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4화
“객주님, 일어나세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고 조심스러운 손길이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눈 좀 떠 보세요.”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번쩍 뜬 청연은 제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깜짝 놀라 침상 구석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러자 그 사람은 황급히 어깨에서 손을 떼어 내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괜찮아요, 객주님. 저예요.”
“…….”
“저예요. 알아보시겠어요? 너무 어두우면 등을 켤까요?”
청연은 거칠게 숨을 골랐다. 이곳이 꿈속인지 현실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제하가 제가 알던 아이가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악몽 꾸시는 것 같아서 깨웠어요. 잠시만요.”
제하는 탁자로 걸어가 조그마한 등을 집어 들더니 불을 붙였다. 그걸 가져와 협탁에 올려놓으니 침상 머리맡으로 어스름한 빛이 생겼다. 그는 몸을 낮춰 청연과 눈높이를 맞추며 물었다.
“이제 좀 낫죠? 더 밝게 할까요?”
조금이나마 정신이 돌아온 청연은 가까스로 고개를 저었다. 은은한 빛을 받은 제하의 갈색 눈동자가 따뜻한 눈길을 보내왔다.
“주무시는데 깨워서 죄송해요. 그런데 너무 힘들어 보이셔서 어쩔 수 없었어요.”
“아니야….”
“잠깐만 여기 앉아도 돼요?”
청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침상에 가볍게 걸터앉았다.
“저 지금 손 뻗을 건데 놀라지 마세요. 눈물만 좀 닦아 드리려는 거니까.”
제하는 아주 느릿하게 손을 들어 청연의 얼굴로 뻗었다. 축축한 눈가를 훔치는 손길이 다정했다. 그것만으로도 큰 위로를 받는 기분이었다.
“많이 우셔서 걱정했어요.”
“…내가 너 깨운 거야?”
“아니에요. 잠들기 전이었어요.”
그의 손이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겨 주었다. 어린애에게 의지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의지하고 싶게 만드는 손길이었다.
“나 혹시 잠꼬대도 했어?”
“…안 했어요.”
“다행이다.”
“객주님.”
제하는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저 예전부터 해 보고 싶었던 게 있는데 한번 해 봐도 돼요?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뭔데?”
“일단 허락부터 해 주세요.”
“으응…. 허락할게.”
청연이 얼떨떨하게 답하자 제하는 살며시 이불을 들췄다. 그러더니 침상에 스르르 몸을 뉘어 이불 속으로 쏙 들어왔다.
“이게 뭐 하는 건데?”
“가만히 있어 보세요.”
옆으로 마주 보고 누운 두 사람의 거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천천히 다가오던 제하는 청연의 코앞에서 멈추더니 한쪽 손을 뻗어 청연의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뭔데?”
“저 어렸을 때 악몽 꾸면 객주님이 해 주셨던 거요.”
“아….”
그런 것마저 기억하고 있었다니. 청연은 묘한 기분이 들어 제하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시선이 갈 곳을 잃고 방황했다.
“이걸 예전부터 해 보고 싶었어?”
“네….”
“왜? 이게 그렇게 인상 깊었어?”
“에, 뭐, 어렸을 때의 좋은 기억이고… 부모님 생각도 났고….”
제하는 당황한 듯 눈을 굴리며 답했다. 그러더니 곧 화제를 돌렸다.
“객주님은 대체 무슨 꿈을 꾸셨길래 그리 슬피 우셨어요?”
“네가 나왔어.”
“제가 나왔는데 슬프셨어요? 왜요?”
꿈 내용을 말해 주려던 청연은 말문이 막혔다. 그런 끔찍하고 재수 없는 꿈에 대해 제하에게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특히 스승님의 죽음에 대해서는 절대 말할 수 없었다.
“네가 나한테 차갑게 말했거든. 비웃고, 비꼬고, 타박하고.”
“제가요?”
제하의 놀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얼굴을 보고 장난기가 발동한 청연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네가 나한테 엄청 못되게 말했어. 장사를 그렇게 해서 먹고는 살겠냐, 지나가는 개도 그런 음식은 안 먹겠다 하면서.”
“말도 안 됩니다! 제가 객주님 음식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얼마나 모질게 말하는지 눈물이 다 나더라. 장사 접어야 할지 잠깐 고민했어.”
“그럴 리가요….”
점점 울상으로 변해 가는 제하의 얼굴을 보며 청연은 웃음을 삼켰다.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순진한 구석이 있는 아이였다.
“어째서 그런 꿈을 꾸셨지? 제가 객주님께 그런 말 하지 않는다는 거 아시잖아요.”
“응응. 잘 알지. 겉으로는 말 안 해도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거.”
“객주님!”
“농담이야, 농담. 다 거짓말이야, 바보야.”
청연은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울먹거리는 제하의 볼을 꼬집었다. 덕분에 울적했던 기분도 모두 날아가 버렸다.
“너무해요….”
“장난이야. 너 착한 거 누가 몰라? 말도 항상 착하게 하는데. 남궁 공자랑 싸울 때만 빼면.”
“그건 공자님이 먼저 건드리시니까…. 객주님이 싫으시면 참겠습니다.”
제하가 귀여워 미소 짓던 청연은 순간 뇌리를 스치는 기억에 얼굴을 굳혔다. 도경과 싸울 때를 제외하고도 그가 험한 말을 내뱉을 때가 있음을 기억해 낸 것이다.
원작 꾸금 씬에서.
