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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객잔 정상 영업합니다 (67)화 (68/145)

067화

세화는 며칠이 지나서야 의식을 되찾았다. 그가 깨어났을 땐 온몸에 붕대를 감은 채였다. 침상 옆에 앉아 있던 보화가 퉁퉁 부은 눈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세화야, 정신이 들어?”

그 말에 대꾸하려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목소리는커녕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마치 온몸이 녹아내리는 듯한 통증이었다. 그런데도 세화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안간힘을 썼다.

“가만히 있어, 제발…. 너 많이 다쳤잖아.”

어쩔 줄 모르는 보화의 손이 허공에서 우왕좌왕하며 세화를 달랬다. 일어나지 못하게 누르고 싶지만 차마 손댈 수 있는 곳이 없어 주저하는 몸짓이었다.

세화는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부러진 팔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도 일어나야 했다. 일어나서 그 사람을 쫓아야만 했다.

눈물이 흘러내리는 미세한 자극에도 피부가 타는 듯이 아팠다.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빠르게 뛰었고 호흡이 가빴다. 몇 번이고 발버둥 치던 그의 눈앞이 다시 깜깜해졌다. 제정신으로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에 저도 모르게 정신을 잃은 것이다.

그는 몇 번이고 깨어났다가 다시 기절하기를 반복했다. 잠시 눈을 뜰 때마다 침상 위에서 몸부림치며 난동을 부리는 탓에 누님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가 떨어져 다치기라도 할까 염려하던 기녀들은 시간을 정해 돌아가며 그의 곁을 지켰다.

그랬던 세화가 잠잠해진 건 마침내 그 남자를 쫓기엔 늦어 버렸다는 걸 자각했을 때쯤이었다. 의식이 돌아온 그는 그저 천장을 바라보며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 있는 모습이 오히려 주변인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세화야.”

“…….”

“다 나을 때까지 누워 있으려면 지루할 테니까 누님이 책 읽어 줄까? 너 이거 좋아했잖아.”

“…….”

“고개라도 끄덕여 봐, 응? 세화야….”

애처로운 목소리가 울렸으나 그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공허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세화는 며칠이 더 지나고 나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텅 빈 눈동자와 갈라진 입술이 보화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누님….”

“응, 뭐 필요한 거 있어? 물 줄까?”

“정화 누님은요?”

보화는 한숨을 내쉬며 어느새 수척해진 세화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미 장례까지 마친 지 오래라는 걸 알면 더더욱 상심할 텐데.

“말씀해 주세요…. 이미 끝난 겁니까?”

“그게….”

“누님.”

“잘 보내 드렸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너도 몸 회복하고 나면 같이 인사드리러 가자.”

그 말을 들은 세화는 또다시 몸을 벌떡 일으키려고 했다. 보다 못한 보화는 그의 어깨를 꾹 눌러 침상에 눕혔다. 그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자꾸 이러면 루주님이 더 속상해하시는 거 몰라? 얼른 나아야지. 너도 루주님 뒤따라가고 싶은 거 아니잖아.”

“제가… 제가 어떻게….”

“세화야.”

“제가 어떻게 정화 누님 뒤를 따라갑니까. 저는 죽어서도 그분 얼굴 못 봅니다.”

세화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은 베개를 축축하게 적셨다.

“그런 일을 당하시는 동안… 저는 철없이 밖에서 놀고 있었는데… 제가 기루에 있었다면… 몰래 나가지만 않았다면….”

“네 잘못 아니야.”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보화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함께 엎어져 울고 싶었지만 기루 안의 모두가 슬픔에 잠긴 이때, 저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지 싶었다.

한참이 지나 흐느끼는 소리가 잦아든 후, 보화는 품속에서 작은 나무 상자를 하나 꺼내 세화에게 보여 주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세화는 잔뜩 쉬어 버린 목소리로 물었다. 왼팔을 들어 올려 상자를 받으려 했지만 팔에 힘이 없어 금세 툭 떨어지고 말았다.

“루주님께서 너 조금 더 크면 선물하려고 준비해 두신 거야.”

“정화 누님이요?”

“응. 예전에 나한테 보여 주신 적이 있거든. 유품 정리하다가 발견해서 가지고 왔어.”

제 입으로 뱉은 유품이라는 단어에 잠시 멈칫한 보화는 마음을 가다듬고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은반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가운데에 박힌 홍옥이 영롱한 빛을 내뿜는 반지였다.

“이게 웬 반지입니까?”

“사실은 루주님께서 너희 엄마한테 주려고 하셨던 선물인데 예화 언니가 그 전에 그렇게 되는 바람에…. 그래서 그냥 묵혀 두셨대. 너는 남자애고, 주방에서 일할 애니까 선뜻 넘겨주기 망설여지셨나 봐.”

“…….”

“그래도 마냥 보관해 놓는 것보다는 누군가 쓰는 게 낫겠지 싶어서 크기도 늘려 오셨대. 한번 껴 볼래?”

