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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객잔 정상 영업합니다 (36)화 (37/145)

036화

제하가 말한 것처럼 오솔길에는 처음 보는 신기한 모양의 풀들이 잔뜩 돋아나 있었다. 흰색 물방울무늬가 새겨진 검은 풀잎부터, 사자의 머리 모양을 닮은 주홍색 꽃까지. 청연은 소매 속에 손을 감춰 피부가 독초에 직접 닿지 않도록 주의하면서도 여기저기 둘러보느라 바빴다.

앞장서 걷던 제하는 검을 뽑아 들더니 독초처럼 보이는 것들을 베어 내기 시작했다. 길을 터 주느라 저러는 거겠지. 청연은 그의 마음 씀씀이에 다시 한번 감동하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불편하신 곳은 없으세요?”

“응. 너야말로 무리하지 마.”

“제가 모시고 왔으니 객주님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짜 괜찮아. 그런데 독초 때문인가? 지대가 높은데도 공기가 후덥지근하네.”

“더우세요?”

제하는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커다란 잎사귀 하나를 찾아 검으로 베어 냈다.

“이건 독초가 아니니 부채로 쓰셔도 됩니다.”

청연은 그가 건넨 잎사귀를 받아 들었다. 널찍하고 빳빳해서 부채로 쓰기 제격이었다. 제하는 팔랑거리며 열심히 부채질하는 청연의 모습을 힐끗 바라보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 저기 저 바위인가 봅니다.”

제하가 손가락을 들어 가리킨 곳엔 정말 용이 날아오르는 듯한 모양의 거대한 바위가 있었다.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기다란 몸체를 따라 시선을 올려 보면 뿔이 달린 거대한 머리통이 자리했다. 언뜻 보면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어? 잠깐만.’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기억에 청연은 멈칫했다. 그래, 저 바위. 저 바위에 무언가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원작에서 뭐가 있다고 했더라….

‘비급!’

비급이다. 저 쩍 벌린 용의 입 속에 무공 비급이 새겨져 있었다. 저렇게 범상치 않게 생긴 바위에 비급이 떡하니 적혀 있는데 그동안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게 이상했지만, 애초에 개연성 같은 건 밥 말아 먹은 원작이었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지나갔던 것 같다.

이 바위 앞을 지나치던 중 소명의 예리한 눈이 용의 입 속에 무언가 적혀 있다는 것을 잡아냈고, 그는 제하를 올려 보내 비급을 외워 오도록 지시했다. 덕분에 제하는 손쉽게 한 단계 더 레벨 업 할 수 있었다.

“객주님, 왜 그러세요?”

소명이 오지 않았으니 그의 역할을 대신해 줘야겠지. 청연은 제하를 바라보며 넌지시 물었다.

“저 위쪽에 뭐가 적혀 있는 것 같지 않아? 입 속에 말이야.”

그의 말에 제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올려다보았다. 소명만큼은 아니더라도 시력이 좋을 테니 무언가 어렴풋이 보일 것이다.

“예. 뭐가 있는 것 같기는 합니다.”

“중요한 걸지도 모르니까 한번 올라가서 확인해 볼래?”

제하는 바위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높이를 가늠해 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는 손목 발목을 빙글빙글 돌리며 풀더니 순식간에 뛰어올랐다. 바위의 튀어나온 부분을 짚고 매달린 손이 빠르게 바위 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 가벼운 몸놀림에 청연은 입을 벌린 채 제하를 올려다보았다.

적어도 아파트 5층 높이는 되어 보이는데 무섭지도 않은지 거침없이 바위를 오르던 제하는 머지않아 용의 머리 위에 털썩 올라앉았다. 웃으며 아래를 향해 손을 흔드는 여유까지 보였다.

‘여기는 클라이밍 대회 같은 거 없겠지?’

있으면 좋을 텐데. 우리 애는 말만 잘 타는 게 아니라 바위도 잘 탄다고.

청연은 아쉬운 마음을 삼키며 그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객주님! 여기 정말 뭔가 쓰여 있어요! 이거 무공 비급인 것 같아요!”

