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화
청해성 치다(治多)현.
그곳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에 위치한 기루, 몽연루는 서녕에서 유명하다는 여느 기루 못지않게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높은 누각에 올라 거리를 내다보던 세화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서의 일상은 따분하기 그지없었다. 기루에서 나고 자란 지 어느새 열다섯 해가 되었건만, 흥미로운 일이라고는 개미 눈곱만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저잣거리에서 파는 싸구려 무공서들을 사다가 독학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나 재밌지, 몇 년 동안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다 거기서 거기였다. 그렇다고 무학관 같은 곳에 다닐 형편도 아니었고.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그의 모친은 청해에서 꽤 이름을 날린 예기였다고 들었다. 덕분에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난 것치고는 취급이 썩 괜찮은 편이었다. 기루 누님들 손에 오냐오냐 자란 탓에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버르장머리가 없는 편이긴 했지만.
“세화야! 유세화! 얘는 또 어딜 간 거야?”
아래층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세화는 목덜미를 긁적이며 그 소리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자색 옷을 입은 여자가 팔짱을 낀 채 씩씩거리고 있었다.
“보화 누님!”
“그새 거길 올라갔어? 주방에 가서 일 좀 도우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해!”
“아, 갑니다, 가요. 잠깐 바람 좀 쐬고 있었어요.”
“너 사라질 때마다 또 어디서 사고 치고 있는 건 아닌가 조마조마해, 아주. 내가 제 명에 못 죽겠어.”
“제가 사고를 치면 얼마나 친다고 그럽니까? 다 몽연루 잘되라고 하는 일인데.”
“잘되라고 하는 일? 허구한 날 손님 쥐어패는 게 잘되라고 하는 일이냐?”
“거 다 맞을 짓을 하니까 패는 거죠. 누님도 통쾌하지 않으십니까?”
“시끄럽고 가서 일이나 해. 오늘 내 일과는 너 감시하는 거야. 또 일냈다가는 너나 나나 루주님한테 뺨 맞고 쫓겨나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
“아, 예에.”
세화는 대충 대답하며 주방으로 향했다. 소매를 둥둥 걷어붙이는 그의 뒤통수에 따가운 눈초리가 꽂혀 왔다. 숙수 명 씨가 그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세화 왔냐.”
“예, 세화 왔습니다아.”
“저쪽 가서 국물 맛 좀 봐라. 너무 짜지는 않은가.”
세화는 국물을 조금 떠먹어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간 좀 더해야겠는데요.”
그리고 옆에 있던 소금을 한 꼬집 집어 솔솔 뿌렸다. 그를 지켜보던 명 씨가 푸념했다.
“명색이 숙수인데 이제 나이가 들어 맛도 제대로 모르겠다. 그나마 세화 네가 있어서 다행이지. 손재주가 좋으니 조금만 더 배우면 주방 일을 혼자 맡을 수 있을 게야.”
“…….”
세화는 말없이 칼을 들어 앞에 놓인 소채를 송송 썰었다. 일정한 크기로 반듯반듯 썰린 소채를 국물에 투하하려는데, 주방 밖에서 웬 남자가 소란을 피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 못 들어가? 나한테 술을 못 팔아? 내가 내 돈 내고 마시겠다는데 왜!”
“저번에도 너무 취해서 상을 엎으셨잖아요. 그때 부러진 상이랑 깨진 접시 값만 얼만데요. 저희 기녀들한테도 무례하게 굴면서 위협하셨고요. 루주님께서 손님께는 술을 팔지 말라고 단단히….”
“루주가 그랬다 이거지? 하늘 같은 손님한테 어딜 감히. 당장 루주 나오라고 해!”
명 씨는 고개를 돌려 세화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눈에 불을 켜고 밖을 내다보는 그는 달려 나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야야, 참아라. 네가 참아.”
“저 새끼가 또….”
“아이고, 세화야! 가면 안 돼! 아니, 그럼 칼이라도 놓고 가! 야!”
세화가 집어 던진 칼이 조리대를 뚫고 푹 박혔다. 결국 그를 막지 못한 명 씨는 혀를 쯧쯧 차며 지끈거리는 허리를 두드렸다.
몽연루는 그 규모가 큰 만큼 이럴 때를 대비해 고용한 낭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세화에 비하면 한발 늦었다. 그들이 나타날 때면 이미 상황이 종료된 후였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주방을 박차고 나간 세화는 남자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그의 허리를 발로 걷어찼다. 커다란 몸집의 남자가 그 발차기 한 방에 앞으로 밀려나더니 쿵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헉… 네놈은 그때 그….”
“너 쫓아낸 놈.”
세화는 그의 육중한 몸을 돌려 눕혀 주먹으로 얼굴을 가격했다. 퍽 퍽 소리가 울려 퍼지며 안 그래도 추한 얼굴이 납작하게 뭉개지는 동안, 보화는 그의 뒤에서 이마를 짚으며 탄식했다.
“난 이제 끝났다….”
반면 세화의 주먹에는 더욱 힘이 들어갔다. 그에게 이깟 술주정뱅이 하나 혼내주는 건 일도 아니었다.
“내가, 그때도, 말했지, 또, 오면, 얼굴을, 갈아 버리겠다고!”
이미 찍소리도 못하고 정신을 잃은 남자의 몸이 주먹질하는 박자에 맞춰 흔들거렸다. 그렇게 신명 나는 매타작이 이어지던 중, 뒤늦게 달려온 낭인들의 뒤에서 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유세화.”
“하여간, 멍청한, 것들은, 맞아도, 말귀를, 못 알아, 처먹지!”
“…….”
