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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객잔 정상 영업합니다 (49)화 (50/145)

049화

문을 박차고 들어간 곳엔 붉은 옷을 입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무호를 바라보았다. 언제 보아도 기분 나쁜 웃음이 그의 입가에 걸렸다.

무호는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남자의 목덜미를 쥐었다. 그대로 탁자 위에 내리꽂자 방 전체가 쿵 하고 크게 진동했다.

탁자가 쩌적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입에서 새어 나온 웃음소리가 날카롭게 신경을 긁고, 깨진 찻잔과 주전자에서 흐른 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무호는 살기 짙은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손끝에 내공을 실었다.

강력한 힘이 무호의 손가락 끝에서 남자의 목덜미로 전해져 들어갔다. 이 힘으로 그의 기혈을 뒤틀고 근골을 제멋대로 움직이게 할 것이다. 미쳐 버릴 만큼 큰 고통을 주어도 모자라지 않을 원한이 가슴 속에 남아 있었다.

“이, 인사가 너무 거칠지 않나?”

남자는 휘몰아치는 고통에 몸을 떨면서도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를 냈다.

“살살해, 살살. 아프잖아.”

“지난번에도 말했을 텐데. 다시 찾아오면 사지를 잘라 벽에 걸어 놓겠다고.”

“나도 지난번에 말했지. 네놈이 불구로 만들어도 나는 언제든지 자폭할 수 있다고.”

남자의 입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사지를 뒤틀면서 벌벌 떠는 것만으로도 고통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꿋꿋하게 말을 이어 갔다.

“내가 자폭하면 너한테도 좋을 거 없을 텐데. 안 그래?”

“…….”

“동귀어진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십칠.”

무호는 남자의 목덜미를 잡고 있던 손을 떼어 내며 그가 앉아 있던 의자를 걷어찼다. 의자와 함께 바닥에 나동그라진 그는 입 안에 고인 피를 뱉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피를 뿜어 대는 모습이 구 년 전 그날과 같았다.

혈마. 혈교의 수장이 되어 돌아온 그는 구 년 전에 죽은 것으로 알려진 천마신교의 소교주였다.

그는 무호에게 패해 죽기 직전까지 간 뒤 그 후유증으로 무공을 제대로 익히기조차 힘든 처지가 되었다. 그런 그가 혈마라는 칭호를 얻게 된 건 어려서부터 은밀하게 쌓아 온 혈교와의 인연으로 사술에 통달한 덕분이었다.

“우, 우리 아버지 팔자도 참 기구해. 개 한 마리 키워 보겠다고 아들까지 내쳤는데 그 개한테 물려 죽는 꼴이라니. 사실 나도 많이 놀랐어. 네가 이렇게 일찍 교주가 될 줄은 몰랐거든.”

“그 혀부터 뽑아 줄까.”

“손 치워. 뽑는 순간 어떻게 될지 너도 알잖아.”

혈마가 웃음을 터뜨리자 핏방울이 이리저리 튀었다.

“아버지가 지금 이 상황을 보면 뭐라고 생각하실까? 정성 들여 키운 개가 결국엔 아들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는데. 그때 네가 내 제안을 받아들이기만 했어도 여기까진 안 왔을 거다.”

“…….”

“잘 생각해, 십칠. 너는 죽을 때까지 나한테서 못 벗어나. 네놈 다섯 살 때부터 장장 십구 년을 공들인 일이라고.”

그의 붉게 번뜩이는 두 눈이 무호를 응시했다.

“이제 일 년 남았어.”

***

탁자에 엎드린 채 잠들었던 청연은 다리가 저려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비몽사몽 한 와중에 허벅지를 주먹으로 통통 두드리며 부은 눈을 뜨려 애썼다. 술을 얼마나 마신 건지 머리가 띵하게 아팠다.

“와…. 이걸 다 마셨냐. 대단하다, 대단해.”

탁자 위에 나뒹구는 술 단지를 발견한 그는 이마를 짚었다. 그 독한 술을 다 마셨으니 당연히 기억도 전부 날아갔다. 혼자서 마신 덕분에 남들에게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마른세수를 하던 청연은 제 오른쪽 손목에 매달려 팔랑거리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을 비볐다.

‘이건….’

그게 무엇인지 똑똑히 본 순간, 그의 입이 벌어졌다. 손목에 묶여 있는 것은 머리 끈이었다. 얼마 전에 무호에게 빼앗겼던 푸른 머리 끈.

이게 돌아왔다는 건 무호가 방에 왔었다는 뜻이다. 혹시 그에게 말실수라도 했을까 불안해진 청연은 제 이마를 내리쳤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설마 또 청소하고 다닌 건 아니겠지.’

불길한 예감에 청연은 빠르게 방 안을 둘러보았다. 벽에 걸려 있던 그림과 곳곳에 놓여 있던 도자기들이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방 한쪽 구석에 쌓여 있는 장식품들을 발견했을 때, 청연은 혀라도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창피해 죽겠네….”

대학에 다닐 때 생긴 이상한 술버릇이었다. 술만 취했다 하면 과실과 동아리실, 심지어 술집까지 정리하고 다닌 탓에 인간 청소기라는 별명이 붙었다. 일부러 저를 자취방에 불러들여 술을 먹이던 선배들이 나타난 뒤엔 절대 취할 때까지 먹지 않기로 다짐했었는데.

