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3화
청연은 같은 방 안에서 며칠을 갇혀 지냈다. 처음에는 공포에 떨었지만 이것도 일상이 되니 나름대로 익숙해졌다. 종일 아무것도 못 하고 지루한 방 안에 틀어박혀 있는 게 가장 고통스러웠다.
창문이 죄다 막혀 있어 햇볕이라고는 문 틈새로 살짝 새어 들어오는 게 전부라서 시간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문밖을 지키고 서 있는 사람들에게 잠시라도 밖에 나가 바람을 쐬고 돌아오면 안 되겠냐 사정해 보았지만, 그에게는 일말의 틈도 허락되지 않았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사치품들을 구경해 보기도 하고, 숨겨 놓은 보물이라도 있나 서랍장을 열어 보는 것도 잠시였다. 지홍이 가져다준 재미없는 책들도 몇 권 읽다가 던져 버렸다. 청연은 정말 심심해서 돌아 버리기 직전이었다.
심지어 무호는 첫날 잠깐 얼굴을 비친 것을 마지막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적당한 핑곗거리를 생각해 두라더니 저를 찾지도 않는 걸 보면 정말 바쁘기는 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잊었거나.’
침상에 누워 따분한 시간을 보내던 청연은 갑자기 짜증이 나 휘장을 한쪽 발로 걷어찼다.
‘이럴 거면 왜 데려온 거야. 차라리 집에 보내 주든가.’
객잔 상황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을지, 또 제하와 스승님은 어떻게 되었을지 이런저런 걱정이 가득했다. 그런데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점점 화가 치밀었다.
그 와중에 문이 열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배달된 식사를 보며 청연은 이마를 짚었다. 마치 사육당하는 동물이 된 기분이었다. 근데 이제 주인이 없는.
“아침 식사….”
“안 먹어요.”
“그래도….”
“안 먹는다니까요.”
이렇게 된 거 단식 투쟁이라도 벌여야겠다고 생각하며 탁자 옆에 서 있는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제게 식사를 강제하는 사람은 지홍뿐이었으니 다른 이들이 왔을 땐 대충 거절하면 그만이었다.
청연은 그를 외면하며 벽을 향해 돌아누웠다.
이후 지홍이 헐레벌떡 청연을 찾아온 건 일각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주군께서 허락하셨습니다!”
“예? 뭘요?”
“잠시 외출하셔도 된다고 하십니다!”
그의 말에 청연은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이 지긋지긋한 방에서 나가도 된다니까 기쁘긴 한데, 내 발로 내가 나가는 것도 허락이 필요한 거냐고.
‘됐고. 이번에야말로 도망칠 기회를 노린다.’
풀어 헤쳤던 머리를 손으로 대충 빗어 올려 하나로 질끈 묶은 청연은 결의를 다졌다.
***
결의를 다졌는데…. 그러니까 다지긴 했는데.
청연은 제 곁을 지키는 지홍의 옆얼굴과 뒤를 따르는 두 명의 무사들을 힐끔 살폈다.
‘잠시 외출하는데 이렇게까지 사람들을 거느리고 다녀야 하냐! 누가 보면 내가 천마인 줄 알겠다!’
방을 나서도 감시는 이어졌다. 아니, 오히려 심해졌다. 도망칠 것이라고 예상하기라도 했는지 사람들을 줄줄이 붙여 연예인 간접 체험을 하게 해 준 무호에게 감사의 빅엿을 날리고 싶었다.
반면에 지홍은 청연의 불편한 심기를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그는 이곳저곳 꼼꼼히 구경시켜 드리겠다며 해맑은 얼굴로 길을 안내했다. 그가 현대에 태어났다면 투어 가이드가 적성에 맞았겠다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청연은 털레털레 그의 뒤를 따랐다.
예로부터 신강 땅은 척박하기로 유명했다. 땅의 대부분이 사막으로 이루어져 있어 농사를 짓기에 좋지 않은 환경이라고 했다. 그런데 천마신교의 본거지인 이곳은 사정이 조금 다른 듯했다.
천산의 여러 봉우리 중 으뜸인 승리봉답게, 거대하고 웅장한 전각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고도가 높은 산지라고 믿기 힘들 정도였다. 특히 중앙에 위치한 대전은 입이 떡 벌어지게 컸다.
