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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객잔 정상 영업합니다 (46)화 (47/145)

046화

“알았어, 알았어. 도망 안 갈 테니까 이것만 좀 놓고 얘기하면 안 돼?”

청연은 허리에 두른 무호의 팔을 풀어 내려 용을 쓰며 애원했다. 옷을 입고 있긴 했지만 바로 등 뒤에 그의 벗은 몸이 밀착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심지어 물에 젖은 옷이 자꾸만 피부에 찰싹 달라붙어 살이 다 비쳐 보이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된 이상 그의 마음을 끝까지 모르는 척해야겠다. 섣불리 거절했다가는 정말 발목이 날아갈지도 몰랐다.

“남자들끼리 이게 뭐 하는 짓인데! 목욕은 각자! 각자 하는 거야!”

“사내끼리라서 괜찮다며.”

“뭐? 내가 언제?”

“어렸을 때.”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무호를 돌아본 청연은 그의 검은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치는 순간 혀라도 깨물고 싶어졌다. 그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전부 기억해 냈기 때문이다.

열다섯 살의 무호가 청연의 방문을 기척도 없이 벌컥벌컥 열어젖히던 그 시절, 한번은 청연이 목욕하던 중 그가 방 안에 들이닥쳤다. 얼굴이 새빨갛게 익은 그에게 ‘사내끼리 뭐가 그렇게 민망하냐’며 놀린 전적이 있었다. 심지어 함께 목욕하겠냐고 권하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이런 걸 의미한 건 절대 아니었다. 그냥 어렸을 때 친구들이랑 목욕탕 같이 가는 것처럼 사심 없이 함께 씻자는 뜻이었다. 그런데 이놈은 지금 사심이 넘쳐흐르다 못해 흑심이 되었다.

‘내가 애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청연은 고통스러워하며 이마를 짚었다. 생각 없이 했던 모든 행동이 업보가 되어 돌아오고 있었다.

“환장하겠네.”

“기억이 다 났나.”

“몰라…. 너 그냥 말 걸지 마.”

“어차피 며칠 전에도….”

“그 얘기도 하지 마. 제발.”

욕통에서 잠들었던 그날 밤에는 무호가 저를 안아다 옷을 입히고 침상에 눕혀 놓은 걸 알고 있었다. 다만 그때는 잠결이었다. 맨정신에 떠올리기엔 민망해서 없었던 일로 치부해 버린 터라, 그의 입으로 다시 듣고 싶지 않았다.

자포자기한 청연은 버둥거림을 멈췄다. 혈도를 짚어 움직이지 못하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허리만 안은 채 내버려 두는 걸 보면 은근히 저항을 즐기는 타입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이제 변명이나 들어 볼까.”

“뭐. 무슨 변명을… 아.”

맞다. 그의 본명과 고향에 대해 어떻게 알았는지 설명해야 했다. 청연은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내뱉었다.

“내가 다른 세계에서 왔어.”

“…….”

“그래서 다 알고 있어. 네 과거도, 이 세계의 결말도.”

사실 결말에 대해서는 이제 확신할 수 없지만.

청연은 그렇게 말하며 무호를 돌아보았다. 역시나 ‘지금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라는 말이 얼굴에 쓰여 있었다.

“농담이야.”

“재밌군.”

“웃지도 않으면서 그런 말 하지 마. 아무튼 내가 너의 과거를 알게 된 건….”

“…….”

“하오문. 난 사실 하오문 소속이야. 정보가 아주 많아. 강호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지.”

그는 이번에도 역시 무호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이건 또 무슨 헛소리냐.’

이것도 안 믿으면 뭐라고 거짓말을 해야 하나 청연이 열심히 고민하고 있을 때, 비웃는 듯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그럼 그런 걸로 하지.”

“어?”

“하오문도인 걸로.”

무호는 청연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목 부근에 그의 숨결이 닿아 와 젖은 살갗이 간지러웠다.

‘그냥 넘어가 주는 건가…?’

변명이라면서 헛소리만 찍찍 해 대는 게 불쌍해 자비를 베풀기로 한 걸까. 조금 희망이 생긴 청연은 제 허리 위에 놓인 무호의 손등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그럼 너도 한 가지 대답해 줘.”

“뭐를.”

“지하 감옥에 장 씨 말이야. 그 사람은 왜 거기 잡아 둔 건지. 진짜 그 사람이 널 밀고한 거야? 그리고 너는 그때 그 아래서 뭐 하고 있었어? 아니, 그보다 앞서서 너는 나 믿어? 내가 널 팔아넘긴 게 아니라는 걸?”

“질문이 한 가지가 아닌데.”

“그게 중요해? 얼른 대답이나… 야 씨, 너 지금 어딜 만져!”

갑자기 아래를 향하는 무호의 손 때문에 청연은 화들짝 놀랐다. 그의 팔을 퍽퍽 때려 보아도 물속인지라 아무 소용이 없었다.

“뭐, 뭐, 뭐, 뭐 해!”

“좀 가만히 있어.”

밑으로 슬금슬금 내려가던 그의 손은 청연의 아랫배에서 멈췄다. 기다란 손가락이 배 위를 이리저리 짚어 보며 느릿하게 움직였다. 긴장한 청연은 숨도 쉬지 못하고 그의 손짓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이어서 그는 청연의 왼쪽 팔을 잡았다. 축축하게 달라붙은 옷소매가 걷히고 그의 손가락이 팔목 위에 놓이자 청연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건강 검진을 하는 건가.

“더 다치지는 않았네.”

“뭐를?”

“단전.”

“어? 너 그거 알고 있었어? 언제부터? 처음부터?”

청연이 우다다 묻자 무호는 성가시다는 표정을 지으며 걷어 올렸던 소매를 내려 주었다.

“그걸 왜 몰라?”

