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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객잔 정상 영업합니다 (58)화 (59/145)

058화

양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목덜미를 긁적였다. 정체를 들켰음에도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당장 따라와.”

“…….”

“빨리 안 와?”

청연이 닦달하자 그는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따랐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청연은 문을 쾅 소리가 나도록 닫았다.

“그게 다 뭐야? 무슨 교주씩이나 돼서 체통 없이 애로 변장을 하고 와? 너 안 바빠? 할 일 없어?”

“오늘만….”

“이제 목소리도 돌아왔네. 너 빨리 그거 풀어. 본 모습으로 돌아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축골공을 써서 뼈와 근육을 줄이고 역용술로 얼굴 생김새를 바꿨을 것이다. 그렇다고 외모가 완전히 달라지는 건 아닌지라 새까만 머리칼과 눈동자는 그대로였지만.

축골공은 내력을 크게 소모한다. 그런데 이렇게 어린아이로 보일 정도로 몸을 작게 줄여 찾아올 사람은, 심지어 그 상태로 손 하나 까딱 않고 진상 손님을 혼내 줄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천무호. 내 말 안 들려?”

그러자 그는 등에 메고 있던 짐을 풀어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그의 진짜 몸 크기에 맞을 만한 검은 옷이었다. 청연은 이마를 짚었다.

‘가지가지 하네, 진짜.’

곧이어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무호의 몸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몸집이 점차 불어나고 키가 커지는 동안, 마냥 어린애 같았던 얼굴도 원래의 골격을 찾아 가고 있었다. 청연은 그 해괴한 장면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어 뒤로 돌아섰다.

“끝나면 말해.”

머지않아 그의 뼈에서 나던 소름 끼치는 소리가 멈췄다. 청연이 슬쩍 뒤를 돌아보려 하자 검은 소맷자락을 길게 늘어뜨린 두 팔이 그의 허리를 감싸왔다. 청연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 이렇게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되는 거야?”

“오늘만.”

“아까부터 계속 오늘만이래. 이것 좀 놔 봐.”

청연은 낑낑거리며 그의 팔을 풀어 냈다. 비교적 손쉽게 청연을 놓아 준 그는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여기까지 왜 왔는데. 이유나 좀 들어 보자.”

“내가 책임질게.”

“어?”

“그날 일, 책임지겠다고.”

그의 말에 청연은 기겁하여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무슨 입술 한번 맞댔다고 책임을 운운하는지 모르겠다. 설마 이 세계에는 접문을 하면 평생을 약속해야 하는 법이라도 있는 건가.

“채, 책임이라니. 그럴 필요 없어.”

“하지만 내가 너를 강제로….”

“그게 뭐!”

그의 입에서 또 무슨 말이 나올까 두려워진 청연은 말을 끊고 횡설수설했다.

“뭐, 뭐 그거 한번 했다고… 닳아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청연은 자신의 발언으로 인해 점점 경악으로 물드는 무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솔직히 그렇잖아. 닳는 것도 아니니까. 그런 건 그냥 없던 일로 쳐도 되는 거잖아.”

“…….”

“네 정조 관념이 얼마나 투철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 정도쯤은….”

“청연.”

이름을 부르는 무호의 목소리가 서글프게 들렸다. 누가 이 상황을 본다면 그를 피해자로 착각할 만큼.

“네가 다쳤잖아.”

청연은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원작에서 잔혹하게만 그려졌던 천마가 이런 일에 마음 쓰는 인물이라는 걸 누가 알았을까. 애써 정신을 차린 청연은 제 입술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봐. 다 나았어. 목도 깨끗해졌고. 이제 됐지?”

“그래도….”

“그래도 뭐?”

“아래도… 다쳤을 거 아니야.”

“응?”

아래를 다치다니? 이건 또 뭔 소리야.

“다리 얘기하는 거야? 그때 네가 깔고 뭉개는 바람에 좀 저리긴 했는데 안 다쳤어.”

“그게 아니라….”

