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5화
하루도 빠짐없이 그를 기다리겠다는 다짐과 달리, 세화는 그다음 날부터 다시 외출을 금지당했다. 그는 며칠간 기루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 데다가 다친 팔로 주방 일까지 해야 했다. 다쳤으니 좀 쉬게 해 주면 안 되겠느냐 물어도 돌아오는 건 타박뿐이었다.
“내가 못 살아, 정말. 무슨 애가 겁도 없이 산속에서 늑대랑 싸워?”
“그 말씀만 벌써 다섯 번쨉니다, 누님. 아! 아파요.”
세화는 다치지 않은 오른팔로 등짝을 문질렀다. 틈날 때마다 그의 등을 내리치는 보화의 손이 제법 매웠다.
“하도 맞았더니 이제 팔보다 등이 더 아픕니다.”
“너는 더 맞아도 싸. 팔 좀 들어 봐. 약 다 발랐으니까 붕대 감게.”
그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고분고분 팔을 들었다. 깨끗한 새 붕대가 팔을 칭칭 동여매는 동안 어떻게 하면 여길 빠져나갈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아무튼 루주님한테 쫓겨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 가만 보면 그분은 너한테만 참 약하시다니까.”
“그게 다 제가 착하고 예뻐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이런 저를 어려서부터 키워 주셨으니… 아, 아파요!”
“다 됐어. 가. 일 끝났으면 방에 얌전히 틀어박혀 있고.”
“예에.”
세화는 걷어붙였던 소매를 내리고 계단을 올랐다. 일이 끝난 건 사실이었지만 방 안에 얌전히 틀어박혀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는 가장 높은 층 누각에 올라 난간 위에 걸터앉았다.
‘여기서 표국이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지나가는 게 보일 수도 있으니까.’
그는 기둥에 머리를 기댄 채 하염없이 거리만 내다보았다. 참을성 같은 건 전혀 없었던 제가 여운을 만난 이후로 기다림이 일상이 된 걸 생각하면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이런 감정을 한 단어로 표현해야 한다면 아무래도 동경일 테다. 제가 가지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것들을 그 애는 모두 가진 듯했으니까. 사는 세상이 달라서인지, 질투가 난다기보다는 그저 부러웠고 그와 가까워지고 싶었다.
생각에 잠겼던 세화는 불현듯 느껴지는 시선에 눈길을 내렸다. 그리고 기루 아래에 서서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하얀 얼굴을 발견했을 땐 환하게 웃음 지었다.
“여운! 나 보러 온 거야?”
저 아래까지 들리도록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치자 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가 이대로 가 버리기라도 할까 다급해진 세화는 난간 밖으로 한 발을 걸치며 소리쳤다.
“나 금방 내려갈게! 조금만 기다려!”
감시가 삼엄하니 당당히 문을 통해 나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외벽을 타는 수밖에.
세화는 조심히 기둥을 타고 벽을 짚어 가며 아래로 향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층이 남았을 땐 처마 위에서 훌쩍 뛰어내려 땅 위에 무사히 착지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여운에게서 한숨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이 친우가 그리웠구나? 여기까지 직접 찾아온 걸 보니.”
“기다리지 말랬잖아.”
“응? 안 기다렸는데? 방금까지 기루에 있다가 내려온 거 못 봤어?”
“…그럼 간다.”
“같이 가!”
세화는 그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친우가 걱정되어 이렇게 찾아와 주다니 역시 제 사람 보는 눈은 틀린 적이 없었다.
“우리 어디 갈까? 뭐 하고 놀래?”
“오늘은 일찍 가 봐야 해.”
“아, 저번에 너무 늦게 들어가서 혼났어? 그래도 아직 시간 여유 있으니까 나 보러 온 거잖아. 맞지?”
여운은 세화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지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더욱 기분이 좋아진 세화는 자신이 차를 사겠다며 그를 찻집으로 이끌었다.
혼자였다면 굳이 찻집 같은 곳에 올 일이 없을 테지만, 오늘은 좋은 친우와 함께인 만큼 차라도 한잔하면서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자리에 앉아 차를 주문한 세화는 맞은편에 앉은 여운의 모습을 눈으로 훑었다.
“너는 앉는 것도 되게 바르게 앉는다. 나 좀 봐. 이렇게 삐딱하게 앉는 거.”
심지어 얼굴도 잘생겼어, 하고 덧붙이자 그는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의외로 칭찬에는 부끄러워하는구나?’
장난기가 돋은 세화는 그를 놀릴 속셈으로 칭찬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봐봐. 잘생긴 데다 힘도 세지. 벌써 검기까지 맺고, 양민을 위하는 마음에 의리까지 있어. 너 정말 내 또래 맞아? 나보다 어린 줄 알았는데.”
“그만해.”
점점 붉게 물들어 가는 얼굴을 지켜보는 게 재밌어서 멈출 수 없었다. 이목구비 하나하나 뜯어보면서 칭찬을 늘어놓던 그는 결국 주문했던 차가 나오고서야 입을 다물었다.
여운이 잔에 차를 따라 마시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차를 한입에 털어 넣으려던 세화는 뜨거운 찻물에 입술을 데어 깜짝 놀랐다.
“앗, 뜨거!”