“주군께선 지금 대전에 부교주님과 함께 계실 겁니다. 부교주님은 전대 교주 집권 시에 천마신교의 여덟 장로 중 수석 장로로 계시던 분인데, 주군의 취임에 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금박으로 장식된 대전 기둥을 바라보던 청연은 원작에 나왔던 천마신교에 대한 설명을 되짚어 보았다. 수십 년 전 정마대전에서 패한 뒤 신강에 처박혀 힘을 키워 왔다고 했는데, 그 힘에 재력도 포함이었던가. 확실한 건 무호가 교주의 자리에 올랐던 이맘때쯤에 천마신교의 무력이 최고조에 달했다는 것이다.
건조한 공기와 이따금 불어오는 모래바람이 아니었다면 여기가 어디인지도 잊어버릴 뻔했다.
청연의 곁에서 신나게 설명을 이어 가던 지홍은 드넓은 공터에 다다르자 걸음을 멈췄다. 바닥에는 단단한 청석이 깔려 있었고, 저 멀리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대열을 맞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연무장인가.’
청연이 생각하기 무섭게 지홍이 입을 열었다.
“주 연무장은 따로 있고, 이곳은 보조 연무장입니다. 한동안 출입이 금지된 곳이었는데 주군께서 취임하신 뒤 모두에게 개방하셨습니다.”
“왜 금지됐었는데요?”
“이전에는 주군과 전대 교주께서 단독으로 사용하시던 공간이었습니다.”
원작에서 자세히 설명되지 않았던 이야기에 청연은 귀를 쫑긋 세웠다.
“주군께서 지학의 나이에 이르셨을 때 모종의 이유로 잠시 천마신교를 떠나 계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돌아오셨을 때 전대 교주께서 그분을 정식 후계자로 지정하시어 본격적으로 천마신공을 전수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의 말을 듣던 청연은 마른침을 삼켰다. 마교 교주와 일대일 트레이닝이라니, 생각만 해도 눈앞이 아찔했다. 그거 아주 지옥 같았을 텐데. 전수보다는 강제 주입에 가깝지 않았을까.
심지어 무호는 전대 교주의 아들을 죽인 장본인이었다. 아무리 부자지간의 정이 없었어도 제 아들을 죽인 사람을 후계자로 정한다니, 정말 강한 자만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세계가 아닐 수 없었다.
“주군께선 그때부터 천마신공을 비롯해 온갖 검법, 도법, 창법을 섭렵하셨습니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도를 선호하셨다고 합니다.”
그럴 만도 하지. 밖에서 마음에 쏙 드는 운명 같은 대도를 하나 찾았거든.
“저기 있는 바위벽 꼭대기에 도흔이 보이십니까?”
“네. 저렇게 깊게 파인 건 안 보려야 안 볼 수가 없겠습니다.”
“주군께서 도를 처음 잡은 날 남기신 흔적입니다.”
거참 뛰어난 재능이군요. 그런데 아까부터 자꾸 무호에 대한 얘기만 늘어놓으시는 게, 꼭 위인전기를 듣는 기분이네요.
“이전까지 천마신교의 무인들은 검을 중시하고 도를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하나 주군의 도법을 본 무인이라면 백이면 백, 도를 경외하게 됩니다. 그 파괴력에 벌벌 떨면서도 일생에 한번쯤은 저런 도법을 연마해 보고 싶다 선망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저도….”
지홍은 허리춤에 달고 있던 도를 가리키며 수줍게 웃었다. 얼굴까지 붉힐 필요는 없었는데.
“그분께선 취임하시기 전에도 도귀라고 칭해졌을 만큼 두려움의 대상이셨습니다만, 동시에 추종자들을 몰고 다니셨습니다. 자고로 사내라면 누구나 그런 강인한 육신을 부러워하기 마련이지요.”
“저 뭐 하나만 여쭤볼게요.”
청연은 주군을 향한 그의 주접을 개처럼 무시한 채 물었다.
“전대 교주께서 무, 아니, 현 교주님을 후계자로 지정하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천마신교에 후계자가 있다는 소문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거든요. 아시다시피 제가 객잔 주인이라서 손님들한테 이런저런 소문을 많이 듣는데도 말이죠.”
