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6화
비명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이 층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계단 위쪽으로 집중되었다. 세화는 다른 건 생각할 틈도 없이 곧장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그러면서도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어 마음이 짓눌리는 듯했다.
가면을 쓴 남자에게서 진한 피 냄새가 났다. 게다가 그 사람은 루주님의 손님이라고 했고, 루주님의 방은 이 층. 그렇다면 설마….
이 층 복도에 들어선 세화는 뜀박질을 멈췄다. 저 복도 끝 문이 열린 방에서 어스름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직 끊이지 않은 비명도 함께였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저 방은 정화 누님 방인데.’
이상하게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선 채로 하염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는 느낌이었다. 그사이 뒤늦게 달려온 무사들과 기녀들이 세화를 지나쳐 열려 있는 방 안으로 향했다.
“루주님!”
방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외쳤다. 이윽고 울음 섞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의원! 가서 의원을 불러!”
“하, 하지만 이미….”
“빨리!”
세화는 덜덜 떨리는 걸음으로 한 발 한 발 나아갔다. 이 복도의 끝에서 마주하게 될 진실이 두려워 좀처럼 속도가 붙지 않았다. 만약 정화 누님이 그놈에게 당한 거라면… 그럼 어떻게 해야….
“세화야!”
마침 방 안에서 뛰어나온 보화가 세화를 붙들었다. 눈물로 엉망진창이 된 얼굴이었다. 그는 세화를 끌어안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보지 마, 세화야. 들어가면 안 돼.”
“누님, 그래도 저는… 확인을….”
“안 돼!”
앞으로 나아가려던 세화의 어깨를 밀쳐 내는 손이 매웠다. 그 손길에 힘없이 주저앉은 세화는 결국 보고야 말았다. 방바닥 가득 고여 있는 핏물을.
그는 무릎으로 기어 문 앞까지 다가갔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모두 붉은색이라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붉은 꽃이 잔뜩 피어난 들판에 서 있는, 그런 꿈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현실은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칼로 난도질당한 육신과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온 것들이 세화에게 일러 주는 듯했다. 평생 금을 타고 노래를 부르든, 주방 일을 하며 평범하게 살아가든, 결국 강하지 못하다면 저 사악한 놈들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자유롭게 날아가던 꽃잎도 갈기갈기 찢어질 거라고.
세화는 창백하게 굳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까지도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사람이 차마 눈도 감지 못한 채 허망하게 떠나 버렸다. 이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세상을 뜰 거라는 걸, 누님은 알고 계셨을까.
“이렇게 가실 거면 왜 그리도 열심히 사셨습니까?”
세화는 타박하듯이 중얼거렸다. 왜 하필 내게 잘해 주셔서 친누님처럼 의지하게 만들어 놓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 버리십니까.
“가족이라는 말이라도 마시지.”
그 말 때문에 나는 벌써 세 번째로 가족을 잃었잖습니까.
슬프지 않았다. 그저 허탈했다. 인생이란 게 이리도 짧은 것이고 목숨이란 게 이리도 쉽게 거두어지는 것이라면 아등바등 살아 봐야 무슨 소용인가. 쉽게 가족이 되고 쉽게 떠날 거라면 차라리 혼자가 낫지 않을까.
이런저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던 세화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넋 놓고 가만히 앉아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지금 당장 가야 할 곳이 있었다.
“세화야, 너 어딜 가려고… 세화야!”
사람들의 울음소리를 뒤로한 채 복도를 따라 걸었다. 보화의 간절한 외침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상하게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여느 때보다 맑은 정신이었다. 그는 이제 제가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었다.
그 가면 쓴 놈을 잡아 죽이는 것. 그거면 충분했다.
***
세화는 남자가 사라진 방향으로 미친 듯이 달렸다. 이미 해가 저물어 밤이 깊었지만 상관없었다. 어떻게든 그를 찾아내 칼로 찌를 것이다. 그가 누님께 했듯이.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칼날은 이날을 위해 잘 벼려져 있었다. 아버지가 생전에 쓰시던 걸 물려받은 이후 이토록 강한 원한이 담긴 적 없는 물건이었다.
아직 늦지 않았기를, 그를 찾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단검을 고쳐 잡았다. 그를 놓친다면 누님께서 편히 눈을 감지 못하실 것이다. 저 역시도 죽어서 누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할 테고.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어두운 골목길, 저 멀리서 느긋한 발걸음으로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방금 사람을 죽였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할 만큼 여유로운 그 모습에 부아가 치밀었다.
세화는 검을 든 채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를 죽여야겠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 차서 마음이 조급했다. 저를 돌아보지도 않고 걸어가는 그의 등을 찌를 요량이었다. 그다음엔 배를 가르고, 그다음엔 심장을 찌를 것이다. 그때까지 멈추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검을 찔러 넣으려던 순간, 남자가 한쪽 어깨를 틀어 옆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겨우 손가락 두 개로 검날을 잡아채며 세화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 단단하게 끼워진 검날이 빠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너는… 기루의 그 아이인가.”
