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5화
청연은 당황했다. 꿈속에서 죽은 줄로만 알았던 시랑이 갑자기 깨어나더니 제게 입을 맞추기 시작한 것이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살았으니 되었다. 그는 시랑의 목에 팔을 감아 조금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너를 많이 그리워했노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네가 죽지 않고 살아 있기를 바랐다고, 살아 있으니 이제 더 이상 소원이 없다고.
이건 전부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기꺼웠다. 그가 조금씩 주춤거리며 입술을 떼어 내려고 하는 게 느껴졌지만 이대로 놓아 주고 싶지 않았다. 평생을 이러고 있어도 성에 차지 않을… 어?
‘뭔가 이상한데?’
꿈은 언제나 생생했다. 모든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져 현실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그런데 지금 저와 입술을 맞댄 이 사람의 온기는 시랑의 것과 달랐다. 그러고 보니 입술 모양도 다른 것 같고 접문에 서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청연은 그의 입술을 할짝거리며 모양새를 가늠해 보다가, 그의 목에 둘렀던 손을 들어 머리칼을 만져 보았다. 하나로 올려 묶은 건 시랑과 똑같은데 머릿결이 전혀 달랐다. 손으로 빗어 내릴 때 걸리는 것 하나 없던 결 좋은 생머리가 아니라, 이건 뭐랄까. 꼭 곱슬머리 같았다.
‘곱슬머리라면….’
그러면 제하밖에 없는데. 무호도 머리에 살짝 곱슬기가 있지만 이 정도는 아니니까. 그런데 제하가 왜 나랑 입을 맞추고 있지?
너무나도 이상한 꿈이었다. 아무래도 열 때문에 머리가 어떻게 됐지 싶었다. 아니면 꿈속에서 그의 스승님에게 빙의라도 했든가.
청연은 잠에서 깨어나고 싶은 마음을 가득 안은 채로 눈을 조금씩 떴다. 흐렸던 시야가 점점 또렷해지고 가장 먼저 보인 것은….
‘X 됐다.’
제하의 흔들리는 눈동자였다. 청연의 손에 붙들려 입술을 내어 준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난처한 얼굴이었다. 놀라서 손을 떼어 내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
청연도 얼빠진 얼굴로 침상에서 일어나 앉았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로 바라보기만 하던 두 사람은 상황 파악이 되자 눈조차 마주칠 수 없게 되었다.
아무래도 큰일 난 것 같다. 제하처럼 착한 애가 자는 사람에게, 심지어 스승님도 아닌 저에게 몰래 입을 맞췄을 리는 없으니 분명 자신이 먼저 시작한 일일 거라고 청연은 짐작했다. 아파서 정신이 없는 와중에 시랑과 접문하는 꿈을 꾸다가 제일 가까이 있는 사람을 끌어당겨 버렸을 터였다.
‘진짜 큰일 났네.’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청연은 슬쩍 눈을 돌려 제하를 훔쳐보았다. 그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반쯤 가리고 있었다. 그 또한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제, 제하야….”
조심스럽게 이름을 부르자 그는 고개를 아래로 푹 떨궜다. 얼굴뿐만이 아니라 귓바퀴와 목덜미까지 달아올라 마치 뜨거운 물에 삶아진 것만 같았다.
“그게… 내가 일부러 그러려고 한 게 아니고….”
뭐라고 변명해야 좋을까. 꿈속에서 연인과 입을 맞췄는데 마침 네가 옆에 있었다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너를 대체재로 이용해 버렸다고?
어떻게 설명하든 이상하게 들릴 것 같아 청연은 머리를 싸맸다. 아직 열이 식지 않아 뜨거운 머리가 어지러웠다.
“실수였어…. 미안해.”
제하는 여전히 고개를 떨군 채 말이 없었다. 주인공의 소중한 첫 키스를 빼앗아 버린 청연의 마음속엔 죄책감이 차올랐다. 원작에서 그가 스승님과 첫 키스를 한 뒤에 얼마나 감격했었는지 돌이켜 보면 저는 참수를 당해도 쌌다.
“진짜 미안해.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나도 모르겠는데…. 아무튼 실수였어. 절대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
“없었던 일로 하자. 내가 실수한 거니까 네 첫 키, 아니, 첫 접문은 아직 무사한 거야. 어때? 응?”
청연은 제하를 달래기 위해 횡설수설 말했다. 안 그래도 그와 스승님 사이의 관계가 조금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데 이런 일까지 벌어지니 난감할 따름이었다.
정신이 나가 제게 강제로 입을 맞추던 무호에게 쌍욕까지 해 놓고, 그와 똑같은 짓을 제하에게 벌였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동시에 주인공과 악역, 두 사람과 접문을 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이 청연을 죽고 싶게 만들었다.
“제하야. 나랑 얘기 좀….”
“객주님….”
드디어 입을 연 그의 목소리가 음울하게 들렸다. 아직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듯했다. 청연은 상처받았을 그를 달래 주고 싶었다.
“음, 너도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만 이런 거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의미 두지 않아도 돼. 마음 없이 한 접문이잖아. 그냥 잊어도 되는 거야.”
마음 없이 했다는 그의 말에 제하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걸 눈치채지 못한 청연은 입술을 깨물며 초조하게 반응을 기다렸다.
“객주님, 저….”
“응.”
“그, 그런 거 아니고….”
