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화
‘우리 객주님이 사내를 좋아하신다니.’
해령은 탁자 위에 턱을 괸 채 청연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난번에는 객실 안에서 어떤 공자의 품 안에 폭 안겨계시더니, 이번에는 누군가를 기다린다며 객잔 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모습에 흥미가 돋았다.
안 그래도 며칠째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오라버니와 어디선가 나타난 아버지라는 작자 때문에 괴로웠는데 나름대로 주의를 환기할 만한 일이 생겨 다행인가 싶었다.
‘그때 끌어안고 있던 공자를 기다리시는 건가.’
제법 미인이던데.
출신은 모르겠지만 생긴 걸 봐서는 돈깨나 있어 보였다. 옷 입은 차림새도 그랬고. 그런 외모라면 객주님께서 푹 빠지신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렇다고 빈 객실에서 남몰래 밀회를 즐기실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어쩐지 혼사에는 영 관심이 없어 보이시더라니. 꽤 오랜 시간 동안 그를 알고 지냈지만 여인과 함께하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게 다 사내를 좋아해서 그랬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뭐, 어찌 됐든 알아서 좋은 사람 만나시겠지. 객주님은 좋은 분이시고 자기 앞가림 정도는 잘하실 테니까. 사내든 여인이든 그분이 품은 연정을 응원… 어라?
뜻밖의 광경을 목격한 해령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랑!”
문을 열고 들어온 백의의 남자. 그리고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반기는 객주님….
‘저번이랑 다른 사람인데?’
해령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린 채 그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지난번 그 공자 못지않게 빼어난 외모의 사내가 미소 지으며 청연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보는 사람 숨이 막힐 정도로 애틋한 분위기였다.
“저, 총관님.”
너무 몰입한 나머지 옆에서 어깨를 툭툭 치는 점소이의 부름 따위는 들리지도 않았다.
“저리 가봐. 좀 이따가 얘기해.”
“아니, 그게 아니라 이것 좀 드셔보시라고요.”
점소이는 해령의 앞에 그릇 하나를 내려놓았다.
“예전에 객주님께서 알려 주신 조리법대로 만든 건데 이름이 뭐였더라? 튀, 튀수? 옥수수를 기름에 튀긴 거래요. 아무튼 드셔보세요.”
해령은 청연과 의문의 사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튀수를 한 줌 집어 입에 넣었다. 하얀 알갱이들이 와그작 소리를 내며 입 안에서 부서졌다.
“오는데 안 힘들었어?”
“힘들긴.”
“목욕물 받아다 줄까?”
“내가 할게.”
다정한 눈길과 대화를 주고받는 그들의 모습이 마치 수십 년을 함께 산 부부 같았다. 해령은 눈을 빛내며 생각했다.
‘저쪽이 진짜 정인인가? 그러면 저번에 그 사람은 뭔데?’
설마… 설마 객주님께서 한 번에 두 명을?
“짐 있으면 이리 줘. 내가 방에 올려다 둘게.”
“괜찮아.”
“명색이 객잔 주인인데 손님맞이 좀 제대로 하게 해 주라.”
“됐어.”
“에이…. 아침은? 뭐 먹을래?”
“너 좋아하는 거.”
아무리 봐도 평범한 지인 같지는 않았다. 저들의 눈빛과 손짓은 분명 정인 사이에서나 가능할 법한 무언가였다.
그렇다면 저번의 그 남자는 뭐였을까. 그저 심심풀이 삼아 만나신 걸까. 아니면 설마 다수의 사내와 은밀하게 연정을 나누는, 그런 아슬아슬한 관계를 즐기시는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해령은 청연의 인간관계를 통째로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수상했다. 틈만 나면 객잔에 찾아와 청연에게 들러붙는 제하…. 그도 혹시…?
‘그래서 누가 진짜냐고.’
자꾸만 튀수에 손이 갔다. 입 안에서 바삭거리는 식감이 중독성 있었다. 해령은 열심히 턱을 움직여 튀수를 씹으며 머리를 굴렸다.
저 백의의 남자와 지난번 객실 안의 남자, 거기다 제하까지. 벌써 세 명이다. 또 있던가?
‘아!’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해령은 무릎을 탁 쳤다.
객주님께서 유독 믿고 따르는 사람. 제하의 스승님이 계셨지. 그분께서도 나름대로 유력한 후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진짜 정인인지 내기라도 한다면 나는 그쪽에 걸겠다.
거친 생각을 이어 가던 해령은 입맛을 다셨다. 짭짤한 튀수에서 왠지 모르게 쓰디쓴 사약의 맛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
청연은 여운을 비어있는 객실로 안내했다. 저번에 만난 뒤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의 얼굴을 다시 보니 즐겁고 가슴이 뛰었다.
“여기 온 소감이 어때? 객잔은 마음에 들어?”
“응. 그런데 네 방은?”
“내 방? 내 방이 보고 싶어? 이 방이랑 별다른 거 없는데.”
여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지내는 곳이니까….”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피하는 그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모습이 마치 열아홉 살, 그와 처음 정인 사이가 되었을 때와 비슷했다.
“그래. 보여 줄게.”
청연은 그를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별로 볼 건 없지만 그가 궁금해하니까. 방 안에 들어선 여운은 구석구석을 눈으로 훑어보았다.
