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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객잔 정상 영업합니다 (48)화 (49/145)

048화

그날 밤, 힘겨운 목욕 시간이 지난 후 청연이 알게 된 사실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제가 머물던 방이 무호의 방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교주의 방에 들어앉아 있었다니 호위대 사람들이 저를 그렇게 극진히 모시던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럼 여태 어디서 잤어?’

‘안 잤는데.’

‘미치겠네. 차라리 나한테 다른 방을 주든가. 아니, 그냥 집에 보내 주면 안 돼?’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얼굴이 굳고 손에 힘이 들어가던 무호를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했다. 입을 합 다문 청연은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 방으로 돌아왔고 다시 감금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애가 어렸을 때 내가 무슨 말을 잘못했나? 어쩌다 이렇게 뒤틀린 연애관을 갖게 된 거지?’

아무리 고민해 봐도 제 탓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무호가 자란 환경이 문제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가 하루에 한 번 정도는 외출을 허락했다는 것이다. 그마저도 겨우 반 시진으로 제한되었지만 종일 갇혀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오늘도 무사 두 명을 거느리고 나온 청연은 대충 햇볕이 잘 드는 풀밭을 골라 자리를 깔고 앉았다. 어차피 여기서 제가 할 수 있는 일도 없으니 바람이라도 실컷 쐬다 들어갈 작정이었다.

“옆에 앉으실래요?”

“아닙니다.”

재미없긴.

지홍을 제외한 다른 무사들은 청연에게 먼저 말을 걸거나 대화를 이어 가지 않았다. 몇 걸음 떨어져서 지켜보다가 겨우 묻는 말에 딱딱하게 대답이나 할 뿐이었다.

‘저것도 다 교주의 명인가.’

할 일이 없어 금세 지루해진 청연은 풀밭에 난 조그마한 들꽃을 엮어 반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반지가 열 손가락을 모두 채워 갈 때쯤, 근처에서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번의 그 아이들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평신도처럼 보이는 어른 서너 명도 섞여 있었다. 다 같이 나들이라도 온 듯 평화로운 모습에 청연은 시선을 빼앗겼다.

‘원작에 나온 마교랑 왜 이렇게 다른 건데? 그 죽고 죽이는 불지옥은 다 어디로 간 거냐고.’

그때 청연을 발견한 한 남자가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어? 교주님의 친우분 아니십니까?”

“저를 아세요?”

“알다마다요. 교주님의 친우분이 방문하셨다고 본교에 소문이 자자합니다. 처음 뵙는 얼굴인 데다 외지인처럼 보이시니 당연히 그분이신가 했습죠.”

방문한 게 아니라 잡혀 온 건데. 그나저나 대외적인 신분은 친우인 건가.

교주의 친구에게도 거리낌 없이 말을 건네는 모습이 역시 원작에서 그려진 마교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여기서 홀로 뭐 하고 계셨습니까?”

“아, 그냥 시간이나 때우고 있었습니다.”

청연은 그에게 대답하며 아이들을 힐끔 바라보았다. 오늘도 제게 초롱초롱한 눈빛을 잔뜩 보내오는 게 부담스러웠다. 지난번에 지홍에게 혼이 나서 그런지 선녀님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지만 말을 걸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이거 가질래?”

청연은 손가락에 끼고 있던 꽃반지를 빼내 맨 앞쪽에 서 있던 여자아이에게 건네며 물었다.

“반지야. 손가락에 끼는 거.”

“우와….”

아이는 꽃반지를 손바닥에 올려 둔 채 기쁜 듯이 바라보았다.

“손 줘 봐.”

청연은 아이의 손을 잡고 손수 반지를 끼워 주었다. 제 손가락에 딱 맞게 만든 탓에 아이의 손가락에서는 둘레가 남아 빙글빙글 돌았다.

“내가 살던 곳에서는 혼약을 맺을 때 이렇게 하거든. 상대방 손에 반지를 끼워 주는 거야.”

