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화
“대체 무슨 일입니까, 객주님?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테니 말씀해 주세요.”
“즈블…. 즈르 그….”
청연은 겉옷을 입에 문 채 소리를 참으며 애꿎은 바닥을 벅벅 긁었다. 제하가 다가와 이런 모습을 보기라도 할까 봐 눈앞이 아찔해졌다.
다 그 샘물 때문이었다. 오솔길에 접어들기 전 제하가 나뭇잎으로 떠 주었던 그거.
원작에서 회룡산은 극 양의 기운을 띤 산이었다. 산 자체의 양기가 너무 강해서 누군가 독초를 잔뜩 심어 음양의 조화를 맞춰 놓았을 정도로. 그렇게 공기에 흐르는 기운을 바꾼다고 해서 땅 자체가 달라지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런 산에서 흐르던 물을 생각 없이 받아 마셨으니 양기가 미쳐 날뛸 수밖에 없었다. 이건 원작의 소명에게도 벌어진 일이었다.
주변에 음기를 내뿜는 독초가 가득한지라 소명도 이 산의 특징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제하가 건넨 물을 의심 없이 받아 마셨고, 머지않아 온몸에 끓어오르는 기운을 느꼈다.
물론 그의 몸은 청연의 몸보다 훨씬 강했고 인내력도 뛰어났다. 의원인 만큼 점혈을 통해 기운을 어느 정도 조절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폭주하는 양기를 누르기란 고수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제하는 그날 처음으로 소명의 흐트러진 모습을 목격했다. 막연히 동경의 대상으로 삼던 스승님께 이상야릇한 감정을 느끼게 된 첫 사건이었다.
원작에서 이 부분을 읽었을 당시, 신우는 눈을 반쯤 감은 채 스크롤을 빠르게 내렸다. 음기와 양기가 어쩌고저쩌고하면서 글이 잔뜩 풍겨 내던 민아의 취향 같은 건 알고 싶지 않았다.
BL 소설을 꼼꼼히 안 읽었다는 걸 이렇게 후회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단 말이다.
‘그러니까 절대로 안 돼.’
더 이상 주인공수의 애정 전선에 끼어들어서는 안 돼. 청연은 이를 악물고 다짐했다. 제가 마신 물의 정체가 무엇인지, 제하가 알지 못하게 하겠다고.
“객주님…. 저 정말 걱정돼요. 무슨 일인지 말씀이라도 해 주세요, 네?”
울 듯 말 듯 한 제하의 목소리가 들려와 가슴을 후벼 팠다. 청연은 물고 있던 옷을 뱉어 내고 간신히 말했다.
“나, 나… 조금만 쉴게.”
“거기서요? 아까 넘어지신 것 때문에 그래요? 제가 가까이 가서 좀만 봐 드리면 안 될까요?”
“안 돼! 오지 마!”
“자꾸 오지 말라고 하시니…. 어찌해야 할지….”
청연은 제 머리 위에 얼음물을 들이부어 아이스 버킷 챌린지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몸은 점점 더 뜨거워지고 배는 뻐근하게 아파 오고.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저, 그럼 아까 그 샘에 가서 물이라도 더 떠 올까요? 객주님 목마르다 하셨으니까….”
“안 돼!”
“그것도 안 돼요…?”
제발. 제발 나를 두 번이나 죽이지 말아 줘.
청연은 옆에 있던 나무 기둥을 주먹으로 퍽퍽 때리며 말했다.
“약초… 흐… 가서 약초 구해 와.”
“네? 하지만 객주님께서 이러고 계시는데 제가 어떻게 자리를 비워요….”
“빨리… 가….”
“객주님….”
한참을 망설이던 제하는 결국 마지못해 걸음을 돌렸다. 머뭇거리던 발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청연은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었다.
그는 품속을 뒤져 향낭을 꺼내 들었다. 위협이 닥치면 사용하려고 챙겨 온 그 물건이었다. 주머니를 열어 손바닥에 대고 탈탈 털자 맵싸한 향을 풍기는 향신료가 쏟아져 나왔다.
청연은 주먹을 움켜쥔 채 크게 심호흡했다.
무협 빙의 5년 차, 이 정도는 기합으로 이겨 낸다.
***
제하는 급히 동굴로 뛰어가 스승님께서 찾으시던 약초를 모조리 쓸어 담았다. 그리고 원래 자리로 돌아왔을 땐 수풀 속이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설마 객주님께서 정신을 잃기라도 하신 것인가. 제하는 걱정스레 물었다.
“객주님, 저 왔어요. 좀 어떠세요?”
“…왔어?”
다행히 청연의 목소리와 함께 수풀이 흔들렸다. 이윽고 그 안에서 비틀비틀 걸어 나오는 사람의 몰골을 보고 제하는 깜짝 놀랐다.
“요, 요괴…?”
“뭐라고?”
“아, 아닙니다! 객주님, 눈이 왜 그러세요?”
청연은 시뻘게진 눈가를 소매로 벅벅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눈에서 맛있는 향이 나.”
“예…?”
“위험할 때 쓰려고 챙겨 왔는데 위험한 건 나였지 뭐야. 헤헤.”
“정신 차리세요, 객주님!”
정신이 반쯤 나간 듯한 청연이 비틀거리자 제하는 잽싸게 다가가 그의 몸을 부축했다. 충혈된 눈을 가까이서 보니 마음이 더욱 아팠다. 객주님께서 다치시는 건 그만 보고 싶었는데.
“잠깐만 볼게요.”
제하는 청연의 얼굴을 붙잡고 눈을 들여다보았다. 혹시 우신 건가. 아파서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수풀 속에 숨으신 건가.
“당신은 정말….”
“으응?”