“별거 없지?”
“생각했던 거랑 다르네.”
“응? 뭐가?”
“너 원래 정리 정돈 못했잖아. 그래서 주로 내가 청소했는데.”
“뭔 소리야. 나 깨끗한 거 좋아해서 매일 쓸고 닦는… 어?”
아닌가? 내가 정리를 못했던가?
머릿속이 뭔가 엉킨 듯한 느낌에 청연은 눈을 데굴 굴렸다. 그 와중에 여운은 계속해서 방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은 한쪽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약재들이었다.
“…….”
여운의 얼굴이 굳어지는 걸 발견한 청연은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나 예전보다 많이 건강해졌어. 걱정 안 해도 돼.”
“그래도….”
“아, 진짜 괜찮다니까?”
분명 속으로 자책하고 있을 것이다. 그동안 챙겨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느니 뭐라느니. 안 봐도 뻔했다. 생긴 거랑 다르게 미련해서는.
“이리 와봐.”
청연은 못 박힌 듯 서 있는 그의 팔을 질질 끌고 창가로 향했다. 창문을 열어젖히니 맑은 아침 하늘과 후원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후원도 근사하지? 처음엔 별거 없었는데 내가 열심히 가꿨거든.”
“직접?”
“응. 나무도 심고 꽃도 심고. 저쪽 별채에는 직원들이 살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창밖을 내다보던 여운의 표정이 한층 풀어졌다. 그는 청연에게 돌아서서 말했다.
“다행이다.”
“뭐가?”
“잘 지낸 것 같아서.”
“…너는 요즘 어떻게 지내?”
청연은 조심스러운 말투로 그의 근황을 물었다. 그곳에서 잘 지내지 못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저 상황이 더욱 나빠지지 않기만을 바랐다.
“가르치는 건 할만해?”
그의 질문에 여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는 어려서부터 가르치는데 소질이 있었어. 나도 너한테 맞으면서 배웠잖아.”
“그건….”
“농담이야. 그나저나 곤륜은 어때?”
청연이 묻자 여운은 어두운 표정으로 답했다.
“예전 같지 않아.”
이어진 그의 설명에 따르면 지난 몇 년간 꾸준히 보호세와 기부금 수입이 줄어들었다고 했다. 중원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근방의 인구 자체가 많이 줄어든 것이 원인이었다.
지리적 특성 때문에 지난 수십 년간 마교와 마찰이 잦았던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돈 많은 집 자제들은 청해에 남아있기보다는 사천이나 섬서, 호북으로 건너갔으니 속가제자의 수 또한 하락하게 되었다.
“그렇게 됐구나….”
“너한테 줄 게 있어.”
여운은 어깨에 메고 있던 무언가를 내려 청연에게 건넸다. 흰 천으로 둘둘 싸인 기다란 물건이었다.
“아….”
청연은 물건을 건네받자마자 그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손에 들린 무게감이 익숙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감각이었다.
천을 벗겨 내자 늘씬한 검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려하지도, 고상하지도 않지만 절제된 형태의 날카로운 검.
“이걸 용케 지켰네.”
청연은 검 자루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제가 곤륜에 있을 때 사용하던 검이었다. 이런저런 일에 휘말려 챙길 여유가 없었던, 그러나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던 물건이었다.
“고마워.”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청연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검을 검집에서 약간 뽑아보았다. 검 위에 각인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설화.’
여운의 검인 설운과 한날한시에 만들어진 쌍둥이 검이었다. 같은 모양의 검을 나눠 가진 뒤 각자의 이름을 한 글자씩 따서 지은 소중한 이름이었는데. 그와 함께 연무장에서 검법을 익히던 그 시절이 마치 엊그제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검을 바라보고 있을 때, 누군가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객주님!”
점소이의 목소리였다. 그는 손에 무언가를 든 채 문을 열고 들어왔다.
“왜? 뭔데?”
“객주님한테 서신 왔어요. 며칠 동안 목이 빠져라 서신만 기다리셨잖아요.”
점소이는 소중하게 쥐고 있던 종이를 건넸다. 서신을 받은 청연의 손이 긴장으로 움츠러들었다. 그를 바라보던 여운이 물었다.
“무슨 서신이야?”
“누님…. 누님한테 온 답신.”
얼마 전, 보화에게 서신을 써서 보냈다. 그간 잘 지내셨느냐, 이 아우를 잊으셨느냐 물으며 혹시 찾아가서 뵈어도 괜찮겠느냐고 운을 띄웠다.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여전히 그 기루에 머물고 계시는지 확실치 않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보낸 서신이었다. 그에 대한 답신이 도착한 것이다.
청연은 떨리는 마음으로 종이를 조금씩 펼쳐 보았다. 종이 위에 쓰인 첫 문장을 읽은 순간 긴장이 풀리고 입꼬리가 올라갔다.
‘여전히 그곳에 계셨구나.’
그러나 차분히 서신을 읽어 내려가던 청연의 표정은 다시 굳어졌다.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리는 그의 몸을 여운이 부축했다.
“세화야.”
“…….”
“왜 그래?”
“시랑.”
청연은 창백해진 얼굴로 여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누님이 돌아가실 것 같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