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5화
그날 저녁, 청연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가엾게도 손에 붕대를 둘둘 감고 저녁 식사를 배달 온 지홍의 정신이 영 딴 데 팔려 있었다. 평소 같으면 청연이 꾸역꾸역 식사하는 동안 제 주군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어야 마땅한데, 오늘은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손을 밟힌 충격이 컸나.’
그래도 조금 전까지는 아주 멀쩡해 보였는데.
청연은 그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피며 식사를 이어 갔다. 한 입은 삼키고 한 입은 대충 뱉어도 알아채지 못하는 것 같…
“다 드셔야 합니다.”
지 않네.
가엾다는 말은 취소하겠다. 이 인간은 천마보다 더한 악마임이 틀림없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사람에게 이렇게 잔악무도한 짓을 저지를 수가.
“거기 고기 한 점 남았습니다.”
“안 보여요.”
“젓가락 바로 밑에 있지 않습니까.”
“착한 사람 눈에만 보이나 봐요. 전 못돼서 안 보여요.”
“명색이 천마신교 선녀이신데 못되셨다니요.”
“지금 놀리시는 거죠?”
청연은 남은 고기 한 점을 그의 얼굴에 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을 꾹 참고 간신히 입에 넣었다. 언제 먹어도 새롭게 끔찍한 맛이었다.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지홍은 여전히 얼빠진 얼굴로 찬합을 수거해 갔다. 다시 방 안에 홀로 남겨진 청연은 쓸쓸함을 이기지 못하고 재미없는 책을 펼쳤다. 책을 읽는 건지 글자 구경을 하는 건지 모를 시간이 지나고, 고개를 들었을 땐 문밖이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어?’
청연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늘 문밖을 지키고 서 있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뭐지?’
그는 책을 덮고 발소리를 죽인 채 살며시 문 앞으로 다가갔다. 틈새에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설마 아무도 없나.
평소 지홍이 문밖을 지키지 못할 때면 다른 사람들이 그곳에 서 있곤 했다. 지홍의 명령에 따르는 걸 보면 같은 호위대 소속인 것 같았다. 혹시 오늘 그가 넋을 빼 놓은 탓에 사람을 세워 두는 일까지 잊은 건가.
머리를 굴리던 청연은 문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요?”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그는 목소리를 조금 키워 한 번 더 불러 보았다.
“아무도 안 계세요?”
역시 문밖은 잠잠했다. 그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문을 조금씩 열어 보았다. 열린 틈새로 빼꼼히 머리를 내밀고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없다. 진짜 아무도 없다. 이렇게 허술할 수가.
저를 그렇게 철저히 감시하던 걸 생각하면 오히려 의심스러웠다. 심지어 문을 잠가 놓지도 않았다니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래도….’
이대로 놓치기엔 아까운 기회지. 지홍이 잠시 정신이 나가 정말로 잊었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청연은 곧장 침상으로 달려가 베개를 이불 밑에 넣었다. 그리고 도자기 몇 개를 가져다 사람의 형태를 만들었다. 이 정도면 언뜻 보았을 때 이불 밑에 사람이 있는 것처럼 보일 터였다.
휘장까지 꼼꼼히 친 청연은 탈출할 준비를 마쳤다. 나가다 잡힐지언정 시도조차 포기하지는 않겠다 생각하며 조심히 문밖으로 걸음을 떼었다.
***
신강은 일교차가 크다는 게 사실이었나보다. 청연은 으슬으슬 떨리는 몸을 웅크렸다. 일부러 그림자가 진 어두운 길만 골라 이동하고 있어서 그런지 그동안 그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아무리 늦은 밤이라고 해도 이토록 사람이 없다는 게 수상해 그냥 방으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다만 한 가지 문제는….
‘여기가 어디야?’
제 위치를 전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지홍과 함께 외출했을 때 지리를 꼼꼼히 살피고 머릿속에 저장해 둔 노력이 무색하게도, 걸으면 걸을수록 점점 이상한 길로 빠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그렇게까지 길치는 아닌데.’
심지어 한 길을 따라 쭉 직진했는데도 자꾸만 같은 자리로 되돌아오는 듯했다. 이래서야 탈출은커녕 미아가 되어 밤새 떠돌아다니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설마 진식1)인가.’
청연은 오래전에 읽었던 무협 소설을 떠올렸다. 주인공이 길을 찾던 중 진식에 빠져 방향 감각을 잃고 헤매던 그 장면을. 어쩌면 이걸 믿고 방문 앞을 비워 둔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같은 길을 돌고 또 돌던 청연의 앞에 새로운 길이 나타난 건 일각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좁다란 길을 굽이굽이 따라가던 그의 눈에 드디어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저 담벼락과 전각만 보이던 이전과 달리 탁 트인 들판에 나무 몇 그루가 작은 숲을 이룬 채 서 있었다. 혹시 진식에서 빠져나온 건가 하는 반가운 마음에 청연은 속도를 높였다.
그때, 나무 사이에서 차디찬 목소리가 냉랭하게 울려 퍼졌다.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나 했더니.”
그 자리에 바로 멈춰선 청연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뒷걸음질 쳤다.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미치겠네….’
하필 무호가 있는 곳으로 들어올 게 뭐야. 심지어 그는 이미 제가 밖에서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를 마주친 이상 탈출 시도는 처참한 실패였다. 그를 피하기 위해 여기서 왔던 길로 되돌아가 봤자 다시 헤매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청연은 더듬더듬 인사부터 건넸다.
