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8화
협박은 며칠간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말로만 위협하는 수준이었으나 날이 갈수록 행동이 거칠어져 결국 가구까지 부서지기 시작했다. 세화는 그들이 찾아올 때마다 눈에 불을 켜고 노려보았지만 누님들에게 가로막혀 어떠한 대응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아픈 몸이 빨리 낫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저놈들이 저렇게 설치는데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뭘 어떻게 할 건데. 관아에 신고해봤자 소식 전하는 데만 해도 한참 걸릴 테고.”
기루는 중원의 중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청해에서도 서쪽에 위치했다. 관의 영향이 미치기 어려운 곳이라 자경단이 활동하고 있었지만 흑도 무리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얼마 전에 저기 사거리 쪽 객잔 주인도 갖고 있던 전 재산을 보호세로 뜯겼다잖아. 평생 모은 돈을 다 잃고 앓아누웠대.”
어떻게 인간이 되어서 다른 인간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을까. 세화는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남의 목숨을 빼앗는 놈이든 돈을 빼앗는 놈이든, 힘만 믿고 설치는 놈들은 천벌을 받아야 마땅했다.
그러나 하늘은 그들에게 벌을 내려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세상은 언제나 강자의 편이었다. 약자는 그저 그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내어 준 채 가느다란 목숨줄 하나 붙들고 버티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럼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일단 버텨보고… 정 안되면 원하는 대로 해 줘야지 별수 있겠어?”
“정화 누님 재산을 저놈들한테 넘겨준다고요. 그렇게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나도 그러고 싶지 않지만 어쩌겠어. 저 사람들이 기루 차지하게 되면 나는 여기 그만둘 거야.”
“그만두면 어디로 가시게요? 호북?”
“응. 몇 년 전부터 그쪽에서 오라고 했으니 지금 가도 늦지 않았을 거야. 그러니까 우리 같이 가자. 내가 잘 말씀드리면 너도 받아 주시겠지. 여기서 안 좋은 기억 끌어안고 사는 것보다는 그게 낫지 않겠어?”
“저는….”
세화는 선뜻 그러겠다고 답할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곳에서 태어나 십오 년을 살아왔다. 좋든 나쁘든 살아온 모든 기억이 이곳에 있는데 다른 지역으로, 그것도 머나먼 호북 땅으로 터전을 옮겨 가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최근 들어 신경 쓰이는 일이 하나 더 생긴 참이었다. 이제야 여운과 막 친해지려는 기미가 보였는데, 루주님이 돌아가신 뒤 그의 머리카락 한 올 보지 못한 데다가 그를 두고 멀리 떠나가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했다.
“가시려면 누님 혼자 가세요. 아니면 다른 누님들을 데리고 가시든가요. 저는 청해에 남겠습니다.”
“뭐? 네가 여기 남아서 뭐 하겠다고. 설마 저 사람들 밑에서 일하려고?”
“…그럴 리가요.”
뭐라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봐야죠.
여운을 기다리느라 종일 창밖만 바라보던 세화는 결국 아픈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갔다. 많이 바쁜 건지, 아니면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지. 혹시 제가 정신없이 드러누워 있는 동안 만나지 못해서 인연이 끊겼다고 생각해 찾아오지 않는 건지.
몸만 멀쩡했다면 표국 앞에서 기다렸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 가면 쓴 놈이 더욱 원망스러웠다.
세화는 손가락에 낀 반지를 매만졌다. 둘레가 살짝 남아 만지기만 해도 옆으로 돌아갔다. 조금 더 나이를 먹어 키가 자라면 반지도 잘 맞으려나. 고민하던 세화는 반지에 끈을 매달아 목에 걸었다.
목에 걸어 소중히 간직할 것이다. 맞지 않는 큰 반지를 끼고 다니다가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보화 누님께 빌린 책을 읽던 세화는 머지않아 잠이 들었다.
***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란에 감았던 눈이 번쩍 뜨였다. 어두운 방 안을 가득 채운 매캐한 연기가 들숨을 타고 폐 속까지 흘러들어왔다. 세화는 옷소매로 코와 입을 막고 쿨럭거리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썼다.
연기를 얼마나 마신 건지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간신히 침상에서 일어난 그는 비틀거리며 문으로 다가갔다. 문틈 사이로 붉은빛과 함께 데일 것 같이 뜨거운 열기가 전해져 들어왔다.
세화는 어지러운 머리를 벽에 기댄 채 밭은 숨을 내쉬었다. 정신이 몽롱했지만 어렴풋이 깨달았다. 기루가 불타고 있었다.
누구의 짓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매일 찾아와 기루를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리던 그놈들 중 하나일 것이다. 뜻대로 되지 않으니 다른 방파에서 차지하지 못하도록 태워 버리기로 작정했을 터였다.
거친 욕지거리를 내뱉던 그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얼른 누님들을 챙겨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했다.