“그럼 저랑 방금 혼약을 맺으신 거예요?”

“어? 아, 아니.”

조그마한 아이가 얼굴을 붉히며 묻자 청연은 당황했고 다른 어른들은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치, 친구들끼리 똑같은 반지를 나눠 끼기도 하니까…. 너희도 이리 와.”

그는 제 열 손가락에 끼고 있던 꽃반지를 모두 빼내 아이들에게 나눠 주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이 흘러 방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뒤쪽에 서 있던 무사 한 명이 큼큼 헛기침하며 그에게 눈치를 주었다.

“저는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청연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맨 처음 그에게 말을 건넸던 남자가 급히 들고 있던 짐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걸 가져가십쇼.”

“이건….”

그가 건넨 건 묵직한 술 단지였다.

“명주는 아니나 저희가 직접 담근 술이니 맛이 괜찮을 겁니다. 교주님의 손님은 저희에게도 귀인이시니 술대접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주셨으니 감사히 먹겠습니다.”

방으로 돌아갈 생각에 울적했던 청연은 하마터면 감격의 눈물까지 흘릴 뻔했다. 드디어 방에 가서 할 일이 생겼다. 술 진탕 마시고 뻗어서 자는 거.

평소 음주를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곳에 온 뒤 술이 그렇게 고플 수가 없었다. 혹시나 술마저 빼앗길까 불안해진 청연은 단지를 품속에 소중히 안았다.

***

“술을 드시고 계신다고 합니다.”

“술을?”

“예. 우연히 마주친 신도 한 명이 직접 담근 술이라며 선물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무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곧장 방으로 향했다. 교인들이 담그는 술이라면 저도 한 번 마셔 본 적이 있는데 제법 독했다. 그 독한 술이 청연의 몸에 좋을 리가 없었다.

문 앞에 도착하자 무사들이 옆으로 물러나며 무릎을 꿇었다. 무호는 그들이 보이지도 않는 듯이 지나쳐 문을 열어젖혔다.

공기 중에 알싸한 술 냄새가 맴돌았다. 탁자 위에는 이미 비어 버린 술 단지가 나뒹굴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앞에 앉아 있어야 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무호는 침상 앞에 서서 분주히 몸을 움직이고 있는 청연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일부러 발소리를 크게 내며 그에게 다가가니 인기척을 느낀 그가 스르륵 뒤를 돌아보았다.

“왔어?”

순간 무호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저를 볼 때면 늘 겁을 잔뜩 집어먹어 두려움을 담고 있었던 두 눈이 오늘은 곱게 휘어진 채 반짝거렸다. 청연이 밝게 웃고 있었다.

‘예쁘다.’

그는 잠시 아득해졌던 정신을 다잡고 청연에게 물었다.

“뭐 해?”

“정리 정돈! 이거 봐. 깔끔하지?”

청연은 헤헤 웃으며 정리된 침상을 가리켰다.

깔끔하긴 한데… 곧 잘 시간 아닌가?

무호는 청연이 술에 취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유심히 살폈다. 평소보다 뺨이 약간 붉었지만 눈빛이 또렷했고 발음도 명확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제정신이었다.

“저기도 봐. 내가 너 대신 다 치웠어. 고맙지?”

“뭘… 아.”

그가 가리킨 곳에는 방 안을 장식했던 장식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저걸 치운다고 한군데 다 모아 놓은 건가.

“어우, 난 저렇게 정신없는 건 딱 질색이야. 깔끔한 게 좋아.”

좋아할 줄 알고 일부러 꾸며 놓은 건데. 다 치워 버리는 편이 낫겠다.

“아. 방에 빗자루가 없더라? 빗자루 어딨는지 알아?”

“뭐 하게.”

“뭐 하긴. 바닥 쓸어야지. 가만히 있지 말고 너도 좀 도와. 오늘은 대청소다.”

취했구나.

