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8화
남자는 누군가 방에 들어올 것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당황한 눈치였다. 방금 막 창문을 열고 방 안으로 넘어온 것처럼 보였다. 제하가 곧장 벽에 기대어 있던 검을 집어 뽑아 들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기까지 했다.
제하는 올곧은 시선으로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복면 사이로 빼꼼히 나와 있는 두 눈에 난처함이 가득했고 검을 쥔 자세가 어설펐다.
‘무공의 수위가 높지 않다.’
스승님께서는 싸우기에 앞서 상대방을 파악해야 한다고 늘 강조하셨다. 상대의 내력을 읽어 내지 못하더라도 눈빛과 몸짓, 그가 풍기는 기운을 살피면 무공 수위는 물론 성격까지 알 수 있을 거라 하셨다.
그렇게 반복된 훈련을 거쳤기에 자신할 수 있었다. 저자는 제게 상대도 안 된다는 걸.
‘아 참, 자만하지 말라고도 하셨지.’
제하는 검을 고쳐 잡으며 그를 향해 나지막이 물었다.
“당신 누구야.”
“…….”
“정체가 뭐야.”
복면까지 쓰고 온 걸 보면 틀림없이 비열한 꿍꿍이를 품고 있을 것이다. 그 대상이 제가 되었든, 다른 누군가가 되었든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요량이었다.
“쳇.”
남자의 잇새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리고 다음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겨우 눈 한번 깜빡할 사이에 그 자리에 서 있던 남자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다. 당황한 제하는 곧장 창가로 달려가 밖을 내다보았다. 벌써 저만치 멀어져 지붕 위를 달리고 있는 그림자가 보였다.
‘이렇게 빠르다고?’
더 이상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제하는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려 그 그림자를 쫓았다.
그는 미친 듯이 빨랐다. 지붕과 지붕 사이를 날아다니는 통에 아주 잠시만 눈을 깜빡여도 사라져 찾기 힘들 정도였다. 이토록 빠른 사람은 스승님을 제외하고 처음 보았다.
‘설마 이형환위라도 쓰는 건가.’
그럴 리가. 절대 그런 경지에 오른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뭐가 어떻게 됐든 일단은 잡고 봐야겠지.
제하는 그가 사라진 방향을 눈여겨보았다. 지난 오 년간 스승님과 함께 사천 성도를 방문하며 지리는 지겹도록 익혔다. 저쪽으로 가면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일 텐데.
그렇다면 저자는 지금 일부러 저를 잘못된 길로 유인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직접 싸울 형편이 안 되니 빠른 발걸음이라도 이용해 따돌리려는 것이다.
제하는 생각에 잠겼다. 그 남자는 검을 들고 있었음에도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고 자세마저 어설펐으니 누군가를 해하려고 온 살수는 아닐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도적인가. 도적이라기엔 지닌 무기가 과했으니 물건을 훔치는 데 방해만 되었을 터였다. 줄줄이 생각을 이어 나가던 제하의 머릿속에 문득 한 가지 추측이 떠올랐다.
‘이 추측이 사실이라면….’
그러면 더더욱 잡아야겠지.
제 감을 믿어 보기로 한 제하는 방향을 틀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커다란 객잔들이 늘어선 거리, 제하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숨을 죽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남자의 형체가 보였다. 상대방을 충분히 따돌렸다고 착각한 것인지 지붕 위를 달리는 속도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그를 지켜보던 제하는 검에 내력을 실어 기왓장 하나를 내리쳤다.
기왓장이 쩌적 소리를 내며 두 동강 났다. 그걸 시작으로 그 옆의 기왓장도, 또 그 옆의 기왓장도 하나둘씩 깨져 나갔다. 마침내 달리던 남자가 깨진 기왓장에 발이 걸려 중심을 잃고 지붕 밑으로 떨어지자 제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정말 발만 빠르지 다른 건 아무것도 못 하는구나.
“으으….”
한쪽 무릎을 안은 채 바닥을 뒹굴고 있는 남자를 보며 제하는 비웃음을 흘렸다. 그는 여유롭게 남자에게로 다가가 복면을 벗겨 냈다. 그러고는 고통에 일그러진 한 쌍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느 객잔이야?”
***
제하는 남자를 밧줄에 꽁꽁 묶은 채 객잔 식당 한가운데에 던져 놓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오기까지 검을 들고 그의 곁을 지켰다. 당장 청연에게 데려갈 수도 있었겠지만 고된 하루를 보낸 그의 휴식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동이 트고 아침 손님을 받기 시작하니 점차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제하는 객잔 직원들에게 대충 사정을 설명하고 청연이 내려오기만을 기다렸다.
오래 지나지 않아 잠에서 깨어난 청연은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시끌벅적한 소리에 급히 옷을 챙겨 입고 나온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식당 가운데에 동그랗게 모여 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와 제하에게 물었다.
“이게 다 뭐야? 이 사람은 누군데 이렇게 해 놨어?”
“아, 일어나셨어요? 밤에 잠은 잘 주무셨고요?”
제하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양 환하게 웃으며 청연을 반겨 주었다. 어젯밤보다 한층 밝아진 안색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어어. 설명 좀 해 줄래?”
청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제하와 묶여 있는 남자를 번갈아 보며 다시 한번 물었다. 제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답했다.
“어젯밤에 검을 들고 방에 몰래 들어왔더라고요.”