“응? 뭐가?”
“그게 아니라….”
제하는 말을 잇지 못하고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약간 울먹이는 것 같기도 했다. 한참이나 어린애한테 이게 무슨 짓인지, 청연은 아주 몹쓸 놈이 되어 버린 기분에 휩싸였다.
“객주님, 저, 저 그냥 방에 갈게요.”
“응? 그럼 자고 나서 내일 얘기할까?”
“네….”
그는 엉거주춤 의자에서 일어났다. 보기 좋게 뻗은 긴 다리가 눈에 띄게 후들거렸다. 청연은 안타까운 눈으로 방에서 떠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
다음 날, 제하는 객잔에서 보이지 않았다. 스승님께서 이쪽으로 오시기로 했으니 아예 떠난 건 아니겠지만 청연과 마주치는 게 불편해 자리를 비운 모양이었다. 덕분에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청연은 아직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일 층으로 내려갔다. 복잡한 상념에서 벗어나려면 차라리 일을 하는 게 낫겠지 싶었다. 그를 반겨 주는 직원들의 태도가 예전보다 열렬해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말이다.
마침 아침부터 찾아온 진상 손님들이 싸우다가 또 문짝을 부서뜨렸다고 들었다. 이런 일에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청연은 자연스럽게 망치를 들었다. 이제 당분간 객잔을 팔 일도, 떠날 일도 없어졌으니 부러진 건 잘 고쳐서 써야지 생각하면서.
그렇게 앉아서 망치를 두드리고 있을 때였다. 문간 위로 작은 그림자 하나가 드리웠다. 청연이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일고여덟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얼굴은 꾀죄죄했고 마른 몸에 걸친 옷은 넝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등에는 작은 봇짐을 하나 메고 있었다.
‘못 보던 앤데.’
청연은 가끔 동네 거지 아이들에게 음식을 조금씩 나누어 주고는 했다. 무협 세계관에서 혼자 다니는 아이는 조심해야 할 대상이라고들 하지만, 굶주려 죽어 가는 아이들이 널린 세상에서 차마 외면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그런데 이 아이는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물론 거지라면 집이 없을 테니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중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청연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그가 이 객잔의 주인이고, 그에게서 음식을 얻어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처럼.
“밥 먹으러 왔어?”
청연이 다정한 말투로 묻자 아이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돈이 없어서 그러는 게 뻔했다.
객잔에 찾아오는 거지 아이들이 전부 착한 건 아니었다. 그중에는 음식이나 돈을 훔치려고 시도하는 아이들도 허다했다. 반면에 이렇게 밥 달라는 소리도 못 하고 쳐다만 보는 아이들은 혹시나 해 음식을 챙겨 주면 아주 게 눈 감추듯이 먹고 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에 청연은 이해할 수 있었다.
“들어와. 배 안 고파도 밥 먹고 가.”
그는 다시 한번 아이에게 고갯짓하며 말했다. 그러자 잠시 망설이던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청연은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의 손을 잡고 객잔 안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주방에서 가까운 자리에 앉힌 뒤 수저를 가져다주었다.
“여기서 잠깐 기다려. 먹을 거 가져올게.”
청연은 뒤통수에 꽂혀 오는 해령의 따가운 눈빛을 무시하며 말했다. 해령은 거지 아이들에게 음식을 나눠 주는 걸 못마땅해했다. 한 명에게 주다 보면 소문이 나서 거지들이 몰려오게 되고, 그중 몇몇은 손님들의 돈을 훔치는 바람에 객잔 영업에 해가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직원으로서 당연한 태도였다. 그러나 빙의 전 세화가 해령과 해우를 받아 주지 않았다면 객잔이 지금까지 어떻게 굴러가고 있었겠는가. 청연은 자신이 베푸는 선의가 언젠가 또 다른 인연을 낳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리고 꼭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귀엽잖아.’
조그마한 애가 의자에 얌전히 앉아서 음식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귀여웠다. 너덜너덜한 소매 사이로 빼꼼 나온 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청연은 주방에 들어가 남은 음식을 그릇에 조금씩 담았다. 요리한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뜨끈뜨끈했다. 그가 그릇을 들고 주방에서 나가려고 할 때였다.
어디선가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려와 밖을 내다보니 점소이가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반면 그의 앞에 서 있던 덩치 큰 남자는 옷을 툭툭 털어 내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는 술을 병째로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젖은 수염을 소매로 대충 닦으며 말했다.
“에이씨… 술맛 떨어지게.”
남자에게 맞아 뺨이 붉게 달아오른 점소이는 가까스로 몸을 추스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자 남자는 커다란 한쪽 발을 들어 점소이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퍽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렸고 점소이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감히 손님 몸에 술을 흘리다니 거기서 반성이나 하거라.”
그러면서 그는 점소이의 등 위에 발 한쪽을 떡하니 올려놓았다. 지켜보던 청연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겨우 술 좀 흘렸다고 폭력에 갑질이라니 기가 막혔다. 그는 주방에서 뛰쳐나가기 위해 들고 있던 그릇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바닥에 엎드린 점소이가 애원하듯이 말했다.
“자, 잘못했습니다. 저는 그저 실수로….”
“실수?”
남자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고는 눈을 희번덕하게 빛냈다. 동시에 그의 앞에 차려진 술상을 발로 뻥 차 넘어뜨렸다. 객잔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