보화는 세화의 손을 살며시 들어 올려 반지를 끼워 주려고 했지만, 그의 손은 이미 붕대에 칭칭 감겨 있어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짧게 한숨을 내뱉은 보화는 반지를 도로 상자에 넣고 침상 머리맡에 소중히 올려 두었다.

“이제 네 거야. 루주님 유품이기도, 너희 엄마 유품이기도 하니까 잘 가지고 있어.”

“제가 이런 걸 받아도….”

“네가 아니면 누가 받아? 그냥 버려?”

“…….”

세화는 눈길을 돌려 열려 있는 상자를 바라보았다. 반지 표면에 촘촘하게 새겨진 꽃들 가운데 홍옥이 눈부시게 빛났다. 모친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붓을 들고 시가를 써 내려가던 고운 손에 꽤 잘 어울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님도 참…. 제 어머니가 그토록 그리우셨습니까? 이런 걸 여태 가지고 계실 만큼?’

두 분은 이제 만나셨을까요. 세화는 여기 이 반지와 함께 남겨졌는데.

책을 읽어 주는 보화의 목소리만이 방 안에 부드럽게 울렸다. 말없이 반지를 바라보던 세화는 눈을 감았다.

***

그가 다시 걸을 수 있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직 뼈가 제대로 붙지 않았음에도 무리해서 몸을 일으킨 탓에 회복 속도가 더뎠다. 그래도 가만히 누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조금씩 움직일 수 있게 된 세화는 그제야 잊고 있던 사람을 떠올렸다. 여운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를 못 본 지 한참이었다. 정화 누님이 돌아가시고 저도 많이 다쳤으니 그에 대해서는 생각할 겨를도 없어 잊고 있었다. 혹시 또 기루 앞에 찾아왔다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간 건 아닐까 생각하니 마음이 쓰였다.

“누님, 혹시 기루 앞에 웬 남자애 하나 오지 않았습니까? 제 또래인데 얼굴도 하얗고 옷도 하얗고….”

“아니? 네 또래 애가 기루에 올 일이 뭐가 있어. 너 친우도 없잖아.”

“친우가 없다니요. 이 동네 애들이 저랑 친해지고 싶어서 서녕까지 줄을 섰습니다.”

“얘가 몸 좀 나았다고 입 산 것 봐.”

그래도 기운 없이 축 처져 있는 것보다는 낫다, 하며 보화는 세화를 부축해 일 층까지 내려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세화는 의자를 하나 끌어다가 바깥 거리가 잘 내다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동안 여운이 저를 찾았을지는 모르는 일이었고 어쩌면 이미 잊었을 수도 있지만, 만에 하나 그가 저를 만나러 온다면 꼭 이 자리에 있고 싶었다.

이렇게 많이 다쳐 아픈 와중에도 네 생각을 했다고 말하며 허풍을 떨고 싶었다. 그러면 그 애는 무슨 표정을 지을까. 또 노려볼까, 아니면 얼굴을 붉힐까.

마음이 힘든 와중에도 그 애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왔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세화는 한참을 기다렸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여운은 코빼기조차 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기루를 찾아온 사람들이라곤 시꺼먼 옷을 입은 남자들이 다였다.

세화는 그들을 멀찍이서 노려보았다. 그동안 보화에게 익히 설명을 들어 알고 있었다. 루주님께서 돌아가신 뒤 흑도 방파들이 자꾸만 기루에 사람을 보내온다는 것이었다.

몽연루는 그 규모가 제법 컸지만 그간 루주 한 명이 모든 운영을 책임지고 있었다. 정화 누님께선 그 흔한 총관 한 명 두지 않은 채 혼자서 자금 운용을 관리하시고 기녀의 역할 또한 충실히 수행하셨다.

그러던 분이 갑자기 돌아가셨으니, 게다가 재산을 물려줄 후손조차 없으니 이 기루의 소유권이 허공에 붕 떠 버린 것이다. 원래대로였다면 관아의 소유로 넘어갔어야 하나, 주변 흑도 방파에서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며 찾아오기 시작했다.

루주가 고용하였던 낭인이 이전에는 자신들의 방파 소속이었다며 그에 해당하는 보호세를 내라고 강요하거나, 그걸로도 모자라서 밀린 보호세를 갚으려면 기루의 소유권을 넘기라는 식이었다. 그들은 소유권 이전에 동의하는 서약서에 루주의 직인을 찍으라고 주장했다.

좋게 말해서 주장이었지 사실은 협박에 가까웠다. 기루를 넘기지 않는다면 무슨 짓이든 저지르겠다는 협박.

세화는 눈에 불을 켠 채 그들을 지켜보았다. 몸만 멀쩡했다면 달려들어 흠씬 패 주었을 텐데. 다시는 얼쩡거리지 못하도록.

그의 눈빛을 읽은 보화는 앞을 가로막고 엄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꿈도 꾸지 마. 너 지금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데다 저쪽 머릿수가 몇 명인데. 또 싸움 벌였다간 진짜 죽어, 너.”

“하지만 저놈들이 감히….”

“루주님이 뭐라고 하셨는지 기억 안 나? 응?”

“…….”

세화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기회만 된다면 저놈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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