제하는 허리를 숙여 용의 입 안을 살펴보더니 기쁜 목소리로 외쳤다. 이윽고 글귀에 집중한 듯 진지한 얼굴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오늘 따라와서 다행이다. 같이 온 보람이 있었네.’

안 그랬으면 비급을 그냥 놓치고 지나갈 뻔했잖아. 이런 거 하나하나가 다 주인공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일인데.

“저 다 외웠어요! 이제 내려갈게요!”

똑똑한 제하가 비급을 모두 외우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품속에서 작은 칼을 꺼내 바위를 죽죽 그어 비급을 지운 뒤 벽을 타고 내려오며 들뜬 얼굴로 말했다.

“이런 곳에 비급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돌아가자마자 스승님께 전해 드릴 겁니다.”

“그래그래. 조심해서 내려와.”

“전부 객주님 덕분입니다. 객주님께선 어찌 이리 눈썰미도 좋으시고 현명하실까요?”

“부끄러우니까 그만 띄워 줘.”

나도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고.

“객주님과 함께 와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 좀…, 어?”

청연은 순간 흠칫하는 기분이 들어 말을 멈췄다.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지 않았었나? 비급이 저런 데 있었던 이유가….

다음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바위 벽을 잘만 타고 다니던 제하의 손이 갑자기 미끄러졌고, 대략 1장 정도를 남겨 둔 높이에서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놀란 청연은 다른 걸 생각할 틈도 없이 제하에게로 달려갔다.

물론 자신보다 몸집이 큰 아이를 받아 내기란 역부족이었다. 제하는 청연의 몸 위에 그대로 떨어져 버렸고 쿠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아, 씁….”

온몸을 얻어맞은 것처럼 통증이 번져 나갔다. 바닥에 쓰러진 청연은 작게 신음하며 손끝과 발끝을 조금씩 움직여 보았다. 다행히 부러진 곳은 없는 모양이었다.

‘이 미친 BL.’

그제야 기억났다. 비급이 왜 저기에 있었는지.

이 모든 게 BL을 위한 하나의 장치였을 뿐이다. 제하가 바위 꼭대기에서 비급을 외우고 내려오던 길에 뜬금없이 미끄러졌고, 떨어지는 아이를 스승님이 공주님 안기로 가뿐하게 받아 낸 것이다. 제하는 스승님의 품에 안겨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 했고.

비급은 이용당했다.

“객주님! 객주님, 괜찮으세요?”

“어윽…. 아니. 일단 좀 내려가 봐.”

청연의 위에서 울상 짓던 제하는 아차 싶었는지 후다닥 내려갔다.

“어떡, 어떡해. 저 때문에 객주님이….”

그는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청연의 몸을 꼼꼼하게 살폈다. 크게 다친 곳이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한숨을 쉬며 놓아 주었다.

“죄송해요…. 제가 좀만 더 주의했어도….”

청연은 울먹거리는 제하를 바라보며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다 기억을 못 한 저 때문이었다. 애초에 원작을 읽을 때부터 이렇게 L(ove)이 들어가는 장면은 흐린 눈을 하고 읽었으니 5년이 지난 지금은 기억에서 사라진 게 당연했다.

그리고 사실 제하가 그 높이에서 떨어졌다고 해도 크게 다치지 않았을 것이다. 괜히 제가 끼어들어서 제대로 착지하지 못한 걸지도 몰랐다.

“다행이다.”

“네…? 뭐가요?”

내가 널 제대로 받아 내지 못해서. 원작에서 스승님처럼 받아 줬다가 나한테 반했으면 어떡해. 아, 이건 너무 자의식 과잉인가?

“심하게 다치지 않아서. 나 좀 일으켜 줘.”

“아, 네!”

청연은 끙 소리를 내며 제하의 도움으로 몸을 일으켰다. 여기저기 멍이 들었을 게 뻔했지만, 그래도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객주님께선 아무래도 여기서 쉬고 계시는 게 좋겠습니다. 동굴이 멀지 않으니 저 혼자서 금방 다녀올 수 있을 겁니다.”