“네 방에? 왜?”
“손님이 없는 빈방인 줄 알았대요.”
“빈방에서 뭘 하려고 했는데? 도둑질?”
“바닥에 구멍을 내고 가구를 부수려고 했대요.”
“바닥에 구멍을… 뭐?”
“이봐.”
제하는 이 상황이 수치스러운지 고개를 푹 숙인 채 바닥만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직접 설명해 봐.”
“…….”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말이 없었다. 한숨을 내쉰 제하는 청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 근처에 단향이라는 이름의 객잔이 있습니까?”
“어…. 있지. 5층짜리 커다란 객잔. 거긴 왜?”
“그 객잔에서 고용한 낭인이라고 합니다. 청연객잔의 객실을 엉망으로 만들어 영업을 방해하려고요. 여태까지 이런 일이 여러 차례 있었던 모양입니다.”
“…….”
“정말이지 비열한 작자들입니다. 정정당당하게 경쟁할 생각은 않고 이런 짓을 벌이다니요. 객주님의 사업 수완이 좋으니 질투심에 배가 아팠나 봅니다.”
“…그러게. 별일이 다 있네.”
“저를 포함해 여기 계시는 모든 분이 증인이 될 것이니 지금까지의 피해 금액을 합산해 단향객잔에 청구하세요, 객주님.”
제하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제야 객주님께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해냈다는 생각에 뿌듯함이 차올랐다. 객주님께서도 오랫동안 객잔을 망가뜨리던 범인을 찾아내셨으니 기쁘시겠지.
그가 예전부터 무례한 손님들에 대해 불평하던 걸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누군가 자꾸만 객실 내부에서 싸움을 벌여 가구가 남아나지 않는다고 했다. 심지어 손님이 머물지 않았던 빈방에서도 자꾸만 가구가 부서진다고.
그래서 어젯밤, 복면 쓴 남자의 정체를 더욱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가 노리는 것이 사람도 아니고 돈도 아니라면 남은 것은 이 객잔뿐이었으니.
“그런 거였구나.”
“예. 그런 거였으니 어서 마땅한 처분을… 객주님?”
예상외로 청연의 얼굴은 시큰둥했다. 마치 그런 건 궁금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남자를 힐끗 보고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하품까지 했다. 제하는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알고 계셨습니까?”
“아니. 몰랐는데.”
“그런데 어찌 그리 평온하십니까? 이자가 그동안 객잔을 망가뜨려 왔다는데….”
“어차피 걔 아니었어도 다 부서질 거 뭐.”
제하는 당황스러웠다. 딱히 칭찬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 사람을 잡아 밤새워 지키기까지 했는데, 이렇게 무덤덤한 반응이 돌아올 줄은 몰랐던 탓이다.
“그렇지만 객주님. 제가 이 자를 잡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아십니까? 발이 어찌나 빠르던지 한참을 쫓아야 했습니다.”
공을 인정받지 못해 서러운 마음에 나온 헛소리였다. 그를 잡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지만 객주님께 어리광을 부려서라도 잘했다, 기특하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발이 빨라?”
청연은 그제야 흥미가 생긴 건지 자세를 바로 하며 눈을 반짝 빛냈다. 그리고 묶여 있는 남자를 향해 물었다.
“발 빠른 거 말고, 뭐 다른 거 할 줄 아는 건 없어?”
“…….”
“말해 봐. 안 잡아먹으니까.”
“그, 그게 다요. 다른 쪽으로는 영 별로라 이렇게 치고 빠지는 일만 맡아 왔소.”
“단향객잔에서 건당 얼마 받았는데?”
이쯤 되자 제하는 의문이 들었다. 객주님께서 왜 저런 질문을 하시는지 모를 일이었다. 저 같으면 그동안 몇 번이나 이런 짓을 했는지, 어느 날 어느 객실에 침입했는지 꼼꼼히 따져 물어 피해 금액을 계산했을 것이다.
한참 동안 남자에게 이것저것 묻던 청연은 마침내 결심했다는 듯이 손뼉을 짝 치며 외쳤다.
“합격!”
“객주님? 합격이라니요?”
제하가 의아한 얼굴로 묻자 청연은 남자에게 말했다.
“우리 객잔에서 일해. 거기보다 돈 더 줄게.”
“예에?”
그의 말에 제하는 하마터면 까무러칠 뻔했다. 그러니까 지금 저 사람을 직원으로 고용하시겠다는 것인가. 한동안 이 객잔에 해가 되었던 저 악독한 자를?
“객주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자는….”
“발이 빠르다며.”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내가 새로 구상하고 있는 사업이 하나 있거든. 그거 때문에 사람이 한 명 필요해서 말이야.”
“사업이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저 사람은 안 됩니다! 객잔에 해를 끼친 자 아닙니까?”
“뭐 어때. 일만 잘하면 됐지.”
덤덤한 청연의 반응에 제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큰길 돌아서 세 번째 집이야. 집안 잔치 때문에 이틀 전에 예약 주문했고 음식 종류는 총 여섯 가지. 이거 꼭 확인해야 해.”
“네, 객주님!”
“신속 배달! 안전 배달! 잊지 마.”
청연은 뿌듯한 미소를 띤 채 배달원을 배웅했다. 짐을 바리바리 진 남자가 순식간에 지붕 위로 뛰어올라 달려가는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로써 중원에도 음식 배달 시대의 막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