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4화
그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늑대를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경고 신호였다. 그리고 그들이 주춤한 사이 재빨리 몸을 돌려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남자에게로 달려갔다.
두 사람을 둘러싼 늑대 무리가 사납게 이를 드러낸 채 으르렁거렸다. 세화는 마른침을 삼키며 머릿수를 세어 보았다. 일곱이 맞았다. 당장 달려든 놈은 여섯이었지만, 한발 물러서 그들을 지켜보는 거대한 회색 늑대 한 마리가 더 있었다. 마치 이들의 대장인 듯한 무시무시한 짐승이.
세화는 제 뒤에서 떨고 있는 남자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뛸 수 있겠어요?”
“다, 다리가 저려서….”
“못 뛰겠어도 뛰어요. 제가 신호하면 바로 가는 거예요.”
아무리 뛰어 봤자 평범한 인간의 속도로 저들을 따돌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세화는 저잣거리 이야기꾼에게 들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늑대들은 사람을 해치지만 동시에 두려워한다고도 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이 흩어지더라도 섣불리 무리를 나눠 추격하지 않을 것이다. 제 쪽으로 잘만 유인한다면 저 남자는 도망칠 수 있다는 말이다.
‘늑대들은 머리가 좋으니까 약해 보이는 쪽을 쫓으려고 하겠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건 세화뿐만이 아니었다. 늑대들 역시 잔뜩 경계를 세운 채 파고들 틈을 노리고 있었다.
마침내 대장 늑대가 짧게 짖으며 신호하자 맨 앞에 있던 두 마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었다. 양쪽에서 덮쳐 오는 늑대들의 눈이 어둠 속에서 번뜩이며 빛났다.
세화는 그들이 뒤에 있는 남자에게 눈독 들일 틈도 없게끔 주의를 끌 작정이었다. 그는 왼쪽에서 달려오는 늑대의 쩍 벌어진 주둥이 안에 왼팔을 밀어 넣었다. 동시에 오른쪽 늑대를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힘을 강하게 실은 검날이 두꺼운 가죽을 뚫고 들어가 정확히 목에 박혔다. 검 자루를 타고 피가 줄줄 흘러나오기 무섭게 세화는 검을 빼내 제 왼쪽 팔을 물어뜯는 중인 다른 늑대를 겨냥했다. 그의 빠른 동작에는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었다.
순식간에 목을 뚫린 두 늑대는 죽지 않았지만 캑캑거리며 피를 뱉어 냈다. 그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동안, 세화는 늑대 이빨에 찢어진 왼팔을 휘둘러 자신의 피를 바닥에 흩뿌리며 외쳤다.
“가요! 지금 당장.”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남자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저린 다리를 절뚝이며 산 아래를 향해 있는 힘껏 달렸다. 그가 달아나는 와중에 늑대들의 주의가 분산될까, 세화는 피투성이가 된 팔을 그들의 눈앞에 대고 흔들었다.
“자, 여깄다. 니들 먹잇감. 여기 봐야지.”
그러자 흥분한 짐승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공격해 오기 시작했다. 세화는 곧장 몸을 돌려 남자가 사라진 반대편을 향해 뛰었다. 어느 정도 멀리 유인한 뒤에 나무를 오르자. 그 위에서 밤을 버티자고 생각하면서.
심심할 때마다 싸구려 책을 사다가 몇 가지 무공을 독학했지만, 그런 건 대부분 길거리 싸움에나 쓰였다. 경공 같은 건 자신 없었다. 그나마 신체 조건이 좋아 남들보다 빠르기에 망정이었지, 안 그랬으면 벌써 잡아먹혔을 터였다.
달리던 세화는 이야기꾼의 말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 늑대는 사냥할 때 먹잇감을 이리저리 몰아 힘을 빼놓는다고. 먹잇감이 지칠 때쯤 되면 날카로운 이빨로 물어뜯다가, 대장 늑대가 마지막으로 목덜미를 물어 숨통을 끊어 놓는다고.