무호의 착잡한 눈길이 청연의 몸을 훑었다. 청연은 어리둥절한 채 그의 시선을 따라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대체 어딜 보는… 이 미친놈이?’

그의 눈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알아챈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동시에 그가 여태 무슨 이유로 책임을 들먹인 건지 실마리가 잡히기 시작했다.

“잠깐, 잠깐만. 너 혹시 그날 기억 안 나?”

“…….”

“말해 봐. 진짜 기억 안 나?”

“안 나.”

“미치겠다.”

내가 너 때문에 미치겠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는 거니.

그러니까 이놈은 지금까지 오해하고 있었던 거였다. 그날 접문만 한 게 아니라 무려 거사를 치렀다고. 기억이 없으니 목에 남은 자국만 보고 짐작했나 보다.

“너 그거 착각이야.”

“착각이라니?”

“그날 접문한 거 말고 별일 없었다고. 네가 오해한 거야.”

그러자 내내 어두웠던 무호의 표정에 당혹스러움이 차올랐다.

“오해라고? 그럼 목에 있던 자국은?”

“네가 갑자기 화나서 개처럼 물어뜯었어. 근데 그게 다야. 그 이상 안 했어.”

“입술 터진 건? 내가 널 안 때렸어?”

“그것도 네가 물어뜯었어. 왜, 때리고 싶었냐?”

“그게 아니라… 정말이야?”

“그렇다니까. 그러니까 책임이니 뭐니 그딴 소리 하지 말라고. 나 안 다쳤어. 그리고… 야! 안 내려놔?”

청연은 갑자기 제 몸을 들어 올린 무호 탓에 허공에서 발버둥을 치며 소리쳤다.

“아, 내려놓으라고!”

그날 무호가 저를 들어 올린 뒤 침상에 내려놓았던 걸 생각하면 머리가 쭈뼛 서는 것 같았다. 청연은 주먹으로 그의 어깨를 퍽퍽 내리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호는 그 상태로 몇 걸음 걸어가 청연을 탁자 위에 앉혔다. 덕분의 청연의 눈높이가 상대적으로 높아져 그를 내려다봐야 했다.

“지금 뭐 하는 건데. 너 갑자기 기분 좋아 보인다?”

웃고 있지는 않았지만 확연히 표정이 풀어진 모습이었다. 그날 별일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게 그렇게도 기쁜 모양이었다.

“바보야, 어떻게 그런 걸 오해할 수가 있냐….”

“그야 안 해 봤으니까.”

“돌겠다. 그나저나 너 그날 왜 그런 건데? 이유는 알아?”

“…….”

아무래도 대답하기 싫은 눈치였다. 청연의 두 눈을 빤히 올려다보던 그는 탁자에 양손을 짚으며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청연은 시선을 피했다. 그가 이렇게 제멋대로 다가올 때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하지 마. 넌 기억 안 나겠지만 내가 그때도 말했어. 계속 이렇게 제멋대로 굴면 너 다시는 안 보겠다고.”

“…안 봐?”

은근한 목소리로 묻는 무호의 눈빛이 그날과 닮아 있어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를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 한참을 깨물렸는데.

“안 볼… 건데 또 볼 수도 있고, 음….”

“뭐라는 거야.”

“몰라. 아무튼 네 맘대로 이런 거 하지 말라고. 막 번쩍번쩍 들어 올리는 거. 나도 사회적 체면이 있지.”

무호는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딱히 반박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불쑥불쑥 나타나지도 말고. 아니, 다시 생각해 봐도 어이가 없네. 많고 많은 외양 중에 왜 하필 애로 위장한 거야?”

“밥이나 얻어먹을까 해서.”

“돈도 많은 게.”

“그래도 오늘 밥값 했는데.”

그래. 밥값을 하긴 했지. 아주 제대로 했지.

청연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푸흡, 양양….”

“…….”

“아, 진짜 이름도 성의 없게 지어. 양양(佯佯)이 뭐야? 거짓말쟁이라고 자기소개해?”

“누구한테 거짓말만 배워서.”

