다. 어렸을 때야 몰래 술을 마셔도 모르는 척 넘어가 주고는 했지만, 몸이 안 좋아진 뒤에는 늘 이렇게 저지당했다.

“그나저나 원하는 게 뭔데? 이제 말해 줄 때도 됐잖아.”

청연이 묻자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말하기 어려운 거야?”

“…세화야.”

“응?”

“그대로 있어.”

그대로 있으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기도 전에 여운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이어서 입술 위에 말랑한 것이 닿았다. 아주 잠시 포개어졌던 두 입술이 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

“…….”

방 안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눈알을 굴리던 청연은 용기 내서 물었다.

“그거였어?”

“미안.”

“아니, 그… 미안할 건 아닌데…. 어? 야, 너 뭐해!”

여운은 갑자기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술병을 들더니 입으로 가져갔다. 화들짝 놀란 청연이 그를 말리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지체 없이 입 안에 술을 들이부은 그가 청연을 바라보았다.

“빨리 뱉어.”

청연은 여운의 얼굴 앞에 손을 들이밀었다. 그러나 그는 비장한 눈빛을 한 채 입 안에 머금고 있던 술을 꿀꺽 삼켰다.

“주독, 주독 빼. 얼른 내력으로 정화해. 너 술 못 마시잖아!”

그의 옷깃을 잡고 짤짤 흔들던 청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제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런….”

얘 주량 한 모금도 안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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