“당신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청연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깜빡였다. 그의 이마를 손으로 짚어 보니 이전보다 서늘해진 체온에 마음이 놓였다.
“그나마 열이 내려서 다행입니다.”
“집에 갈래….”
“어서 가요. 업어 드릴까요?”
“시, 싫어….”
“넵….”
청연을 부축한 채 말을 묶어 놓은 곳까지 돌아가는 길, 제하는 계속해서 그의 눈치를 살폈다. 아파서 우신 게 맞는다면 몸을 더 살펴봐 드리고 싶은데 영 말이 없으시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좀 전에 왜 그러셨는지 진짜 안 알려 주실 거예요?”
“안 돼….”
“안 되는 게 참으로 많습니다. 저는 객주님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많은데….”
“어른들의 일이란 말이야.”
“저도 곧 어른입니다.”
“애들은 그런 거 몰라도 돼.”
“허….”
제하는 불만이 가득한 눈빛으로 청연을 바라보았다. 언제까지 이렇게 애 취급을 하실까. 키가 좀 더 자라면 어엿한 사내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조금 더 걷다 보니 일전에 지나쳐 왔던 샘물이 보였다. 제하는 그걸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청연에게 물었다.
“저기 아까 그 샘이 있는데 잠시 쉬었다 갈까요?”
“…엑스트라가 주인공을 죽이면 안 되는 거겠지.”
“예?”
“때려도 안 되는 거겠지.”
“…….”
“아니야. 빨리 가자.”
제하는 이럴 때마다 난감했다. 가끔 청연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으며 저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런 행동이 더욱 궁금증을 자극하고 그를 알아 가고 싶게끔 만들긴 했지만.
말이 있는 곳에 도착한 제하는 청연의 허리를 끌어안아 말 위에다 앉혀 놓았다. 지친 그가 떨어지기라도 할까, 한 손으로는 허리를 꼭 붙들고 다른 한 손으로 고삐를 잡았다. 피곤한지 제게 등을 기대 오는 그의 모습에 제하는 걱정을 잊고 살며시 미소 지었다.
***
“여기도 아프세요?”
제하는 청연의 발목 관절을 살며시 돌리며 물었다. 객잔에 돌아와 목욕을 마치고 침상에 누운 그는 언제 흙바닥을 뒹굴었냐는 듯 뽀송한 모습이었다. 덕분에 여기저기 시퍼렇게 멍이 든 피부를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니, 거긴 안 아파.”
“방금 끙 소리 내셨잖아요.”
“…….”
“여기는요?”
“안 아파.”
“손가락 움찔하셨어요.”
침을 맞기 싫은 것인지 아니면 제가 걱정할까 봐서인지 자꾸만 거짓말을 하는 청연 때문에 제하는 그를 더 면밀히 살폈다. 어렸을 때 이후로 그가 다친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심지어 이번에도 자신의 탓이었으니 속이 타들어 갔다.
“스승님께서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스승님이 그리워?”
“예에. 그리워 죽겠습니다.”
그분이 계셨다면 한눈에 다친 곳을 모두 파악하고 처방을 내려 주셨을 테니까. 제하의 말을 들은 청연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헤헤 웃으며 물었다.
“못 뵌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리워?”
“하루쯤 되었을까요.”
“역시 충실한 제자야. 훌륭해.”
“…….”
칭찬하시는 건가. 묘하게 놀리는 투인데.
제하는 청연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손끝에 정신을 집중했다. 침을 놓을 때 혈 자리를 잘못 짚으면 안 된다고 스승님께서 늘 강조하셨으니.
“스승님께 잘해 드려. 항상 잘 모시고. 물론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만.”
“왜 뜬금없이 그런 말씀을.”
“그냥. 부러워서.”
“부러우시다니요?”
“그렇게 존경하고 의지할 대상이 있다는 게 부러워서.”
제하는 시선을 들어 청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객주님께서도 의지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누구한테? 너희 스승님?”
저한테요 라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지만 제하는 겨우겨우 말을 삼켜 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 마음을 드러내 객주님께 부담을 드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에이, 안 그래도 그분께 얼마나 많은 신세를 졌는데. 내가 지금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것도 그분 덕분이라고.”
“별로 안 건강해 보입니다.”
“…너 자꾸 그럴래?”
기분이 이상했다. 청연이 스승님에 대해 말하는 걸 듣고 있자니 괜히 심술이 났다. 그가 남궁 뭐시기 공자와 이야기 나누는 걸 볼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아무튼 빨리 마무리하고 가서 자. 늦었잖아.”
“아직 남았습니다.”
“이제 아픈 데도 없어. 멀쩡… 윽.”
“여기 아프시네요.”
“그렇게 세게 누르니까 당연히 아프지!”
이어진 청연의 잔소리에 제하는 귀를 닫았다. 애가 늦게까지 안 자고 뭐 하는 거냐며 저를 내보내려는 그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결국 지쳐 버린 청연이 먼저 잠들 때까지 제하는 계속해서 침을 놓았다.
“주무세요?”
진짜 주무시나 보네.
눈을 감은 채 잠잠해진 청연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제하는 그제야 마지막 남은 침을 뽑아내고 방을 나섰다.
한밤중이 되어 캄캄해진 객잔 복도는 그날을 떠올리게 했다. 스승님께 혼난 뒤 청연의 품에 안겨 펑펑 울었던 어린 날. 서늘하지만 따뜻하게 느껴졌던 그의 체온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날 밤 자신이 앉아 있었던 계단을 지그시 바라보던 제하는 작게 웃음 지었다.
그렇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방으로 돌아갔다. 방문을 연 순간, 제하는 그 자리에서 굳고 말았다.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창가에 복면을 쓴 한 남자가 검을 든 채 서 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