“아…. 그게… 그게 느껴졌구나.”

청연은 제가 처음 빙의했을 때를 떠올렸다. 애초에 빙의자였던 터라 내력을 느끼는 방법을 전혀 몰랐고, 따라서 단전이 파괴되어 있음을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그래서 의원인 소명에게 진찰받은 후에야 알게 되었는데.

“알면서 왜 아무 말 안 했어?”

무호는 청연의 질문을 가볍게 무시하며 다시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대로 밤새 놓아 주지 않을 기세였다. 청연은 한숨을 내쉬며 푸념했다.

“됐다. 네가 나한테 뭘 알려 주겠어. 다 필요 없고 내 머리 끈이나 돌려줘. 머리 자꾸 흘러내려서 불편하잖아.”

“…….”

“그것도 싫어? 안 돌려주면 방에 있는 휘장 찢어서 만들 거야. 그거 비싸 보이던데.”

“…….”

“돈이 아주 넘쳐 나지? 방 안에 무슨 사치품이 그렇게 많아? 도자기에 그림에 황금 거북이에. 너 어렸을 때만 해도 돈 한 푼도 없어서 나한테 받아다 썼잖아. 기억 안 나? 야, 지금 내 말 듣고 있어?”

“잠깐.”

청연이 투덜거리는 내내 딴청을 피우던 무호는 한 손을 물 밖으로 들더니 수풀 바깥을 향해 손가락을 대충 튕겼다. 그러자 그쪽에서 퍽 하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손을 도로 내린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청연을 안았다.

“마저 말해.”

“방금 뭐야? 밖에 누가 왔어?”

“벌레가 날아다녀서.”

“너 거짓말 좀 하지 마. 벌레한테서 어떻게 퍽 소리가 나? 내가 너 어렸을 때 잠깐 키웠다고 너까지 거짓말쟁이가 되면 어떡해? 아니, 그리고 거기 다리 좀 치워 봐. 아까부터 불편해 죽겠네.”

“…….”

“아….”

다리가 아니구나.

급격하게 싸해진 분위기에 청연은 먼 산을 바라보며 속으로 눈물만 줄줄 흘렸다.

‘내가 잘못했다. 그렇게 무서운 표정만 짓지 말아 주라!’

***

‘주군께서 저리도 기분 좋은 표정을 지으시는 건 처음 본다.’

지홍은 멀리서 두 사람을 지켜보며 미소 지었다. 진식을 이용해 청연이 여기까지 오도록 유도한 작전이 아주 잘 먹혀들었다. 혹시나 주군께서 노하셔 분근착골을 당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중간에 그에게 전음을 보내 행복한 시간을 방해했다가 탄지공에 얻어맞고 피를 토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 주군께서 보내신 고마움의 표현이나 다름없었다. 정말로 노하셨다면 이마 한가운데 구멍이 뚫렸을 것이다.

‘아무튼 부인이라면 사족을 못 쓰신다니까.’

그토록 냉랭하고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분이 정인의 곁에선 저렇게 인간적이고 부드러워지는 걸 보면 신기할 따름이었다. 지홍은 주군의 취임 직후에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회상했다.

‘첫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당시 호위대에 소속되기 전이었던 지홍은 주군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정파 놈들을 치라면 칠 것이고, 마도천하를 이룩하시겠다면 앞장설 것이다.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뒤 오직 그의 명령만 따라 왔….

‘혼사는 어떻게 치르는 거지.’

‘예?’

잘못 들었나. 지홍은 제 귀를 의심했다.

‘혼사 말이다.’

‘음… 오… 아….’

차분한 목소리로 말씀하시는 주군의 표정이 여느 때보다도 진지해 보였다.

‘호, 혼담을 먼저 꺼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혼담이라.’

지홍은 생각에 잠긴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미 마음에 두신 여인이 있으신 건가. 그저 무공에만 몰두하시는 줄 알았는데 언제 그렇게 정분을 쌓으신 거지?’

어찌 되었든 혼사는 경사다. 그동안 알아채지 못했던 주군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한 지홍은 그가 더 친근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이번엔 무엇을 물으시려고 저렇게 망설이실까. 지홍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대답했다.

‘예.’

‘상대가… 원치 않는다면?’

‘예?’

이건 또 무슨 말씀이신가. 설마 주군께서 외사랑이라도 하고 계신다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주군 같은 사내를 마다할 여인이 천하에 어디 있단 말입니까.’

‘…….’

진심이었다. 저런 얼굴과 풍채를 거절할 자가 있다면 나와 보라고 하고 싶었다. 만일 거절한다면 그건 분명 외양 탓이 아니라 무서워서… 아니, 이런 불경한 생각을.

그러나 주군께서는 여전히 깊은 수심에 잠긴 표정을 하고 계셨다. 지홍은 한마디를 더 건넸다.

‘주군께서는 여기 천산에서, 아니, 중원 전역을 통틀어서 가장 뛰어난 풍채를 지니셨습니다. 제가 장담하건대….’

‘본좌는 몸집이 커서 미련해 보인다.’

‘예?’

몸집이 뭐가 어쨌다고? 대경실색한 지홍의 입이 떡 벌어졌다.

‘무엇보다도 본좌는….’

이제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두려울 지경이었다.

‘본좌는 못생기지 않았나.’

‘…….’

‘이리 흉측하게 생긴 사내와 혼약을 맺고 싶지 않겠지.’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뒤흔들 기만이었다. 교주의 망발로 인해 천마신교의 교리가 바닥까지 추락하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게 여인이 아니라 사내였을 줄이야.’

어쨌거나 부인과 함께 즐거우시다니 되었다. 기쁨의 눈물을 훔치던 지홍은 당장 꺼지지 않고 뭐 하냐는 전음을 들으며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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