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화
그렇게 청연은 눈물겨운 식사를 마쳤다. 음식을 꾸역꾸역 비워 낸 것을 확인한 지홍은 뿌듯한 얼굴로 텅 빈 찬합을 수거해 갔다. 설마 끼니마다 이렇게 먹어야 하는 건 아니겠지. 청연은 불길한 예감을 떨쳐 냈다.
피하지 못하면 즐기라고 했다. 물론 즐기는 대신 피하는 쪽을 택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계속 두려움에 떨어 봤자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니까 이성적으로 방법을 생각해 보자. 무호를 설득해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을.
청연은 살며시 문간으로 다가가 그림자를 향해 말했다.
“저기요.”
“예.”
“지홍 님이신가요?”
“맞습니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호위대 대주씩이나 되는 사람이 왜 종일 여길 지키고 있냐며 따지고 싶었지만, 청연은 꾹 참고 물었다.
“몇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지홍은 그러시라 답하며 변함없이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가 신강 천산이 맞나요?”
“예. 천산 승리봉입니다.”
“제가 여기 온 지 얼마나 됐나요?”
“일주야가 조금 넘었습니다.”
“그렇게 오래 잤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숙면에 도움이 되는 향을 방 안에 피워 두었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일부러 재웠구나. 이 또한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제 가장 중요한 걸 물을 때가 되었다. 언제 지하 감옥으로 가게 되는지. 청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는… 언제까지 이 방 안에 있어야 할까요?”
“그건 주군께서 결정하실 일입니다.”
“대략 언제쯤인지라도 알려 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고 싶지만 알지 못합니다.”
“아…. 그럼 교주님께선 언제 오시나요?”
“주군께선 취임하신 지 얼마 안 되시어 천마신교의 조직과 체계를 재정립하느라 다망하십니다. 아마 금일 내로 다시 뵙기는 힘들 테니 기다리지 않으시는 게….”
그 말에 청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 보니 무호가 교주가 된 지 며칠밖에 안 된 시점이라, 그는 지금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게 당연했다. 덕분에 내일까지는 시간을 벌었다. 내일도 역시 바쁘면 좋겠는데.
청연이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을 때 지홍의 웃음기 띤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무료하십니까?”
“네? 저요?”
“예. 깨어나신 뒤 지금까지 계속해서 주군만 찾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발 그렇게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이상하게 들리잖아요!
“무료하시다면 제가 주군께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분명….”
“아뇨! 아뇨! 저 하나도 안 무료해요. 지금 아주 편안하고 즐거워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하마터면 천마님께 심심해요 놀아 주세요 하는 철부지 어린아이가 될 뻔했다. 천마와 함께하는 두근두근 술래잡기 놀이 같은 거 궁금하지 않았다.
“이제 곧 해시가 되는데 목욕물을 들이라 할까요?”
“목욕이요?”
그렇게까지요?
저를 왜 이렇게 극진히 모시려 하는 건지, 목욕물에는 또 무슨 속셈이 있는 건지 의문이었지만, 토 나오게 맛없는 식사도 견뎌 냈으니 목욕쯤이야 못할 것도 없었다. 피할 수 없으니 즐겨 보기로 한 청연은 과감히 그러겠노라 답했다.
머지않아 시비들이 커다란 목욕통과 뜨거운 물을 방 안에 들여놓았다. 평범한 물이 아니라 약재를 우린 물인 듯했다. 초록빛을 띠는 물에서 흘러나온 익숙한 약재의 향기가 공기 중에 맴돌았다.
목욕통 옆에 가지런히 놓인 조협1)과 씻고 나서 갈아입을 수 있도록 준비된 새 침의를 보며 청연은 생각했다.
‘얘 설마 나를 죽이려는 게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상했다. 이렇게 호화로운 방에 맛은 끔찍하지만 식사도 챙겨 주고 목욕도 시켜 주다니. 제가 살고 싶어 희망 회로를 돌리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확실히 죄인에게 베푸는 마지막 자비라고 하기엔 과한 면이 있었다.
그렇다고 마냥 마음을 놓을 수도 없었다. 그가 저를 죽이려는 게 아니라면 이런 식으로 잡아 와서 방 안에 가둬 둔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뇌리에 스쳐 지나가는 한 가지 추측이 있었지만 그건 너무 터무니없었다.
‘설마…. 그럴 리가.’
의심을 탈탈 털어 낸 청연은 스르륵 옷을 벗고 물에 들어가 몸을 담갔다. 따뜻한 약탕이 온몸을 감싸 순식간에 노곤해졌다. 조협을 몸에 문지르고 바가지에 물을 퍼 머리 위로 졸졸 붓는 동안 수증기가 뽀얗게 피어올랐다.
몸을 깨끗하게 씻은 청연은 목욕통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이렇게 편히 있을 때가 아닌데 자꾸만 쏟아지는 수마를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자 놓고 또 졸린 걸 보면 아무래도 저 향로가 제 역할을 하고 있긴 한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
청연은 꿈을 꾸었다. 아주 오래전, 어느 여름날의 기억이었다.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던데, 개만도 못한 체력을 가진 청연은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푹푹 찌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두꺼운 겉옷을 걸친 몸이 덜덜 떨었다. 보다 못한 해령이 다가와 말했다.
“그러지 말고 방에 들어가 쉬세요. 객주님 여기서 이러고 계시는 게 더 신경 쓰여요.”
“어, 해령이 어릴 때 모습 오랜만에 본다.”
“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가끔은 진짜 이해할 수가 없어요.”