“아니야. 같이 가자.”

“그렇지만….”

“동굴은 좀 시원할 거 아냐. 여기 너무 더워서 빨리 시원한 데로 들어가고 싶어.”

진심이었다. 조금 전부터 덥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점점 더 높아지는 기온에 머리까지 열이 오르는 느낌이었다. 동굴에라도 들어가면 낫겠지 싶어 청연은 걸음을 재촉했다.

“정말 죄송해요, 객주님. 오른쪽 다리를 살짝 절뚝이시는 것 같은데, 객잔에 돌아가면 제가 침을 좀 놔 드릴게요.”

“스승님께 그런 것도 배웠어?”

“네…. 언제 필요할지 몰라서요.”

“기특해라.”

청연은 손을 뻗어 제하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그가 어렸을 때 늘 그랬던 것처럼.

“어?”

그 손길에 제하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청연의 손을 덥석 잡았다.

“객주님 손이 왜 이렇게….”

“손이 왜?”

“왜 이렇게 뜨거워요?”

제하는 이상하다 중얼거리며 청연의 손을 제 뺨에다 가져다 댔다.

“많이 더우세요? 그러고 보니 얼굴도 붉어지신 것 같습니다.”

“내 얼굴이?”

청연은 다른 한 손으로 제 이마를 짚어 보았다. 확실히 열감이 느껴졌다. 이래서 더웠던 건가.

“혹시 아까 다치신 것 때문에….”

“아니? 그럴 리가. 이상하네.”

“역시 객주님께선 잠시 쉬어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일단 저쪽 그늘로 갈까요?”

제하는 독초가 없는 곳을 골라 청연을 앉혀 놓고 걱정스러운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오늘 몸이 안 좋으셨는데 괜히 저 때문에 멀리까지 나오신 것 아닙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진짜 멀쩡했는데. 왜 이러지?”

청연은 어느새 목덜미 위에 흐르고 있는 땀방울을 닦아 냈다. 온몸에 열이 올라 뜨거워진 피부가 여실히 느껴졌다. 목이 타들어 가고 심장 박동까지 빨라지는 듯했다.

“그냥 지금 돌아갈까요? 약초쯤이야 당장 수집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

“괜찮, 괜찮아. 그러지 말고 나 물 좀 떠다 줄래? 목이 말라서.”

“잠시만요. 샘을 찾아 보겠습니다.”

제하가 자리를 비운 사이 청연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었다. 축축해진 옷을 벗어 던져도 열기는 식지 않았다. 오히려 속에서 불이 타오르는 듯한 느낌에 몸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허억….”

숨을 쉬는 것마저 힘겨워 바닥에 듬성듬성 돋아난 풀을 쥐어뜯던 중, 샘을 찾으러 떠났던 제하가 헐레벌떡 돌아왔다.

“그냥 저랑 돌아가요, 객주님. 저쪽에 샘이 있기는 한데 물이 독초에 오염되어 드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물을 구하려면 아까 그 오솔길 밖의 샘까지 가야만….”

“이런 미친.”

“네?”

청연은 하마터면 제 이마를 내리칠 뻔했다. 또 뒤늦게 기억해 내고야 만 것이다. 원작을 읽었을 때 흐린 눈으로 대충 넘겨 버린 그 장면을.

“많이 안 좋으세요? 객주님!”

“오, 오지 마!”

“왜 그러세요…?

“가까이 오지 마!”

청연은 주춤주춤 뒷걸음질 쳐 수풀 속으로 들어갔다. 당황하여 다가오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제하에게서 몸을 숨기기 위해.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겁니까…? 객주님!”

“그런 거 아니니까… 허억. 제발, 제발 들어오지 마.”

땀을 뻘뻘 흘리던 청연은 손에 들고 있던 겉옷을 입 속에 쑤셔 넣으며 생각했다.

절대로. 절대로 이 모습을 제하에게 들켜서는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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