“또, 또 보네. 내가 하던 일을 방해한 건 아니지?”
“이리 와.”
“난 이제 방에 들어가 보려고….”
“내가 갈까?”
“가야죠. 갑니다.”
무호가 절 죽이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다고 해서 무섭지 않은 건 아니었다. 천마는 목소리만으로도 사람을 겁에 질리게 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쭈글쭈글해진 청연은 조심스레 나무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곧이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는 질겁하고 말았다. 제 발로 걸어 들어간 그곳은 바로 천마가 목욕하는 노천탕이었다. 탕 속에 앉아 있는 무호를 본 순간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선녀는커녕 남의 목욕을 엿보려 한 나무꾼이 된 기분이었다.
“나, 나 일부러 여기까지 온 거 아니야. 그냥….”
“도망 나왔겠지.”
“도망이 아니라… 어, 그, 나도 목욕 좀 하려고 물을 부탁하려는데 문 앞에 아무도 없더라고. 그래서 사람을 찾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네, 하하.”
무호는 한마디도 믿지 않는 듯한 얼굴로 청연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그놈 경맥만 끊을 게 아니라 분근착골2)을 해 버릴까.”
제 거짓말과 달리 그의 음성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놈이라는 건 당연히 문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지홍을 지칭하는 것일 테고. 낮에 보았던 시퍼렇게 으스러진 손을 떠올리자 청연은 아찔해졌다.
정말로 지홍이 분근착골을 당할까 걱정되기 시작한 그는 조심조심 무호의 곁으로 다가가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나마 날이 어두워 물속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 사람한테 너무 그러지 마. 깜빡 잊었겠지. 사람이 일하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는 거고.”
저를 감금하고 끔찍한 음식을 먹이는 데 일조한 사람을 변호하다니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지만, 그 사람도 어떻게 보면 상사 명령에 따르는 직장인이나 다름없으니까.
무호는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어쩐지 종일 진법가를 찾더라니.”
“응?”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청연은 조금 더 고개를 숙였다. 때마침 찬 바람이 휭 하고 불어와 몸이 부르르 떨렸다.
“으, 춥다.”
“들어와.”
덤덤하게 내뱉은 무호의 말에 청연은 기겁하여 고개를 저었다.
“어? 아, 아니야! 그 정도로 춥지는 않아!”
“목욕하려고 했다며.”
“방에 가서 할게.”
말없이 청연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똑똑히 적혀 있었다. ‘들어오지 않으면 너를 분근착골 하겠다.’라고. 청연은 제 몸을 가리키며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 옷도 입고 있는데?”
“그럼 벗고 들어올 건가.”
“…….”
아니, 그건 아닌데…. 내가 거길 왜 들어가겠니. 탕 속에서 너랑 뭐 할 게 있다고.
청연이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무호는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그리고 그가 상황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손목을 휙 끌어당겼다.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 물이 튀었다. 꼬르륵 물속에 잠긴 청연은 곧바로 일어나 앉아 얼굴을 닦아 냈다. 갑자기 물에 빠진 바람에 눈과 코가 다 매웠다.
“너 진짜…!”
무호에게로 돌아서 버럭 화를 내려던 청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거리가 너무나도 가까웠다.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 무호의 얼굴이 자리했다. 심지어 그는 지금 나신이었다. 하반신은 물에 잠겨 보이지 않았지만 단단한 어깨와 가슴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흉부가 기가 막히는군.’
기막힌 흉부에 순간적으로 눈길이 쏠렸던 청연은 애써 정신을 차리고 뒤로 돌아섰다. 아무래도 다 큰 남자 둘이서 이러고 있는 건 아니지 싶었다. 그는 반대쪽으로 슬금슬금 기어가며 말했다.
“나, 나 갈래. 방에 갈 거야.”
“…어딜.”
무호의 낮은 목소리와 함께 단단한 팔뚝이 허리에 감겨 왔다. 당황한 청연은 그에게서 벗어나려 낑낑거리며 몸부림쳤지만 역부족이었다.
“야, 이것 좀 놔 봐! 안을 필요까진 없잖아!”
애처로운 외침은 무호에게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강한 힘으로 청연을 끌어당겨 제 품 속에 가둬 놓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도망칠 수 있으면 도망쳐 봐.”
그 은근한 목소리가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도망친다면 네 발목을 부러뜨리겠다고.
‘미치겠다, 진짜…. 돌아 버리겠다.’
졸지에 그의 다리 사이에 앉게 된 청연은 울고 싶었다. 이로써 그동안 외면해 왔던 사실이 전부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었다. 무호가 여태까지 저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게. 아니, 좋아하는 걸 넘어서 집착하고 있다는 게.
‘어쩌다 이렇게 됐지?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애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향한 무호의 감정을 처음으로 알게 됐던 건 그가 객잔에 남기고 간 대도를 발견했을 때였다. 대도에 새겨진 호연이라는 이름. 그리고 그 옆에 놓인 종이에 빼곡하게 적힌 ‘천무호’, ‘유청연’이라는 두 이름을 보고 한참을 죄책감에 시달렸다.
다만 그 감정은 그저 열다섯 살 사춘기에 스쳐 지나가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구 년이 지나도록 간직하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단 말이다.
최종 보스 천마의 집착을 받고 있다니. 청연은 차라리 이 물속에 코를 박고 죽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