지금도 다른 늑대들의 뒤에서 지휘하며 달려오는 거대한 짐승을 볼 때마다 머리가 쭈뼛 서는 듯했다. 저 날카로운 송곳니에 물린다면 근육이 찢기고 뼈까지 뚫릴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다친 두 마리를 제외하고 전부 다섯 마리. 그중의 하나가 뒤에서 빠른 속도로 달려오더니 펄쩍 뛰어올랐다. 세화가 늑대를 향해 돌아선 순간, 양어깨가 거대한 앞발에 짓눌렸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늑대와 함께 쓰러져 바닥을 한 바퀴 굴렀다. 기다란 주둥이가 얼굴을 향해 다가왔다. 물리기 직전,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단검을 들어 흉흉하게 빛나는 눈알을 찍어 내렸다.
갑작스러운 고통에 놀란 늑대가 거칠게 고개를 흔든 탓에 검 자루가 세화의 손에서 미끄러졌다. 단단하게 박힌 검을 뽑아내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젠장.”
세화는 욕을 몇 마디 내뱉으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무기를 잃는 건 치명적이었지만, 우선은 끝도 없이 쫓아오는 짐승들을 피해 달아나는 게 급선무였다. 마침 눈앞에 타고 오르기 좋아 보이는 키 큰 나무 하나가 서 있었다.
그는 잽싸게 나무 기둥을 짚었다. 한쪽 손은 이미 피로 푹 젖어 미끈거렸고 다른 한쪽 손은 식은땀이 났지만 마음이 급하니 못 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나무를 오르는 세화에게 늑대 몇 마리가 더 달려들었다.
그걸 피하려다 순간 발이 미끄러졌다. 세화는 간신히 손을 뻗어 위에 있는 가지를 붙들었다. 두 손으로 가지를 생명의 동아줄처럼 꼭 붙든 채 매달려 버텼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거친 이빨을 드러낸 늑대들이 대롱거리는 두 다리를 물어뜯으려 시도하고 있었다. 이빨끼리 딱딱 부딪치는 소리까지 내면서.
“아오, 좀! 좀 가라! 가죽을 벗겨서 옷으로 만들어 버리기 전에!”
세화는 허공에다 발길질하며 외쳤다. 정말이지 기회가 된다면 저놈들을 싹 잡아 족치고 싶었다. 털가죽은 벗겨다가 누님들 드리고 살점은 잘 발라서 내다 팔고. 그렇게라도 해야 오늘의 개고생을 좀 잊을 수 있을 것이다.
“꺼져! 빨리 안 꺼져?”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살아 있어야겠지. 세화는 발길질을 멈추고 두 다리로 나무 기둥을 감쌌다. 살아남으려면 조금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했다.
그러기 무섭게 늑대 주둥이가 발목에 닿아 왔다. 어떻게든 먹잇감을 놓치지 않겠다는 불굴의 의지가 느껴졌다. 길고 뾰족한 송곳니가 그의 발목에 박히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일직선 모양으로 날아온 흰 빛이 번쩍였다.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세화는 나무 아래에 쓰러진 늑대를 보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다른 늑대들도 놀랐는지 나무에서 조금 물러난 상황이었다.
“뭐야?”
세화는 눈을 돌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윽고 멀지 않은 곳에서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는 누군가의 흰 옷자락이 보였다. 검을 뽑아 든 여운이었다.
“네가 왜 여기….”
네가 이 시간에 이런 데서 뭘 하느냐고 물으려 했다. 그런데 입을 떼기 무섭게 대장 늑대가 낑낑 소리를 내더니 꼬리를 말았다. 마치 지금까지 공격하던 건 제가 아니라는 것처럼.
세화는 그제야 여운의 검에 맺힌 기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뭐야? 너 방금 검기 날린 거야? 진짜? 그 나이에? 미쳤다!”
그는 주변에 아직 늑대들이 있다는 것도 잊고 흥분해서 뛰어내렸다. 그러자 대장 늑대가 그를 향해 돌아서 으르렁거리려 했다. 명백한 사람 차별에 조금 서러워지려고 할 때쯤 여운이 검을 들어 올렸다. 늑대는 다시 기가 죽어 깨갱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개멋져!”