“아, 저도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하나, 전대 교주께서 부러 숨기신 게 아닐까 추측합니다. 주군을 이 승리봉 밖으로는 단 한 걸음도 떼지 못하게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내부 정보가 정파 세력에 퍼져 나가는 걸 극도로 경계하셨던 분이거든요.”
“음…. 그리고 현 교주께서는 후계자 자리에 계셨으면서 왜….”
왜 반란을 일으켜 전 교주를 살해한 건가요.
이건 외부인에게 알려 주기에 너무 민감한 정보가 아닐까 싶어 청연은 질문을 끝마치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자신을 감금하고 강제로 마공을 익히게 만든 마교에 대한 복수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게 전부가 아닐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대충 연무장 구경을 마무리한 두 사람은 다시 걸음을 떼었고, 무사 두 명도 여전히 뒤를 따랐다. 지홍은 청연을 봉우리의 좀 더 깊숙한 곳으로 이끌었다. 해가 들지 않는 음지, 그곳에는 웬 바위 동굴처럼 보이는 입구가 자리했다. 두꺼운 철문이 달리지 않았다면 단순한 동굴이라고 생각했을 터였다.
지홍은 철문에 달린 장치를 요리조리 만지더니 손쉽게 문을 열었다. 그리고 청연을 향해 밝은 얼굴로 말했다.
“이곳은 이제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곳인데, 꼭 한번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뭘 하는 곳이길래 저러나 궁금해진 청연은 지홍을 따라 문 안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뒤따르던 무사들 역시 내부로 들어오자 등 뒤에서 철문이 쿵 하고 닫혔다. 동시에 암흑이 찾아왔다.
“앞이 하나도 안 보여요.”
갑자기 어둠에 시야가 차단되어버린 청연은 손을 더듬거리며 벽을 짚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깜빡 잊고.”
지홍이 품속을 뒤지는 듯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나더니, 머지않아 주변이 등을 켠 것처럼 환해졌다. 그가 꺼내 든 것은 조그마한 크기의 야명주였다. 그는 빛을 발하는 야명주를 청연에게 건네주었다.
“이걸 챙겨와 놓고 잊어버렸지 뭡니까. 저는 밤눈이 좋은지라.”
그는 앞에 놓인 계단을 내려가며 말했다. 청연은 조그마한 야명주가 신기해 손바닥 위에서 이리저리 굴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이곳은 벽 전체가 특수한 한철로 가공되어 있어 아무나 파괴할 수 없으며, 들어서는 순간 기감이 차단되어 벽 너머의 기척을 읽어 내지 못합니다. 주군처럼 예민하신 분이 아닌 이상 그저 시청각에 의지해 모든 걸 판단해야 합니다.”
청연은 야명주에 정신이 팔려 그의 설명을 한 귀로 대충 흘렸다.
“이전에는 기관진식까지 설치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주군께서 모두 제거하셨습니다. 어차피 들락거리는 사람도 없으니까요.”
“신물이라도 숨겨져 있었나요?”
“하하, 그런 건 아닙니다. 사실 여기는 주군께서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보내신 곳입니다. 그래서 꼭 보여 드리고 싶었습니다.”
“아, 주군께서 유년 시절을… 네?”
별생각 없이 그의 말을 반복하던 청연은 순간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라면….
‘지하 감옥?’
그때였다. 바로 옆쪽 벽에서 금속이 부딪치는 듯 챙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청연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틀었다.
벽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문이 하나 나 있었다. 이곳에 들어올 때 보았던 것과 같은 재질의 두꺼운 철문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 창문처럼 보이는 작은 구멍 하나가 뚫려 있었다. 구멍을 덮었을 것으로 보이는 덮개는 누군가에 의해 위로 올라간 채였다.
“주, 주인장…?”
그 구멍 안쪽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청연은 황급히 야명주를 들어 그쪽을 비춰 보았다.
“마, 맞지? 주인장! 사, 사천에 있던 그 객잔 주인장 맞지?”
문 너머의 사람은 마치 귀인을 만났다는 듯 날뛰기 시작했다. 작은 구멍 사이로 손을 뻗으려 하는가 하면 문을 있는 힘껏 흔들며 소음을 유발했다.
“살려 줘! 제발 나 좀 살려 줘! 여기서 꺼내 줘!”
등줄기가 오싹하고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청연은 문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야명주를 구멍 가까이 가져다 대는 손끝이 떨려 왔다.
마침내 문 너머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그는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