그런데 이런 모습을 한참이나 어린놈한테 들키다니. 얼마나 한심해 보였을까.

차게 식은 차를 한 잔 따라 마시고 이성을 되찾은 청연은 머리를 묶었다. 방을 청소하기 전 원래 상태로 되돌려 놓을 작정이었다. 그리고 무호가 다시 돌아오면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잡아뗄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가던 그는 발에 무언가 밟히는 느낌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발밑에 웬 붓 한 자루가 떨어져 있었다.

‘붓이 왜 여깄지?’

청소한다고 돌아다니다가 흘린 건가.

청연은 붓을 주워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떼려는데, 손가락에서 무언가 반짝하고 빛났다.

“어?”

손을 들어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믿을 수 없게도, 그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는 생전 처음 보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세밀하게 가공된 은반지는 원래부터 제 것이었던 양 손가락 둘레에 딱 맞았다. 꽃인지 불꽃인지 알 수 없는 추상적인 형태가 촘촘히 새겨진 가운데 영롱하게 빛나는 홍옥 하나가 박혀 있었다. 청연은 붉은빛을 내뿜는 보석에 시선을 빼앗겼다.

‘이게 뭐야?’

오른 손목에 머리 끈을 묶어 놓고 간 사람이 무호라면, 왼손에 반지를 끼워 놓고 간 사람 또한 그일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걸….

“이 미친놈이.”

반지의 의미를 알아챈 청연은 육성으로 험한 말을 내뱉을 뻔했다. 분명 어제 일을 보고받았을 터였다. 우연히 만난 아이에게 꽃반지를 끼워 주며 제가 했던 말까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전해 들었겠지. 혼약이니 뭐니 쓸데없는 말을 지껄였던 게 뼈저리게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이런 반지는 결코 받아서는 안 된다. 애초에 마음도 없는 상대에게 선물을 받는 건 실례였다. 무호가 찾아오면 이걸 반드시 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내려던 그때였다.

땅을 뒤흔드는 엄청난 진동에 청연의 몸이 휘청했다. 동시에 탁자 위에 있던 술 단지가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여기저기 널린 파편들을 바라보던 청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그날의 기억이 스쳐 지나간 탓이다. 무호를 두고 시장에 갔던 날, 귀를 찢을 듯한 굉음과 함께 땅을 울리던 진동. 그리고 굴러떨어지던 사과.

쾅, 쾅,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그날의 굉음과 닮아 있어 몸을 얼어붙게 했다. 다시 한번 세상이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의 정신은 구 년 전 그날의 기억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더 이상 그 애를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누구에게도….

“주군! 이러시면 안 됩니다!”

문밖에서 들려온 지홍의 다급한 목소리가 아득해졌던 청연의 정신을 깨웠다.

“벌써 교인 십여 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한동안 안 그러시더니 어찌 또….”

“비켜라.”

“이곳만은 안 됩니다. 이 안에 누가 계신 줄 아시잖습니까.”

“…….”

이윽고 굳게 닫혀 있던 문이 펑 터지는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갔다. 검은빛의 강기1)가 날아와 문을 부순 것이다.

이성을 찾은 청연은 그 자리에 선 채 크게 심호흡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무호는 저를 해치지 않을 테니 지레 겁먹고 달아나지 말자고 스스로 되뇌었다.

거침없이 방 안으로 들어온 무호는 한 손에 대도를 들고 있었다. 매서운 칼날 주변으로 검은 기운이 겹겹이 응집되어 구름처럼 흘렀다. 검은색이었던 그의 눈동자는 어느새 붉은 빛을 띠며 청연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홍의 말에 대답하던 걸로 미루어 봐선 조금이나마 이성을 가지고 있었고, 폭주하는 중이라고 생각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지금 그의 모습은 원작에 나왔던 천마를 연상시켰다. 무자비하고 냉혹한 살인마.

청연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면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이번에는 위험에 빠진 사람이 그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과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났다면, 또 무력하게 지켜봐야만 했다면 정말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이미 강해질 대로 강해져 그 누구도 넘볼 수 없게 되어 버린 사람이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선 여전히 그를 열다섯 어린 소년으로 인식하고 있었나 보다. 지켜 주지 못해서 더 마음이 쓰였던 아이.

“그거 내려놔.”

청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내뱉었다.

“내려놓고 이리 와.”

“…….”

“천무호.”

“…….”

“무호야.”

여러 번 반복해서 이름을 부르자 그의 눈에 자리했던 붉은 기가 조금이나마 사그라들었다. 곧이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커다란 대도가 떨어져 내렸다. 청연은 용기를 내어 그에게로 한 걸음씩 다가갔다.

“조금 쉬고 나면 괜찮을 거야. 일단 한숨 자자. 자고 나서….”

청연은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순식간에 허리를 잡혀 끌려간 그의 입술이 틀어막혔다. 숨 쉴 틈도 없이 거칠게 입술 사이를 파고드는 무언가에 놀란 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다시금 붉은빛을 띤 채 활활 타오르는 무호의 두 눈이 바로 앞에서 청연을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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