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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객잔 정상 영업합니다 (57)화 (58/145)

057화

“객주님.”

제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청연을 불렀다. 잠깐이지만 그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 것도 같았다.

“없었던 일로 하고 싶으시다면 그러셔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전… 그러지 못할 것 같습니다.”

“…….”

“제겐 단순한 실수가 아니었으니까요.”

“제하야, 잠깐만….”

“객주님께서 제게 접문하신 게 아닙니다. 전부 제가 시작한 일입니다.”

청연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급작스러운 정보에 사고가 정지되어 머리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무시는 중에 그런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으니 저를 미워하셔도 할 말이 없습니다.”

“잠깐, 나 생각 좀….”

“오랜 시간 간직해 온 제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지만, 많이 혼란스러우실 테니 참을 겁니다. 대신 객주님께서 준비되셨을 때 제대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하는 청연이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빠르게 내뱉었다. 마치 대답 같은 건 듣고 싶지 않은 것처럼.

“그때까진… 제가 불편하시다면 멀리하셔도 좋습니다.”

“제하야….”

그는 청연을 향해 씁쓸하게 웃어 보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씨가 좋아요. 바람 좀 쐬시다가 천천히 들어오세요.”

“…….”

청연은 멀어져 가는 제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제 이마를 내리쳤다. 그걸로는 모자라서 뒤에 있던 나무 기둥에 머리를 쿵쿵 박았다.

“이 한심한 놈아…. 왜 사냐….”

무호에 이어서 제하까지. 이쯤 되면 제가 아이들에게 무언가 잘못한 게 틀림없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제하가 그 대단하신 스승님을 두고 제게 그런 마음을 품었을 리가.

애초에 엮이지 말았어야 했던 걸까. 처음 만났을 때 시무룩하게 기죽어 있던 아이가 신경 쓰여 챙겨 주다가 마음이 가고 정이 들어 버렸을 뿐인데. 이런 결과를 초래할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관심을 완전히 껐을 것이다.

청연은 그냥 죽자 죽어 하고 중얼거리며 머리를 들이박았다. 마른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져 어깨 위에 쌓일 때까지.

***

잠시 후, 청연이 어색한 얼굴을 하고 다시 객잔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을 땐 제하가 탁자 앞에 서서 양양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니, 이야기를 나눈다기보다는 일방적으로 말을 건네고 있었다.

“음식 맛있지? 그런데 객주님이 해 주시는 음식은 더 맛있다? 어떻게 아냐고? 이 형님은 어려서부터 여기 와서 밥 먹었거든.”

“…….”

“형님은 객주님이랑 친하다? 부럽지?”

애한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양양은 이미 그릇을 깨끗하게 비운 뒤 제하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다 먹고 나서도 떠나지 않은 걸 보면 아직 배가 고픈 건가 싶었다.

그나마 제하의 표정이 그렇게 우울해 보이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가 축 처져 있었다면 더욱 자괴감이 들었을 것이다. 청연은 제하에게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궁리하며 그에게 다가가려던 참이었다.

열린 문간으로 불어오는 바람에서 익숙한 향기가 풍겨 와 고개를 돌려 보니 시의적절하게 나타난 소명이 객잔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청연은 이 시점에 등장한 그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덕분에 제하와의 어색한 시간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스승님.”

역시나 소명의 기척을 느낀 제하도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가 청연과 짧게 시선이 마주친 그는 민망한 듯 웃어 보였다.

청연에게 간단히 인사를 건넨 소명은 곧장 제하에게로 다가갔다.

“다쳤다더니.”

“전부 다 나았습니다.”

“네놈 나았다는 말은 못 믿겠구나. 상처 좀 보자.”

“저 말고 객주님부터 살펴봐 주세요. 어젯밤에 열이 올라 크게 고생하셨습니다.”

그러자 소명은 청연에게로 돌아서 물었다.

“방으로 올라가시겠습니까?”

“아… 예, 잠시만요.”

오랜만에 진맥 정도는 받아 놓는 게 좋겠지. 그 전에 애 밥부터 챙겨 주고.

청연은 양양에게 다가가 빈 그릇을 가리켰다.

“아가. 아직 배고파? 밥 더 줄까?”

아이는 청연을 올려다보며 이전처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애치고는 참 말수가 없는 편이었다. 청연은 그릇을 주방에 가져다 놓고 깨끗한 새 그릇을 꺼내 음식을 담았다. 그러던 중 좋은 생각이 번쩍하고 떠올랐다.

그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그릇을 아이에게 가져다주고 맛있게 먹으라며 머리까지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소명과 제하와 함께 이 층 방으로 향했다.

문이 닫히자 소명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객주님, 방금 음식을 챙겨 주신 그 아이….”

“예?”

“가까이하지 않으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제하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 아이에게서 무언가 느껴지십니까?”