세화는 뜨거워진 문을 세게 걷어찼다. 불과 얼마 전에 다친 다리에 충격이 전해져 왔지만 그런 건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마침 불씨가 옮겨붙어 타들어 가기 직전이었던 문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갔다.
“세화야!”
제 이름을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치 않은 몸을 휘청거리며 방에서 나가려던 세화는 화염에 앞길이 가로막혀 멈칫했다. 자꾸만 터져 나오는 기침 또한 참기 어려웠다.
“세화야!”
“누님….”
보화의 목소리였다. 세화는 몸을 최대한 낮춘 채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불길을 뚫고 나아갔다. 사색이 된 얼굴로 달려오던 보화와 마주치고 나서야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누님…. 다른 누님들은….”
“괜찮아. 다들 나갔어. 우리도 빨리 가자.”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의지한 채 불타는 건물을 빠져나갔다. 끓어오르는 열기와 불이 타닥타닥 번져가는 소리만이 그 자리에 남았다.
신선한 밤공기를 마실 수 있게 되었을 때쯤엔 불을 끄기 위해 물을 동이째로 들이붓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미 걷잡을 수 없게 커진 불길이었지만 어떻게든 잠재우고자 아등바등 매달리는 그들의 마음을 백번 이해할 수 있었다.
집이었고 일터였다. 십여 년을 살아온 보금자리였다. 이제는 주인조차 잃고 남의 손에 넘어가게 생겼지만 오랜 추억이 깃든 곳이었다. 가족이라고 이름 붙인 낯선 이들과 동고동락해온 모든 세월이 거기에 있었다.
그래서 손을 보탤 수밖에 없었다. 이미 늦었다는 걸 알면서도 가만히 손 놓고 있는 건 떠난 정화 누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화염은 밤하늘을 밝혔고 지붕은 점차 무너져 내렸지만 포기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렇게 날이 밝았다. 밤새 불타던 기루는 시커멓게 그을린 기둥만을 남기고 연소되었다. 마찬가지로 온몸에 그을음을 잔뜩 묻힌 사람들은 지친 몸으로 거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세화는 담벼락에 등을 기대어 앉은 채 흔적만 남은 기루를 바라보았다. 이로써 모든 걸 잃었다. 떠난 이들을 추억할 공간도, 저자에서 시간을 보내다 해가 저물면 돌아갈 집도. 모두 사라졌다.
정화 누님의 시신을 보았을 때와 비슷한 탈력감이 들었다. 세상이 이러면 안 되는 거였다. 착실하고 선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만 이토록 피해를 보고 상실을 겪어야 한다니. 도사들이 말하는 원시천존이라는 신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달려가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다.
“누님이 이 꼴을 보셨으면 뭐라고 하셨을까요….”
잠긴 목소리로 읊조리던 세화의 눈앞이 뿌옇게 차올랐다. 더 이상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저보다 더 힘들지도 모르는 누님들 앞에서 눈물이나 짜내는 게 참으로 철부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화는 눈물이 흘러내리기 전에 소매로 거칠게 닦아 냈다. 빨갛게 달아오른 피부가 쓰라렸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어와 물기를 말려 주기 무섭게 눈가는 다시 축축해졌다. 한 번 더 소매로 얼굴을 닦으려 할 때, 누군가 다가와 그의 눈앞에 하얀 천을 들이밀었다.
희고 깨끗한, 티끌 하나 묻지 않은 손수건이었다. 한 귀퉁이에는 검은 실로 자수가 놓인 부드러운 손수건. 세화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왜 이제 왔어?”
저도 모르게 원망 서린 말이 튀어나왔다. 세화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여운을 노려보며 울음기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왜 이제 와?”
말없이 세화를 내려다보던 여운은 맞은편에 무릎을 꿇고 앉으며 손수건으로 그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부드러운 천이 얼굴에 닿자 참고 또 참았던 울분이 터져 나왔다.
“너,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알아? 그동안 뭘 하다가 이제 와? 어?”
“…….”
“그냥 오지 말지 그랬어. 여기서 너만 기다리다가 죽어 버리게.”
의미 없는 화풀이라는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기다리지 말라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멋대로 기다린 건 저였다. 다만 지금 누구에게라도 화를 내지 않으면 속이 곪아 정말 죽을 것만 같았다.
“가. 이제 안 기다릴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너 갈 길 가.”
세화는 그의 손을 쳐내며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그에게 이런 꼴을 보인다는 게 너무나도 비참해 참을 수 없었다. 불에 타버린 기루에, 몸에 잔뜩 묻은 그을음에. 심지어 애처럼 우는 모습이라니. 차라리 모르는 척하고 지나가 주었으면 했다.
그러나 여운은 끝까지 세화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들썩이는 어깨 위에 내려앉은 흰 손이 서툰 위로를 건넸다. 느릿하게 어깨를 토닥이던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안해.”
“가….”
“미안해.”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미안하다 사과하는 그의 목소리가 서늘한 바람마저 막아 주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