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화
“세화야.”
“너 진짜….”
청연이 말을 잇지 못하고 서 있자 여운이 다가와 그를 끌어안았다. 괜찮다며 안심시키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어깨가 떨려 왔다.
“그러라고 돌아가라고 한 게 아니잖아. 설마 거기 계속 남아 있는 것도 나 때문이야?”
재능이 특출난 여운이 문파에서 받던 특별대우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와 함께 산속에서 은거하던 때에도 사람이 찾아와 그에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돌아오면 죄를 용서하겠다고.
그런데 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벌을 받고 있었다니. 심지어 자신을 쫓지 않겠다는 약속에 매여 떠나지도 못했다니. 마음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어쩐지 비무대회 전대 우승자치고 명성을 날리지도 못했더라. 청연은 지금 그가 문파 내에서 어떤 위치일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아이들을 가르치기는 하나 스승의 칭호를 얻지 못하고, 문파에 속해있기는 하나 구성원 취급을 받지 못하는. 딱 그 정도.
“그런데 넌 왜 내 탓을 안 해….”
“너 때문 아니야. 내가 잘못했으니 벌 받는 게 맞아.”
위로하는 그의 목소리와 다독거림에도 우울감만 더해졌다.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던 청연은 고개를 들고 물었다.
“사부님은…?”
“그 후로 폐관 수련에 들어가셔서 못 뵀어.”
“아….”
제자 한 명은 파문당했고, 또 다른 제자는 그를 데리고 도망쳤으니 그들의 스승에게까지 비난이 쏟아졌을 것이다. 한숨을 내쉬는 청연이 비틀거리자 여운은 그를 의자에 앉혔다.
“밥부터 먹어. 여태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지금 밥이 들어가겠냐고….
청연은 열려있는 찬합을 바라보았다. 전부 자신이 좋아하던 음식들이었다. 여운은 좀처럼 먹으려고 하지 않아 입에 억지로 집어넣어야만 대충 씹어 삼키던 그런 음식들. 나중에는 군말 없이 함께 먹어주기는 했지만 말이다.
고개를 돌리자 이미 돌아서 약을 달이고 있는 여운의 뒷모습이 보였다. 예전과 같은 그 모습에 코끝이 시큰거렸다.
“시랑.”
“응?”
“피하지 않을게.”
그 말에 여운이 청연을 돌아보았다.
“네가 사천에 찾아와도…. 피하지 않을게.”
목소리에 죄책감이 듬뿍 섞여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여운이 다가와 손에 젓가락을 쥐여 주었다.
“일단 먹어.”
젓가락을 만지작거리던 청연은 결국 식사를 시작했다. 좋아하던 음식들인 게 분명한데 기분이 침울해 맛조차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한참이나 깨작거리고 있으려니 약을 달인 여운이 사발을 들고 걸어와 옆자리에 앉았다.
“입에 안 맞아?”
“아니야. 그냥 사천 음식에 너무 익숙해져서….”
“사천은 어때?”
“응? 뭐가?”
“사람은 좀 사귀었어?”
분위기에 맞지 않는 뜬금없는 질문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너는 내가 혼자 있는 걸 항상 걱정했었지. 정작 본인도 친구라고는 나밖에 없었으면서.
“응. 많이 사귀었어. 객잔 직원들이 날 얼마나 좋아하는데.”
“…얼마나?”
“아니, 내 말은 같은 동료로서 좋아한다고. 표정 풀어.”
“…….”
“자, 얼른. 웃어 봐.”
청연은 손을 뻗어 그의 입꼬리를 억지로 밀어 올렸다.
“예전에는 이렇게 하면 화냈는데. 이제 그냥 받아 주네?”
“그만해.”
“싫어. 너는 얼굴에 웃음기가 너무 없어. 이렇게라도 웃겨야지.”
여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청연의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고 밥이나 더 먹으라며 다시 젓가락을 쥐여 주었다. 기분이 조금 나아진 청연은 그가 원하던 대로 젓가락질을 했다.
“시랑, 그때 기억나?”
“언제?”
“우리 싸우고 나란히 벌 받았을 때.”
“그게 한두 번이어야지.”
“왜, 있잖아. 같이 도덕경 필사했을 때.”
“아.”
문득 떠오른 어린 시절의 기억에 청연은 미소 지었다.
“그때 네가 오만상을 쓰고 있길래 내가 네 종이에 웃는 얼굴을 그렸잖아. 좀 웃으라고.”
“…….”
“그랬더니 네가 버럭 화내면서 종이를 찢어버렸지. 결국에는 둘 다 또 혼나서 처음부터 다시 필사하느라 밤을 새웠고.”
“기억나.”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종이에다가 안 그리고 네 손등에다가 그렸는데. 이상하게 그때는 화 안 내더라?”
청연은 여운을 힐끔 바라보고는 물었다.
“너 혹시 그때도 나 좋아했어?”
“…맞아.”
“와, 설마설마했는데 진짜야? 그게 언제였더라. 내가 열여섯 살 땐가? 맞지?”
“맞아.”