평소 스승님께 커다란 강아지처럼 굴던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강아지가 아니라 그냥 개였다.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돌변한 그가 내뱉던 대사 몇 줄을 떠올린 청연은 더 이상 웃을 수 없게 되었다. 생각만 해도 귀가 더럽혀지는 기분이었다.
흐린 눈을 하고 대충 넘겨 버린 장면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 걸 보면 상당히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스승님의 앞에서 입에 담지 못할 말들을 줄줄 읊으며 명령까지 내리던 그의 모습이 말이다.
한동안 잊고 있었다. 제 앞에 누운 이 녀석은 민아의 취향으로 범벅된 절륜 연하공이라는 사실을. 낮에는 져도 밤에는 이기는 놈이라는 것을.
“왜 그러세요? 어디 불편하세요?”
“…너 이제 네 침상으로 가.”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아니, 그런 거 아니니까 일단 가 봐.”
“객주니임….”
“아, 좀 떨어져!”
청연의 격한 거부 반응에 놀란 제하는 귀와 꼬리를 축 늘어뜨린 강아지가 되고 말았다.
***
다음날, 두 사람은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사천 성도에 도착했다. 제하는 곧장 객잔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청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일에 열심이시고 객잔 식구들을 아끼시는 분인데 그간 얼마나 마음고생하셨을까 생각하면 안타까웠다.
들어가자마자 직원들에게 둘러싸인 청연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통곡에 진땀을 빼며 그들을 달래기 바빴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자니 괜히 질투가 났지만, 청연의 앞에서 티 내고 싶지 않아 애꿎은 문지방만 발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저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객주님 정말 돌아가신 줄 알았단 말이에요!”
“안 죽었으니까 그만 울어….”
“얘는 상심해서 그동안 밥도 제대로 못 먹었어요.”
“그래? 낯빛은 더 좋아진 것 같은데….”
제하는 솔직하게 반응하는 그의 답변을 들으며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너희는 그동안 장사를 한 거야? 주인장이 없는데도?”
“저희도 돈은 벌어야죠. 객주님 사라졌다고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총관님이 급료도 꼬박꼬박 챙겨 주셨어요.”
“와…. 나는 여기 없어도 되겠는데?”
“안 돼요!”
“나 그냥 갈래. 마교로 사라질 테야.”
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제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객잔에서 나가는 시늉을 하는 청연을 막아섰다. 그의 옷자락을 붙들고 줄줄이 늘어선 직원들이 울상을 지었다. 하여간 이립이 넘은 나이에도 가끔 이렇게 이상한 행동을 하신다.
“어딜 가세요. 어서 들어가 쉬셔야죠.”
제하가 청연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하자 그는 짐짓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 네가 막으니까 어쩔 수 없지. 이번에만 참을게.”
그렇게 말한 청연은 자신을 붙잡은 손들을 휘휘 털어 내고 한동안 비워 두었던 이 층 방으로 향했다. 제하는 그의 걸음걸이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안 그런 척해도 그가 많이 지쳐 있다는 사실을.
아니나 다를까 청연은 그날 밤부터 앓아누웠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아니면 마차 안에서 고생한 데다 약도 걸러서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제하는 그를 성심성의껏 간호했다. 다행히도 연락이 닿은 스승님께서 곧 이곳으로 오겠다고 하셨으니 머지않아 객주님의 건강 상태를 제대로 점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빨리 빈방에 가서 쉬어…. 너 아직 환자잖아.”
제하는 열이 오른 채 웅얼거리는 청연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발그레한 뺨 위로 느릿하게 깜빡이는 눈매와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 속눈썹이 자꾸만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픈 사람을 상대로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얼굴을 밤새도록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다 나았습니다.”
“거짓말.”
“진짜예요. 하나도 안 아픕니다.”
“왜 내 주변 애들은 죄다 거짓말쟁이가 되는 거지.”
“예?”
“아니야….”
그의 목소리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이미 약도 달여 드렸고, 찬 물수건으로 몸도 닦아 드렸는데 열이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스승님께 의술을 배우기는 했지만 확실히 할 줄 아는 거라고는 간단한 외상을 다루는 게 전부였다. 제하는 그 이상 파고들지 않은 걸 내심 후회했다.
“주무세요. 제가 여기 있을게요.”
“으응…. 나 잠들면 너도 꼭 가서 자야 해?”
“걱정 마세요.”
제하는 청연의 눈이 감기는 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윽고 그에게서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
‘주무시는 모습도 참으로 곱다.’
눈을 뜨고 계실 땐 반짝이는 눈동자가 고왔고, 눈을 감고 계실 땐 연지라도 찍어 바른 듯 붉은 입술이 고왔다. 그를 알게 된 지 구 년이나 지났음에도 여전한, 아니, 심지어 세월이 흐를수록 아름답게 여물어 가는 미모였다.
그렇게 제하가 청연의 입술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마침 그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시랑….”
또 그 이름이다. 어젯밤에도 눈물을 펑펑 쏟으며 부르짖던 그 이름.
순간 머리끝까지 더운 기운이 올랐다. 객주님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지 말자, 유치하게 질투 같은 거 하지 말자 되뇌던 다짐마저 삼켜 버릴 만한 열기였다. 제하는 마른세수를 하며 절절 끓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객주님.”
“…시랑.”
“저한테 왜 이러세요.”
제하는 생각했다. 이건 전부 내 앞에서 낯선 사내의 이름을 반복하여 부르신 객주님의 잘못이다. 그리하여 열이 오른 내 머리가 조금 이상해진 것뿐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자신을 합리화했다.
그는 고개를 내려 살짝 벌어진 청연의 입술을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