결국 잔에 든 차를 엎지르고 말았다. 물방울이 턱을 타고 뚝뚝 떨어져 내려 옷까지 적셨다. 세화는 민망하게 웃으며 소맷자락으로 대충 물기를 닦아 냈다.
“왜 그렇게 칠칠치 못해.”
여운이 예의 그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내며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넸다. 그를 닮아 희고 깨끗한 손수건이었다. 세화는 감사히 건네받은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말했다.
“다 네 잘못이야.”
“내가 뭘.”
“네 잘생긴 얼굴 보느라 차까지 쏟았잖아.”
“그런 말 좀 하지 마.”
“왜? 잘생긴 걸 잘생겼다고 하는데. 난 이런 건 꼭 짚고 넘어가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거든. 어, 그런데 손수건에 이 글씨는 뭐야?”
세화는 손수건 한 귀퉁이에 있는 자수를 발견하고 물었다. 흰 손수건에 시랑(豺狼)이라는 글자가 검은색 실로 촘촘히 새겨져 있었다. 여운은 그 말을 듣자마자 손을 뻗어 손수건을 휙 빼앗아 갔다.
“왜? 뭔데?”
“…아명이야.”
“아명? 아명이 시랑이야?”
여운은 다시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화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아명이 새겨진 손수건을 여태 들고 다닌다고?”
“…….”
“너 진짜 귀엽다!”
“그만….”
“마냥 어른스러운 줄 알았는데 이런 면이 있었어? 거기다 이름도 귀여워! 나 너 볼 때마다 새끼 늑대 같다고 생각했거든. 추운 데 사는 하얀 늑대.”
“그만 놀리라니까?”
“누가 지어 주셨어? 부모님? 조부모님?”
여운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세화를 흘겨보고는 몸을 돌려 뚜벅뚜벅 찻집을 나가 버렸다. 세화도 대충 동전 몇 푼을 꺼내 탁자에 올려놓고 그의 뒤를 따랐다.
“시랑!”
“그렇게 부르지 마!”
“왜, 귀여운데. 참고로 나는 아명 같은 거 없었어.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 기루 루주님이 얘 이름은 세화다, 하고 지어 주셨거든. 다들 꽃 화 자로 돌림자를 쓰니까. 그런데 너는 왜 시랑이야?”
“어렸을 때 눈 덮인 산속에 살았는데….”
“응응.”
“늑대한테 물려 가지 말라고.”
“그래서 오히려 이름을 늑대라고 지은 거야?”
세화는 배를 잡고 깔깔 웃었다. 남의 아명 이야기가 이렇게 즐거운 거였다니, 역시 친우를 만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너희 부모님은 여전히 널 시랑이라고 부르시겠네? 진짜 귀여워.”
“입문하기 전에 돌아가셨어.”
“아…. 뭐, 그럴 수 있지. 나는 부모님 얼굴 기억도 안 나!”
또 한 가지 공통점을 찾았다 싶어 마냥 기분이 좋았다. 세화가 여운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손을 두르려 하자 그는 손을 쳐 내며 말했다.
“이제 가 봐야 해.”
“좀만 더 있다 가면 안 돼?”
“안 돼.”
“그럼 언제 또 만나?”
“기다리지 마.”
“냉정하긴. 그래, 저번에 너무 늦었으니까 오늘은 빨리 가라. 가는 길에 늑대한테 물려 가지 말고.”
“…….”
“잘 가, 시랑!”
세화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못마땅한 얼굴의 여운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걸음을 돌렸다. 오늘도 역시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가는 그의 옷자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다음에 만나면 뭐 하고 놀까?’
그런 고민을 하며 세화도 다시 기루로 향했다. 거대 문파의 삼대 제자인 만큼 외출이 자유롭지 않을 테니 그가 심부름하러 내려오는 시간을 잘 활용해야 했다. 같이 식사하기에도 넉넉지 않은 시간이었다.
어느새 날은 어둑어둑해졌다. 기루에 다다른 세화는 당당히 문을 열고 들어갈지, 아니면 다시 벽을 타야 할지 고민했다. 어차피 누님들은 제가 사라진 걸 이미 알고 계실 테니 어떻게 들어가든 마찬가지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대문을 여는 순간, 기루 안에서 나온 누군가가 그의 곁을 휙 스쳐 지나갔다. 마치 바람처럼 빠르게 사라지는 속도에 흠칫 놀란 세화는 뒤를 돌아보았다. 일전에도 보았던 가면을 쓴 남자였다.
‘진짜 기분 나쁘다니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 검은색 가면도 그랬고, 지나칠 때마다 느껴지는 냉기도 그랬다. 묘하게 자신을 지켜보는 듯한 눈빛 또한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그리고….
“어?”
그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이상한 냄새가 세화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비린내였다. 마치 사람의 피를 잔뜩 쏟은 것 같은 피비린내.
세화는 다시금 고개를 돌려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따라가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앞섰다. 너무나도 수상했지만 더 늦었다가는 매를 맞을 게 뻔했다.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그를 보내 주기로 한 세화는 기루 안으로 걸음을 들여놓았다. 그와 동시에 위층에서 들려온 소름 끼치는 소리에 그의 몸이 얼어붙었다. 누군가가 내지른 끔찍한 비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