교주에게 바닥을 쓸라니, 누군가 들었다면 식겁했을 소리였다. 무호는 방 안을 바쁘게 돌아다니는 청연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상상도 못 한 술버릇이었다. 그것도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귀엽다.’

누군가에게 귀여움받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청연은 이상한 가락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방을 뒤졌다.

“빗자루우가 어디 있을까아… 찾았다!”

그러면서 그가 집어 든 것은 겨우 붓 한 자루였다. 무호는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다가가 붓을 빼앗았다.

“그거 내놔. 빗자루가 있어야 청소를 하지.”

“이걸로 하려면 밤새워야 해.”

“아, 그런가?”

그런가는 또 무슨 그런가야.

무호는 붓을 대충 던져 버리고 청연을 의자로 데려가 앉혔다. 정신을 좀 차리라는 의미에서 차게 식은 찻잔을 건네니 의심도 없이 꿀꺽꿀꺽 받아 마셨다. 청연은 빈 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청소해야 하는데….”

“다 했어.”

“다 했어? 언제? 바닥도 쓸었어?”

“방금 쓸었어.”

“누가? 내가?”

“네가.”

금세 좋다고 웃는 청연의 얼굴에는 한 치의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구 년 전 무호를 대하던 것처럼.

저렇게 술에 취해 경계를 푼 채 웃고 있는 걸 보니 자꾸만 마음이 동했다. 여기까지 잡아 와 가둬 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강압적으로 군 걸 알고 있기에 더 이상 건드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 얼굴만 보면 굳은 결심도 무너지고 만다.

유일하게 저를 인간처럼 대접해 준 사람이었다. 방을 내어 주고, 식사를 함께 하고, 실없는 농담을 던지고. 그런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처음으로 알게 해 준 사람. 중간에 오해가 있었지만 진실을 알게 된 이상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당신을 그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고 혼자서만 보고 싶은 욕심에, 내 곁에만 두고 싶다는 이기적인 마음에 이곳까지 끌고 왔다고. 그렇게 말하면 이해해 줄까.

무호는 손을 뻗어 청연의 뺨을 쓰다듬었다. 약욕을 해서인지 더욱 매끄러워진 살결의 감촉이 자극적이었다. 술인지 차인지 모를 것에 촉촉하게 젖은 입술만 눈에 들어왔다.

술이 올라 발그레한 얼굴로 무호를 올려다보던 청연은 어느새 웃음을 멈추고 울적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미안해.”

“뭐가.”

“그날 널 혼자 둬서. 옆에 있어 주지 못해서….”

“…….”

“다 내 잘못 같아서 계속 후회했어. 미안해.”

이거 봐. 또 당신이 먼저 사과하잖아. 지금 납치당해서 위험한 상황인 건 알고 있냐고.

무호는 한숨을 쉬며 그의 뺨을 만지던 손을 떼어 냈다. 술 취한 사람을 상대로 이게 무슨 짓인지 스스로가 한심했다. 강제로 탐하겠다 마음먹는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겠지만 그런 식으로 상처를 주는 건 저도 원하지 않았다.

그 마음을 알 리 없는 청연은 피곤해졌다며 탁자 위에 엎드렸다. 그는 한쪽 팔을 베고 머리를 뉜 채 무호를 바라보며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 마…. 그런 거.”

“뭐를.”

“전쟁.”

조금 전에는 미안하다더니 이번에는 뜬금없이 전쟁 타령이다. 뭔가 알고 하는 소린가.

“나는 너 죽는 거 싫어.”

“…내가 죽어?”

“으응. 그러니까 하지 마.”

무호는 말없이 청연을 내려다보았다. 예쁜 눈이 서서히 감기고 긴 속눈썹 아래로 그림자가 드리울 때까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 봉우리에 발을 들여놓는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교인들과는 다른, 그리고 청연과도 다른 어떤 존재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 작은 기척에도 심기가 불편해진 무호는 얼굴을 구겼다. 이윽고 문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주님. 혈마가 찾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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