“이제야 솔직하게 답하네. 너 원래는 나 열아홉 살 때부터 좋아했다고 그랬잖아. 우리 처음 접문했을 때.”
“거짓말이야.”
“엉큼하기도 하지. 어려서부터 나한테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다니.”
청연은 킥킥 웃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여운이 슬며시 손을 잡아 왔다. 그는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좋아했어.”
“인제 와서 새삼스럽게 고백을 한다고? 나도 알아.”
“한 번도 제대로 말해 준 적 없는 것 같아서 후회했어.”
순간 말문이 막힌 청연은 그의 눈을 응시했다. 세상에 저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다는 듯이 제 모습을 가득 담고 있는 두 눈동자가 보였다.
“세화야.”
“응?”
“당분간 여기서 지낼래?”
“…안 된다는 거 알잖아.”
청해에 온 것만 해도 아주 무모했다. 사실 청연은 하루빨리 사천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여운과 함께 있는 건 좋았지만 오래 머물기에는 위험했다.
“오늘 안에 떠나야 할 것 같아.”
“그렇게 일찍?”
“응. 그러니까 네가 만나러 와. 사천으로.”
“…알겠어.”
사천으로 만나러 오라는 말이 조금은 위로가 된 것인지 여운은 수긍했다. 그러더니 짐짓 심각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대신 바로 사천으로 가. 다른데 들르지 말고.”
“왜?”
청연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게… 요즘 정세가 심상치 않아.”
“무슨 말이야?”
“청해와 감숙 여기저기서 시신 몇 구가 발견됐는데….”
“시신?”
청연은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젓가락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중원에서 시신이 발견되는 거야 흔한 일이지만, 저렇게 심각하게 말을 꺼내는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시신에 이상한 점이라도 있는 거야?”
여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강시를 만들려던 흔적이 있어.”
“…뭐?”
“주술을 걸다 실패한 모양이야. 전혀 썩지도 않았고, 피부에 파랗게 핏줄이 돋아 있었어.”
“…….”
“게다가 이미 죽은 사람에게 시전한 게 아니라, 산 사람에게 주술을 거는 과정에서 죽은 것 같아.”
청연은 할 말을 잃었다. 갑자기 강시라니. 원작에서 그런 게 나왔던가?
“아직 몇 구 안 나왔으니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아무튼 너도 조심해. 되도록 혼자서 돌아다니지 말고.”
“으응….”
여운은 그러면서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등을 쓰다듬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진 청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누가 그런 건지는 모르지?”
“모르지만… 그런 짓을 할 곳이 마교밖에 더 있겠어?”
“어? 아니야.”
청연은 당황하여 손을 휘휘 저으며 부정했다.
“그거 마교 아니야.”
“그걸 어떻게 알아?”
“…….”
이상하다는 듯이 묻는 여운의 질문에 마땅한 답을 찾지 못했다. 스스로도 그걸 부정할 만한 이유를 댈 수 없었으니까. 그저 무호가 그런 일을 벌일 리 없다는 생각만 들었다.
무호는 이미 원작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심지어 악인으로 표현되었던 원작에서도 강시를 만드는 사술 같은 건 손도 대지 않았다. 그가 중원을 지배하는데 필요했던 건 오로지 무력뿐이었다.
무협 세계관에서 강시를 만드는 단체라면….
청연은 고민 끝에 물었다.
“혹시 이 근방에 혈교가 있어?”
그러자 여운은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혈교? 수십 년 전에 사라졌잖아.”
“어? 사라졌다고?”
“지난 정마대전 일어나기도 전인가? 마교에 패해서 사라졌어.”
“…….”
“몰랐어?”
그렇다면 혈교가 아닌가. 마교도 아니고 혈교도 아니라면 누가 강시를 만들려고 하는 거지.
청연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
아쉽지만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청연은 여운과 함께 방을 나섰다. 미리 불러둔 마차가 객잔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금방 만나러 갈 테니까 기다려.”
“응. 기다릴게.”
여운과 작별 인사를 나누던 청연은 어디선가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맞은편 골목에서 제하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조금 난처해 보이는 표정의 도경도 함께였다.
“시랑, 잠깐만 여기 있어봐.”
응원하러 가지 못했으니 만나면 꼭 사과하려고 했는데, 먼저 찾아와서 지켜보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이쪽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눈빛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청연은 식은땀을 흘리며 그에게로 급히 다가갔다.
“제하야.”
“…….”
“제하야. 내가 미안해. 일이 있었어.”
어째서 너한테는 항상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게 되는 건지.
말없이 청연을 내려다보던 제하의 눈길이 마차 앞에 서 있는 여운에게로 향했다. 그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이번에는 또 무슨 비밀입니까. 처음 보는 낯선 사내와 밤새 함께 계시다니요.”
“뭐? 아니, 그게 아니라….”
“저는… 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객주님께서 무얼 그리 숨기시는 건지.”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슬프게 들렸다. 청연의 변명조차 들으려 하지 않은 제하는 이윽고 몸을 돌려 휭하니 떠나버렸다. 그의 뒷모습에서 힘없이 축 늘어진 귀와 꼬리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