차가운 목소리였다. 동시에 흥미로워하는 듯한 웃음소리도 섞여 있었다. 검을 빼내려고 낑낑대던 세화는 참지 못하고 그의 가면 쓴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그러나 주먹이 닿기도 전에 그의 손바닥이 먼저 세화의 가슴을 내리쳤다. 가볍게 툭 치는 듯한 손짓임에도 마치 뼈가 부러지는 것 같은 충격이 전해져 왔다. 세화는 순식간에 일 장 밖으로 밀려났다. 쿨럭하는 기침과 함께 입 속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왜… 왜 그랬어…. 누님한테 왜….”
거친 호흡에 목소리도 애달프기 짝이 없었다. 이러려던 게 아닌데. 겨우 한 대 맞고 이렇게 무너지려던 게 아니었는데.
“그 기녀 말이냐?”
남자는 빼앗은 단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한 걸음씩 다가왔다. 가면 뒤에서 새어 나온 비웃음이 낮게 울려 퍼졌다.
“글쎄. 오늘따라 마음에 안 드는 짓만 골라서 하더구나. 가면 벗은 얼굴을 보여 달라나 뭐라나. 그렇게 주제넘은 것들은 영 거슬려서 말이지.”
“겨우… 그거라고?”
무슨 대단한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겨우 얼굴 보여 달라는 한마디에 사람을 그 지경으로 만들었다고?
눈가에 뜨거운 것이 흘렀다. 누님의 창백한 얼굴을 보았을 때도 흐르지 않던 눈물이 그제야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투명한 액체가 뺨을 타고 턱까지 흘러 뚝뚝 떨어졌다.
“당신이 뭔데…. 다, 당신이 뭔데 내 누님을… 내 가족을….”
히끅거리는 통에 뭉개지는 목소리가 원망스러웠다. 하필 이 사람 앞에서 이러면 안 되는데. 그렇게 생각한 세화는 소매로 눈물을 닦아 내고 다시 한번 달려들었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여기까지 그를 찾아오기 전부터, 어쩌면 기루에서 그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제가 범접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사람이다. 그를 찌르겠다고 생각한 것조차 우스워질 정도로.
뼈가 부러지고 피가 흐르는 감각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런데도 처절하게 매달렸다. 이대로 보낼 수 없었다. 누님에게 그런 짓을 저지른 자를 이대로 보낸다면 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몇 대를 맞아도 괜찮으니까, 저 사람을 찌를 단 한 번의 기회라도 주어진다면….
그가 들고 있는 단검을 빼앗으려던 세화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딱딱한 돌바닥에 구덩이가 파였고, 그 충격을 고스란히 흡수한 몸이 부르르 떨리다가 축 늘어졌다.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온몸의 뼈가 부스러진 느낌이었다. 세화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려 머리맡에서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의 가면을 노려보았다.
“누님 뒤를 따라가고 싶은 모양이구나.”
“너… 허억… 너 죽이기 전까지는… 안 가….”
한마디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입 안에서 피가 차오르다가 흘러넘쳤다. 남자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낮게 웃더니 말했다.
“나와 같은 부류인 듯한데.”
“…….”
“이대로 죽이기엔 아깝구나. 나를 따라오겠느냐?”
같은 부류라니. 따라오라니. 세화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한마디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그를 찌르지 못했다는 사실에 속을 끓이며 중얼거렸다.
“죽여… 버릴 거야….”
“꿈도 크지. 보아하니 다음에 또 만날 일이 생길 것 같구나. 어디 그때 다시 시도해 보거라.”
그러면서 남자는 세화의 단검을 빙글빙글 돌렸다.
“싸구려치고는 꽤 좋은 무기인데. 이건 기념으로 내가 가져가마.”
“아, 안….”
“그럼 다음에 보자꾸나.”
남자가 돌아섰다. 그를 잡아야 했다. 어떻게든 잡아서 고통받게 만들어야 했다. 세화는 있는 힘을 다해 몸을 뒤집으려 했다. 사지가 말을 듣지 않았고 끊어질 것 같은 통증이 온몸에 번졌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몸을 뒤집어 엎드린 자세가 된 그는 꿈틀거리며 바닥을 기었다. 성한 곳이 하나도 없어 몸통과 이마로 땅을 짚어 가며 간신히 몸을 움직였다. 여기저기서 흘러나온 피가 땅 위에 길을 그렸다.
세화는 그나마 움직이는 왼팔을 뻗어 남자의 발목을 붙잡았다. 뒤틀린 다섯 손가락의 손톱이 빠져 흉측한 모양새였다. 그저 손아귀 힘으로 그의 발목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죽여 버릴… 거야….”
남자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잡히지 않은 다른 발을 들어 세화의 팔을 꾹 내리눌렀다. 그 바람에 늑대에게 물린 상처가 터져 붕대가 붉게 젖어 들었다. 짧은 신음과 함께 그의 발목을 놓친 세화는 땅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 뜨거운 눈물만 줄줄 흘렸다.
남자의 발소리가 멀어져 갈수록 정신은 아득해졌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어옴에도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라 춥지 않았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정화 누님의 품속에서 깨어날 것만 같았다.
‘아직 안 됩니다…. 저는 아직 누님 얼굴 못 봅니다….’
저놈의 숨통을 끊어 놓아야만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되뇌던 세화는 결국 차디찬 바닥 위에서 정신을 잃었다. 그날, 복수의 씨앗이 그의 가슴 속에 심어져 뿌리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