소명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아무것도 없어서 오히려….”

청연은 양양에 대한 대화가 깊어지기 전에 급히 끼어들었다.

“제가 잘 아는 아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습니까?”

소명은 청연이 못 박아 말하면 더 이상 캐묻는 일이 없었다. 반면 제하는 미심쩍은 눈길을 보내왔으나 조금 전 청연과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나서인지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청연의 몸에서 별다른 문제는 발견되지 않았다. 예상대로 그저 지친 것뿐이었다. 그는 의자에 앉은 채로 소명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대인께서는 출타 중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동안 어디 계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아. 감숙성에 있었습니다.”

“감숙이요? 그곳에는 무슨 일로….”

“그곳의 한 작은 마을에서 역병이 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역병이라면….

분명 원작에서 언급되었던 그 병일 것이다. 감숙에서 시작되어 중원 전역으로 번져 나간, 얼굴에 수포가 생기고 체온이 솟다가 결국엔 피를 토하며 죽게 되는 그 병.

‘그런데 역병이 퍼지기 시작한 시점이 이때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무호가 마교주가 된 걸 포함해 몇몇 사건들이 원작에 비해 일 년씩 앞당겨진 모양이었다. 청연은 자꾸만 꺼림직한 기분이 드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자칫하면 중원 전역으로 퍼질 수 있기에 치료법을 연구하는 중이었습니다. 다행히 제가 가진 약초 중에 도움이 될 만한 걸 찾았습니다.”

그가 말한 약초는 월야초일 테다. 제하와 함께 찾으러 갔다가 봉변당할 뻔했던 그 약초.

“연구에 시간과 인력이 다소 소요될 것 같아 제자를 데려가려고 합니다.”

소명은 제하의 상처를 꼼꼼히 살피며 말했다. 그러자 제하가 물었다.

“언제 출발합니까?”

“금일 갈 것이다.”

“그렇게 일찍이요?”

“그래. 보아하니 상처가 전부 나았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구나.”

제하는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청연을 슬쩍 보더니 다시 시선을 돌렸다.

“다음 달 비무대회도 무리 없이 나갈 수 있겠다.”

아, 그러고 보니 비무대회가 그렇게 곧이었나.

한동안 정신없이 지내느라 제하를 응원하러 가기로 약속했던 사실도 잊고 있었다. 소명이 청연을 힐끔 바라보며 물었다.

“객주님께서도 함께 가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예, 그러기로 했었죠.”

“저희는 감숙에서 지내다가 다음 달에 청해로 출발할 듯합니다. 중간에 사천에 들르겠습니다.”

청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너무 번거로우실 것 같습니다. 감숙에서 바로 청해로 향하는 게 편하실 텐데 저 때문에 부러 사천까지 내려오시다니요.”

그러자 잠자코 있던 제하가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에 객주님께선 최근에 많은 일을 겪으셨고, 지금 몸도 성치 않으시니 다음 달까지 쭉 휴식을 취하시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같이 가겠다고 하니 그렇게 좋아할 때는 언제고. 이제 불편해졌다는 건가.

제하의 말을 듣던 청연은 조금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그와의 사이가 어떻게 되었든 간에 그는 여전히 청연이 아끼는 사람이었고,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몸은 괜찮아. 스승님께서 번거로우실까 봐 그래. 나는 그냥… 따로 갈게.”

“따로요?”

“응. 그러니까 너는 걱정하지 말고 비무대회에만 집중해.”

오랫동안 같이 마차를 타는 건 너한테도 불편할 테니까.

청연은 그저 제하가 승리하는 모습만 볼 수 있다면 그만이었다. 그러니까 청해까지 누구랑 어떻게 가든 아무 상관 없었다. 더불어 중요한 대회를 앞두고 제하를 신경 쓰이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세 사람은 대화를 짧게 마무리했다. 소명과 제하가 약초를 조금 더 구한 뒤 감숙으로 넘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청연은 그들을 배웅하기 위해 다시 일 층으로 내려갔다.

“그럼… 다음 달에 뵐게요, 객주님.”

작별 인사를 건네는 제하의 눈빛이 착잡했다. 청연도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객잔을 떠나는 사제의 뒷모습은 이전과 다를 바 없었지만, 그들의 관계가 원작과는 전혀 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에 마음이 무거웠다. 청연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보아 온 아이가 연애 상대로 느껴질 리 만무했다. 그렇다면 거절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마음 상하지 않게 잘 거절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청연은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양양과 눈이 마주치고 움찔했다.

‘아직도 안 갔냐.’

밥은 다 먹은 것 같은데.

그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아이에게 다가가 음식을 담아 주었던 그릇을 내려다보았다. 그와 동시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정체를 숨길 거면 좀 제대로 숨기든가 이게 뭐 하자는 건지.

청연은 아이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너 아직도 오이 안 먹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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