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화
“그래서 어떻게 지냈어?”
청연은 맞은편에 앉은 도경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바른 자세로 앉아 있는 그의 자태가 고왔다. 스물 하고도 두 살을 더 먹은 그는 어렸을 때 모습 그대로 잘 자라 빼어난 미모를 자랑했다.
종종 객잔 손님들이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들었다. 남궁세가의 삼 공자가 무공만 뛰어났다면 그 명성이 하늘을 찔렀을 텐데 그러지 못해 아쉽다며 은근히 까 내리는 말들이었다. 심지어 그의 발이 넓고 친우가 많은 것을 두고 여색을 밝히는 것 아니냐며 악질적인 추론을 내놓는 자들도 있었다.
그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속상해진 청연은 그들이 주문한 음식에 향신료를 최대치로 투하하고는 했다. 집안과 외모가 불러일으킨 질투라는 것쯤은 알지만, 도경의 무공이 정말 뛰어났다면 그렇게 함부로 입을 놀리기도 힘들었을 테니까.
“저는 잘 지냈습니다.”
“형님들이랑은 요즘 어때?”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도경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는 여전히 두 형님에게 무시당하는 처지였지만 더 이상 그들을 해하려 들지 않았다. 나이가 어느 정도 찬 뒤로는 굳이 같이 다니지도 않았다. 덕분에 제하를 응원하러 가는 길에 청연과 동행할 수 있었다.
청연은 일부러 챙겨 온 부채를 꺼내 들었다. 구 년 전, 어린 도경이 직접 그림을 그려 선물한 부채였다. 그의 그림은 이제 시장에서 웃돈을 주고도 구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렇게 귀한 물건이니 소중히 간직해 왔다. 부채를 팔랑거리며 부치는 모습을 본 도경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걸 아직도 쓰세요?”
“응. 누가 준 건데.”
“아니, 그 낡은 게 뭐가 좋다고…. 제가 새로 그려 드리겠습니다.”
“됐어. 이거 멀쩡해. 그나저나 나 때문에 괜히 지루하게 마차 타고 가는 거 아니지?”
“아니에요. 마침 좀 쉬고 싶기도 했고, 형님한테 들을 얘기도 있고 해서.”
“들을 얘기 뭐?”
도경은 허리를 앞으로 숙이며 마치 비밀 이야기를 하듯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서 마교는 어땠습니까?”
“아, 너도 그 얘기야?”
청연은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감쌌다. 마교에 붙잡혀 갔다가 살아 돌아온 뒤로 만나는 사람마다 같은 질문만 반복하는 통에 지겨워 죽을 것 같았다.
심지어 그는 사람들이 원하는 답변을 해 줄 수 없었다. ‘마치 생지옥 같았다’라거나 ‘양민을 수백 명씩 잡아다 칼로 쑤신다’라거나 하는 상황은 목격하지 못했으니까. 제하는 제 발로 쳐들어왔다가 다친 거였고, 지하 감옥의 장 씨는… 그건 잘 모르겠네. 아무튼 청연이 잠깐이나마 경험한 마교는 익히 듣던 소문과는 다르게 그리 끔찍하지 않았다.
“요즘 강호인들이 그 이야기에 아주 혈안이 되어 있단 말입니다. 좀 말씀해 주세요. 가서 친우들한테 자랑하게.”
“너 말은 똑바로 해. 그 사람들이 관심 있는 건 제하 얘기잖아. 마교에 잠입해서 불쌍한 양민 한 명을 구해 낸 젊은 협객 어쩌고.”
역시 엑스트라는 엑스트라였다. 극적으로 구출된 양민에게 관심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반면에, 주인공인 제하는 어느새 진정한 영웅이 되어 있었다. 그가 천산산맥을 통째로 뒤흔들었다느니, 천마에게 검을 겨눴다느니 하는 근본 없는 소문까지 퍼질 정도였다. 덕분에 이번 비무대회의 이목은 전부 그에게 쏠려 있었다.
“그렇게 대단했습니까? 정말로 천마에게 검을 겨눴어요? 그게 사실이라면 대체 어떻게 살아 나온 겁니까?”
“아, 나도 몰라…. 난 아무것도 못 봤어.”
“이번엔 정말 재밌는 대회가 되겠습니다. 다들 기대가 큽니다.”
“너 내 얘기는 하나도 안 물어봐? 왜 잡혀갔는지 안 궁금해?”
“마교 놈들이 무고한 양민 잡아가는 게 하루 이틀이랍니까.”
“너무해…. 아무튼 제하랑 만날 때마다 싸우면서 알고 보면 세상에서 제일가는 절친이지.”
청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하가 이번 대회에서 우승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망정이지, 몰랐다면 제가 다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번에 제하랑 만나면 어색하려나.’
그는 제하가 오직 비무대회에만 집중하고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다른 상념은 떠오르지도 않도록.
***
한참을 달린 마차는 청해성 옥수(玉树)시에 도착했다.
비무대회는 곤륜파가 위치한 곤륜산 아래에서 개최되었으며 양민들도 마음껏 구경할 수 있도록 모두에게 개방되었다. 그 덕분인지 거리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사람 진짜 많다.”
“그러게요. 형님 피곤하실 텐데 잠깐 쉴까요? 아니면 식사부터 할까요?”
“밥부터 먹자. 배고프다.”