세화가 눈을 빛내며 외쳤다. 힘이 센 건 알았지만 벌써 검기를 사용하다니, 천재인가. 손뼉까지 치려던 그는 왼쪽 팔에서 날카롭게 전해져 오는 통증에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헤헤 웃었다.
대장이 겁을 먹으니 다른 늑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못내 아쉬운 듯 세화를 향해 이빨을 세우다가도 여운의 눈치를 보며 물러나길 반복했다. 결국 먹잇감을 포기한 그들은 걸음을 돌려 숲속으로 사라졌다.
“나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위험한 줄 알고 찾으러 온 거야? 설마 나 따라다녔어? 오늘 낮에 나 쳐다본 사람도 너 맞아?”
세화는 그에게 서운했던 기억 따위는 전부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오히려 그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만 다시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맨날 따라다니던 내가 안 보이니까 너도 걱정된 거지? 말하는 돌멩이가 그리웠던 거지?”
“입 좀 다물어.”
그는 무심하게 답하며 허리를 숙여 쓰러져 있던 늑대의 눈에서 단검을 뽑아냈다. 그걸 건네받은 세화는 기분이 좋아 날아갈 것 같았다.
“정말 나 따라온 거 아니야?”
“아니야.”
“그럼 이 시간까지 산에서 뭐 했는데?”
“산… 밑에 있었는데. 어떤 남자가 뛰어 내려오면서 자길 구해 준 사람이 죽을 위기에 처했다고….”
“산 밑에는 왜 있었는데?”
“…….”
“나 따라왔구나!”
여운은 말없이 한숨을 내뱉고는 왔던 길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세화도 그의 옆에 바짝 붙어 따라가며 쉴 새 없이 혀를 놀렸다.
“지난번에는 못 믿겠다고 해 놓고선 그렇게까지 날 걱정했다니. 너도 참 성격 특이하다.”
“또 누굴 해치지 않을까 감시한 거야.”
“그럼 이제 확인했겠네? 그때 네가 오해했다는 거. 이거 봐. 나 그 사람 구해 주느라 팔도 이렇게 다쳤어.”
세화는 피투성이 팔을 흔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여운이 한심하다는 듯한 얼굴로 물었다.
“넌 그게 재밌어?”
“어려서 개한테는 물려 봤어도 늑대한테 물린 건 처음이거든. 사실 네가 내 팔 부러뜨렸을 때가 더 재밌긴 했지만.”
“…….”
“아, 그런데 너 지금 여기 있어도 돼? 평소에는 표국만 들렀다가 바로 돌아갔잖아.”
그의 말을 들은 여운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안 되는 건가?”
“…그래서 돌아가려는데 네가 자꾸 말을 걸잖아.”
“그래? 그럼 이제부터 안 걸게. 조용히 할게.”
“…….”
“나 입 꾹 다물었어.”
입을 다문 지 얼마나 됐다고 자꾸만 입술이 근질거렸다. 결국 참지 못한 세화는 다시 말을 건넸다.
“지금 혹시 나 데려다주는 거야?”
“…그럼 혼자 갈래?”
“아니! 같이 갈래. 데려다줘. 생각해보니까 팔도 다쳤고, 뛰었더니 다리도 좀 아프고, 그리고 놀라서 심장도 빠르게 뛰는 것 같아. 양민은 도장의 보호가 필요해.”
여운은 별 개소리를 다 한다며 고개를 저으면서도 세화를 기루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장난삼아 잠깐 들어왔다가 가겠냐고 물으니 얼굴이 창백해졌지만 말이다. 마을을 떠나려던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세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분간 안 내려와. 기다리지 마.”
“그럼 언제 오는데?”
“나도 몰라.”
“에이…. 너 올 때까지 표국 앞에서 죽치고 있어야겠다.”
“그러지 말라고.”
결국 세화의 입에서 기다리지 않겠다는 답이 나온 뒤에야 그는 걸음을 돌렸다. 쏜살같이 멀어지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던 세화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잘 가, 여운.”
나는 아마 내일도 너를 기다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