“양양아, 아가. 아직도 배고파? 밥 더 줄까?”

“…됐어.”

청연이 계속해서 놀리자 그는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그래 봤자 그 애송이는 눈치도 못 채더군.”

“애송이가 누구… 아, 제하?”

“지가 형님이라던 조그마한 놈.”

“그 덩치가 조그마한 거면 난 신생아겠다.”

청연은 투덜거리며 무호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후원에서 제하와 나눴던 이야기를 혹시 그가 들었을까 걱정되었다. 그걸 들었다면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텐데….

그러는 사이 무호는 품속에 손을 넣어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그걸 본 청연의 눈이 커졌다.

“그 반지….”

홍옥이 박힌 은반지였다. 청연이 사막 한가운데에 던져 버렸던 그거.

“그걸 찾았어?”

순간 마음이 무거워졌다. 내다 버린 반지를 주인이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던 탓이다.

“그게… 그… 내가 버리려고 한 건 아니고… 돌려주고 싶었는데….”

“끼고 있어.”

무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청연의 왼손에 반지를 직접 끼워 주었다. 손가락에 딱 들어맞는 반지가 드디어 주인을 찾은 듯 반짝거렸다.

“이거 네 거잖아. 네 걸 내가 왜 가져…. 나 이런 거 받을 생각 없어.”

그리고 네 마음도 받아들일 생각 없어.

청연이 에둘러 거절 의사를 밝혔으나 무호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는 청연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매만지며 말했다.

“끼기 싫으면 가지고라도 있어.”

그 낮은 목소리에서 마음의 무게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할 말이 없어진 청연은 습관처럼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러자 무호의 손가락이 입술 위에 내려앉아 살살 문지르며 깨물지 못하게 했다.

“나한테 왜 이러는데.”

대체 나를 왜 좋아하는 거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어렸을 때 받은 작은 호의가 너에게는 그렇게 큰 의미였냐고.

“다음번 밥값.”

“또 오겠다고?”

“안 돼?”

“안 돼. 제발 교주 체통 좀 지켜 줘. 네가 그렇게 애기로 변장하고 다니는 거 교인들이 알면 놀라서 기절해.”

“그럼 다음엔 여인으로….”

“제발.”

“그쪽이 더 취향이라면….”

“꺼져.”

청연은 무호의 어깨를 살짝 밀어 내고 탁자 위에서 내려왔다. 다시 훌쩍 낮아진 눈높이가 불만스러웠다.

“원시천존도 참 불공평하시지. 키는 누구한테만 다 몰아주시고. 육척도 안 되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뭔 소리야.”

“아무튼 나는 이제 장사하러 가 봐야 돼. 양양이 어린이는 집에 갈 시간이니까 다시 옷 갈아입고 내려오세요.”

“…몸도 안 좋다며.”

“응. 감기 걸린 것 같은데 아가한테 옮으면 큰일이잖아. 그러니까 나한테서 떨어져.”

청연은 못마땅한 얼굴을 한 무호를 그 자리에 남겨 둔 채 방을 떠났다. 그를 상대하느라 기운이 다 빠지려는 참이었다. 터덜터덜 일 층으로 내려가니 해령이 말을 걸어왔다.

“객주님, 아까 데려가신 그 애는요? 아는 사이예요?”

“어…. 내 사촌 동생.”

“사촌 동생이 많으시네요. 이번엔 또 뭔데요. 방까지 내어 주실 건 아니죠?”

“절대 안 내주니까 걱정하지 마.”

“그러고 보니까 걔는 어떻게 지냈대요? 십칠이요. 그 더러운 성깔에 객주님 사지 멀쩡히 보내 줬길래 신기했는데.”

“해령아, 잠깐 조용히….”

“아직도 그렇게 무섭게 생겼어요? 사람 막 패고?”

“해령아…!”

너 그렇게 경솔하게 굴면 제명에 못 죽는다.

계단 위에서 흉흉하게 빛나는 어린아이의 두 눈을 목격한 청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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