한참 주먹을 내리꽂던 세화는 순간 싸한 기분이 들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어서 저를 한심하다는 듯이 내려다보는 여자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매질을 멈췄다.
“일어나.”
“루주님, 그게….”
“당장.”
서늘한 눈빛에 기가 죽은 그는 꼬리를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핏방울이 튄 주먹을 옷에 쓱쓱 닦는 그에게 여자가 따라오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가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는 동안 낭인들은 쓰러진 남자를 질질 끌고 대문으로 향했다.
한 걸음 앞서 걸어가던 여자는 후원에 다다라서야 발걸음을 멈췄다. 눈치를 살살 살피던 세화는 최대한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루주님도 아시잖아요. 그놈이 지난번에 얼마나 행패를 부렸는지. 저는 그저 사전 방지 차원에서….”
“세화야.”
걱정했던 것과 달리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름을 부른 여자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예, 정화 누님.”
“너는 내가 고용한 낭인이 아니야. 저기 길거리에 널린 무뢰한도 아니고. 매번 이런 일에 발 벗고 나설 필요 없다고 몇 번을 말했니?”
“하지만….”
“그러다 네가 위험한 일에 휘말려 다치기라도 해 봐. 죽은 네 어미한테 내가 무슨 면목이 있겠어.”
“…….”
“몇 달 전에도 저자에 놀러 나간다더니 팔이 부러져서 돌아왔잖아. 그때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그건 이유가 있었습니다!”
정말로 억울해진 세화가 외쳤다. 그때 그 일로 한동안 외출을 금지당했던 걸 생각하면 분통이 터졌다. 그러나 정화는 그가 설명할 새도 주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예화는 내가 제일 예뻐하던 아이야. 그런 애가 낳은 아들이니까 나이가 찰 때까지 기루에 데리고 있으면서 보호하려는 거고. 길바닥에 내몰린 어린애들이 대부분 어떤 인생을 사는지 너도 잘 알잖아. 그런데 네가 이렇게 주먹을 함부로 쓰면 내 노력은? 예화에게 너를 잘 보살피겠다고 한 약속은 어떻게 되는 거니?”
세화는 할 말이 없어져 고개를 푹 숙인 채 땅바닥만 내려다보았다.
“네 성격에 종일 이런 데 갇혀서 일만 하는 거 답답하겠지. 나도 알아. 그런데 내키지 않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건 비단 너뿐만이 아니야. 우리 모두 그래. 보화만 봐도 그 어린 나이에 막돼먹은 부모 손에 팔려 와서 고생했잖니.”
“알아요….”
“나도, 네 어미도 마찬가지였어.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기예를 팔다 보니 그게 인생이 된 거야. 거기서 나름대로 삶의 의미도 찾았고.”
“…….”
“세화야.”
따뜻한 손길이 세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번에 네가 물었지. 왜 기루 사람들은 하필 이름에 꽃 화 자를 써서 일생을 그저 꽃처럼 한 자리에 뿌리박혀 살아가냐고. 그리고 내가 답했잖아. 육신은 어쩔 수 없이 이 땅에 매여 있지만 금을 타고 노래 부를 때만큼은 바람에 날리는 꽃잎처럼 자유롭길 바라는 마음에서 지은 이름이라고.”
“예….”
“너도 여기에 뿌리내리길 바라. 네 가족이 있는 안전한 곳에.”
가족이라는 단어가 주는 전율은 생각보다 강했다. 잠자코 듣던 세화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자 정화는 입꼬리를 끌어당겨 미소 지으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명 숙수가 너를 보조 숙수 삼고 싶다더라. 역시 피는 못 속여. 우리 세화는 아비를 닮아 요리를 잘하고, 어미를 닮아….”
“글씨를 잘 쓰죠.”
“그래, 잘 아네.”
“몇 번이나 말씀하셨으면서.”
세화가 입술을 삐죽거리자 정화는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내 인심 썼다. 오늘 하루는 나가서 놀아.”
“나가서요? 정말 그래도 됩니까?”
“대신 너무 늦게 들어오지 말고. 요즘 겨울이라 산에 먹을 게 없어서 늑대들이 밤마다 민가로 내려온다더라.”
“감사합니다, 정화 누님!”
신이 난 세화가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이 펄쩍 뛰었다. 그가 곧장 뒤돌아 달려 나가려고 하자 정화가 그의 뒤에다 대고 외쳤다.
“어디로 가는지는 알려 줘야지!”
“늑대 잡으러 갑니다!”
“어휴, 쟤가 정말….”
여러 번 말해 봐야 내 입만 아프지, 중얼거리던 정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세화는 멀쩡한 문을 두고 담을 넘었다. 담벼락 위에 손을 짚고 훌쩍 뛰어넘는 몸놀림이 가뿐했다. 그렇게 기루를 나선 그는 골목골목을 누비며 자유를 만끽했다.
친우 같은 건 없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려서 제게 기녀의 자식이라고 손가락질하던 놈들을 죄다 때려눕힌 탓에 동네 아이들은 저를 보면 피하기에 급급했으니까. 그런 하찮은 놈들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내가 어울리고 싶은 사람은 따로 있지.’
사악한 미소를 지은 세화는 담벼락을 딛고 올라가 처마 위를 걸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마을의 표국이었다. 곤륜파에서 수학하던 속가제자가 독립해 차린 곳이라고 들었다.
그는 표국 맞은편 포목점 지붕 위에 느긋하게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 그 애가 나타나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마침내 표국 안에서 걸어 나오는 이의 흰 옷자락이 겨울바람에 나부끼는 걸 발견했을 때, 세화는 자세를 바로 하며 눈을 반짝 빛냈다.
‘찾았다, 내 늑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