마차에서 내린 청연과 도경은 대충 식당 하나를 골라 들어간 뒤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른 식당들은 대부분 만석이었는데 이곳은 다행히 손님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청연은 젓가락을 입에 문 채 주문한 음식이 나오길 기다렸다.
“형님은 기대되십니까?”
“응? 뭐가? 비무대회?”
“네. 아까부터 느낀 건데 형님은 왠지 다른 이들처럼 들떠 보이지 않으셔서요.”
그야… 누가 이길지 알고 있으니까.
청연은 대충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제가 기대하는 건 따로 있습니다.”
“그게 뭔데?”
“화합이요.”
도경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약간 낮추며 말했다.
“실은 몇 해 전부터 정파가 분열되고 있습니다.”
“분열이라니?”
“세가 사람들은 타산이 빠르고 공공의 이익보다는 개개인의 이익을 좇느라 바쁩니다. 한편 구파에서는 이런 태도를 이기적이라 비난하며 오대세가를 견제해 왔습니다.”
“응…. 그렇지.”
“그런데 최근 들어 양측의 대립이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몇몇 가문은 무림맹 회의 참석마저 거부하는 상황이고요.”
그러고 보니 원작에서도 이런 모습이 그려졌었다. 마교가 중원을 정복하기 위해 곤륜파에 쳐들어왔을 때, 구파에서는 망설임 없이 지원을 보낸 반면에 오대세가에서는 이들을 외면했다. 청해의 곤륜이 마교에 무너진다면 그다음 목적지는 사천이 될 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당장의 손익을 따지기 급급해 모른척한 것이다.
‘결국엔 사천까지 무너졌지. 그다음엔 그냥 피 튀기는 전쟁이었고.’
하필이면 마교의 무력이 나날이 강해져 가는 이 시점에 정파에서 내분이 일어나는 건 좋지 않은 신호였다. 청연은 마교의 실상이 원작과는 많이 달라졌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했기에 그리 두렵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미래를 장담할 수는 없었다.
“때마침 비무대회가 열려 정파 무인들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화합을 다지기 좋은 기회 아니겠습니까.”
도경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때, 문이 열리며 흰 도복을 입은 한 무리의 아이들이 식당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이 입은 도복의 가슴팍에는 잔잔한 용무늬 자수가 새겨져 있었고, 대부분이 십 대 중후반 정도로 보였다.
“곤륜파의 삼대 제자들인가 봅니다.”
청연은 저들끼리 떠드느라 바쁜 아이들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들은 문간에서부터 무어라 한참 대화를 나누더니 곧 자리를 잡고 착석했다. 개중에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아이가 대표로 음식을 주문하는 동안에도 주변이 시끌벅적했다.
“사저, 여운 사백께선 이미 하산하셨습니까?”
“그래. 오늘 아침에 일찍이 하산하셨다.”
“여기서 뵙기로 한 거 맞지요?”
“그렇다니까.”
“언제 오십니까?”
“금방 오실 거니까 그만 물어봐.”
청연은 그들의 말을 들으며 골똘히 생각했다.
‘여운이라면 저번 비무대회 우승자 맞지? 원작에서 나온 적이 있던가. 비중 없는 조연 중에 하나였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러던 중 도경이 청연에게 가까이 오라며 손짓했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작게 죽여 귓가에 속삭였다.
“형님, 제가 재밌는 얘기 하나 해 드릴까요?”
“뭔데?”
“저 아이가 사백이라고 부른 여운이라는 자에 대한 소문입니다.”
그의 입가에는 흥미진진하다는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청연은 그의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별호는 태허검. 지난번 비무대회 우승자인 건 아시죠? 그때 형님이 찍어 맞히신 덕에 제가 마음을 고쳐먹었잖습니까.”
“응. 기억하지.”
“사실은 그자가 십여 년 전에 기사멸조1)를 일으킨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연유는 모르겠으나 사부와 사형제들에게 검을 겨누고 난동을 부렸다고 합니다.”
청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사부에게 검을 겨누는 건 죄악 중의 죄악일 텐데 그런 일을 저지른 사람이 아직도 문파에 남아 있다고?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건, 곤륜에서 그자를 파문시키기는커녕 죄를 덮어 주고 이 일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는 겁니다. 아직도 쉬쉬하느라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대요. 아마 저 아이들도 모를걸요?”
“어떻게 그래? 너는 그런 얘길 어디서 들었는데?”
“저도 건너 들은 이야깁니다. 소문이 와전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뭔가 구린 데가 있다는 거죠. 아, 지금 들어오는 저 사람이네요.”
도경은 황급히 입을 다물며 자세를 바르게 하고 앉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청연은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눈길을 돌렸다. 열린 문 사이로 흰옷을 입은 남자가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음식이 왜 이렇게 안 나오지…. 주인장한테 다시 물어볼까요? 형님? 듣고 계세요?”
“…….”
눈앞이 어지러웠다. 청연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그러냐며 묻는 도경의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처럼 울렸다.
“나, 나 잠깐만….”
그는 당황한 도경을 뒤로한 채 곧바로 몸을 돌려 뒷문을 향해 달려갔다. 문을 박차고 나가 길 위에 선 그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정상적인 판단이 어려울 정도로.
그렇게 무작정 도망치려 할 때였다.
“가지 마.”
등 뒤에서 나타난 누군가의 팔이 청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허리 위에 놓인 창백한 두 손이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그 사람의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가지 마, 세화야.”
동시에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이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