해령은 그러면서도 따뜻한 찻주전자와 잔을 가져다주었다. 이 더운 날씨에 감기는 무슨 감기냐며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객주님 나중에 혼인이라도 하시면 부인 되실 분이 고생 많으시겠어요. 안 봐도 뻔해요.”
“왜. 내가 얼마나 좋은 부군감인데. 요리도 잘해, 청소도 잘해, 부러진 가구도 잘 고쳐. 심지어 미모도 뛰어나.”
“으엑. 본인 입으로 그런 말을.”
“내 말이 틀려? 오는 손님들마다 그래. 여기 객잔은 음식이 예쁘고 주인장 얼굴이 맛있다고. 얼굴 맛집이라고 불린다니까?”
“어련하시겠어요.”
해령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다른 거 말고 건강 관리나 잘하세요. 미모가 뛰어나면 뭐 해요. 맨날 이렇게 골골거리시는데.”
“노력하고 있어. 약 열심히 달여 먹는 거 너도 봤잖아.”
“아, 제가 듣기론 약욕이 몸에 그렇게 좋다던데요. 객주님도 한번 해 보세요.”
“목욕물에 쓰려면 약재가 많이 들어가잖아. 귀한 거라서 그렇게 듬뿍 쓰기 아까워. 달일 때도 국물 한 방울 안 나올 때까지 여러 번 달이는 거 봐.”
“그래요? 객주님 앞으로 돈 많이 버셔야겠네.”
“어. 돈 많이 벌어서 매일 약욕하고 밥에도 약재를 통으로 갈아 넣을 거야. 그럼 너도 나한테 골골거린다고 잔소리 못 하겠지.”
그렇게 청연과 해령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마침 이 층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무호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곧장 탁자로 다가와 해령에게 말을 건넸다.
“손님이 널 찾아.”
“나? 왜?”
“이불이 더럽다고 다른 이불 꺼내 달래.”
“오늘 아침에 다 갈았는데 왜 그러지? 어느 객실?”
“오른쪽 세 번째.”
해령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이 층 객실을 향해 멀어지자 무호가 대신 빈자리에 앉았다. 청연은 그를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제 객잔 직원이 다 됐네. 급료 줘야겠다.”
“필요 없어.”
무호는 세상 그 어떤 일에도 관심 없는 듯한 표정으로 활짝 열려 있는 문밖을 바라보았다. 뜨거운 여름 바람이 불어와 그의 검은 머리칼을 살랑살랑 흔들어 놓았다.
“십칠.”
“왜.”
“천무호.”
이름을 부르자 그가 고개를 돌려 청연을 바라보았다. 햇볕에 그을린 듯 살짝 붉어진 얼굴이 노을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너는 나중에 뭐 하고 싶어?”
“뭐라니?”
“어른 되면 말이야. 생각해 본 적 있어?”
무호는 청연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볼 뿐 답이 없었다.
“없어도 괜찮아. 앞으로 시간 많으니까 천천히 생각하면 되지. 너무 스트레스받지 마.”
“스트레스가 뭔데?”
“그런 게 있어. 요즘 잠을 좀 설쳐서 그런가 자꾸 말이 헛나오네.”
청연은 대충 둘러대며 헤헤 웃었다.
“…본 적 있어.”
“어? 뭐라고?”
따뜻한 차를 호호 불어 마시던 청연은 무호가 꺼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해 되물었다.
“생각해 본 적 있다고.”
“그래? 뭐가 되고 싶은데?”
그를 마주한 검은 눈동자가 흔들리고 망설이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나는….”
이어진 그의 작은 목소리는 첨벙거리는 물소리에 묻혀 아스러졌다.
***
‘그때 뭐라고 했더라.’
청연은 비몽사몽 한 와중에 몸이 수면 위로 들리는 걸 느꼈다. 누군가가 제 몸을 안아 옮기고 있었다.
“물….”
바닥에 물 떨어지잖아.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입에서 새어 나온 건 물이라는 단 한 글자였다. 그나마도 웅얼거리는 발음에 뭉개지고 말았다.
이게 다 저 향로 때문이라고. 향을 피워 둬서 이렇게 잠이 쏟아지는 거라고.
청연은 아무도 듣지 못할 변명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저를 안은 사람의 품에 편안히 기댔다. 타인의 체온을 이렇게 가까이서 느껴 본 게 얼마 만인지. 그의 살갗에서 전해져 오는 따뜻한 온기에 기분이 좋아져 저도 모르게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이윽고 부드러운 천이 몸을 감쌌다. 푹신한 이불 위에 놓인 청연은 몸을 축 늘어뜨렸다. 오늘 밤만큼은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다시 단잠에 빠져들려던 참이었는데, 뺨을 살살 쓰다듬는 손길이 자꾸만 의식을 수면 위로 건져 올렸다. 청연은 잠을 방해하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어 눈을 뜨려고 애썼지만, 추를 달아 놓은 듯 무거운 눈꺼풀이 반쯤밖에 열리지 않았다.
흐릿한 눈앞에 보이는 거라곤 어스름한 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이는 붉은 휘장과 검은 그림자뿐이었다. 그래서 하는 수없이 도로 눈을 감았다.
‘어쩌면 그 추측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떠올리는 것조차 조심스럽고 마주하기 두려워 억지로 외면해 왔던 추측이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더더욱 그를 볼 면목이 없어지니까.
서서히 무의식에 잠겨 가던 청연은 그에게 하고 싶었던 질문마저 가슴 속에 묻었다.
그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너는 나를 좋아했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