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4화
“문 열어 주세요.”
청연은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누구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 문을 벌컥 열자 제하가 환하게 미소 지으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와…. 눈이 멀어 버리겠네.’
청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말랑말랑 귀여웠던 아이는 어느새 훌쩍 자라 소년의 티를 벗어 가고 있었다. 또렷한 이목구비와 베일 것 같은 턱선이 감탄을 자아냈다.
여기 애들은 다들 금방 크는 건지, 아니면 주인공이라서 더 특별한 건지. 그의 키는 이미 청연보다 조금 더 커져 있었다.
‘역시 스승님이 공들여 키운 보람이 있군.’
청연은 괜히 뿌듯해져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야? 혼자 왔어?”
“예. 스승님께서 부탁하신 일이 있어서 지나가는 길에 들렀습니다.”
이젠 혼자 하산해서 심부름도 다 하고. 기특해 죽겠네.
청연은 손을 뻗어 제하의 볼을 꼬집으려다가 멈칫했다. 어렸을 때도 아기 취급 하는 걸 싫어했는데 지금은 더더욱 하면 안 되겠지. 그는 안타까운 눈길로 제하의 볼살을 바라보았다. 아직 찹쌀떡 같은 볼살이 약간 남아 있기는 했지만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하셔도 됩니다.”
그런 청연의 표정을 읽었는지 제하는 그의 손을 끌어다 자신의 뺨 위에 올려놓았다. 몸이 많이 자랐어도 이런 행동은 그대로였다. 쓰다듬어 달라 조르는 강아지처럼, 제하는 항상 청연의 손길을 받고 싶어 했다.
“지나가다 들른 거면 금방 떠나겠네? 아쉽다.”
“오늘 하룻밤 정도는 머물 여유 있습니다.”
청연은 잘됐다고 말하며 제하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오랜만에 만난 그와 이런저런 근황 이야기를 나눌 생각에 신이 났다.
“밥은 먹었어?”
제하는 청연의 질문에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왜? 왜 웃어?”
“객주님께선 항상 그것부터 물어보십니다. 밥은 먹었냐. 안 먹었으면 언제 먹을 거냐.”
“아…, 그랬나?”
이십몇 년 동안 몸에 익은 습관이라서 그만. 청연은 제하를 따라 헤헤 웃었다.
“아직 안 먹었습니다. 오랜만에 객주님과 함께 식사하고 싶어서요.”
“그래? 때 잘 맞춰 왔네. 나도 막 먹으려던 참이었는데.”
청연은 기쁜 마음으로 제하를 데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탁자에 자리를 잡아 제하를 앉히고 주방에서 음식을 내와 식사를 시작했다.
“그나저나 무슨 심부름이야? 중요한 일이야?”
청연의 물음에 제하는 입에 있는 음식을 바쁘게 씹어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사천의 회룡산에서 월야초를 찾아 수집해 오라고 하셨습니다.”
“회룡산…. 월야초…?”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들인데. 청연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빙의한 지도 벌써 5년, 원작에 대한 기억이 점차 흐릿해져 가고 있었다. 처음 빙의했을 당시 굵직한 몇 가지 사건들은 따로 적어 두었기에 잊지 않았지만, 그 외 자잘한 일들은 기억해 내기가 쉽지 않았다.
“요즘 스승님께서 연구하고 계신 약초인데 회룡산 부근에서만 자란다고 합니다.”
이제 이 정도 심부름은 거뜬히 해낼 수 있을 거라 판단해 저를 혼자 보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 말을 듣던 청연은 조금씩 기억이 나려고 하는 것도 같았다.
‘혼자… 혼자 심부름이라.’
아, 생각났다!
청연은 무릎을 탁 쳤다. 원작에서 스승님이 제하에게 내린 미션이었는데, 제하는 혼자서 해내기를 끝까지 거부했다. 스승님과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 괜히 고집을 부린 거였다. 결국 제하의 고집을 이기지 못한 소명이 함께 하산하여 약초를 찾으러 갔던 것 같은데.
‘근데 왜 혼자 왔지?’
스승님께 징징거리기엔 너무 바르게 커 버린 건가. 청연은 골똘히 생각하며 앞에 앉은 제하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세요, 객주님?”
“아니야…. 그런데 너 월야초가 산 어디서 자라는지는 알아?”
“스승님께서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원작에서 월야초는 눈에 잘 띄지 않는 동굴 속에 꼭꼭 숨겨져 있었다. 물론 소명에게 그걸 찾아내기란 식은 죽 먹기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금방 약초를 찾아냈고…. 그 뒤에 어떻게 됐더라? 무슨 사건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아 청연은 포기하고 밥이나 먹기로 했다.
“언제 출발하게?”
“식사가 끝나면 바로 가려고요. 서두르면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올 수 있을 겁….”
그때, 웃으며 답하던 제하의 얼굴이 갑작스레 굳었다. 그의 시선은 청연의 뒤를 향해 있었다. 의아해진 청연은 뒤를 돌아보았다.
“형님.”
그의 뒤에 서 있는 사람은 언젠가부터 그를 형님이라 부르기 시작한 도경이었다.
“공자…?”
대체 언제 들어온 건지, 생글생글 웃는 얼굴에 깜짝 놀라 청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언제 오셨습니까? 안휘에서 이렇게 먼 길을 연락도 없이….”
“방금요. 지나가다 들른 겁니다. 그나저나 제가 말씀 편하게 하시라 몇 번을 일러 드리지 않았습니까?”
“아…, 그랬지.”
청연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지나가다 들르는 날인가. 다들 짠 것처럼 객잔에 찾아오네.
도경은 의자에 앉아있는 제하의 굳은 표정을 보더니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 강호에 소문이 자자한 백 소협께서 사천에 계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왔는데, 역시 객잔에 계셨군요?”
“그러는 공자님께서는 요즘 동분서주하느라 바쁘시다던데 오늘은 시간이 남아도시나 봅니다.”
“아이고, 백 소협만 하겠습니까.”
너네 또 왜 그러니…. 청연은 두 사람의 눈치를 번갈아 가며 살폈다.
“남궁세가의 삼 공자님께서 대체 뭘 하시느라 그렇게 바쁘신지 다들 궁금해합니다. 중원 전역을 돌아다니며 무림세가의 자제분들과 어울리신다던데. 무슨 계략이라도 꾸미고 계신 건지.”
“세가의 자제들끼리 친분을 다지는 게 잘못됐다는 건가? 생각의 폭이 참 협소하군. 대협은 못 되겠어.”
“공자…!”
“그만, 그만!”
청연은 결국 두 사람의 대화 사이로 끼어들었다. 어째 마주칠 때마다 이렇게 티격태격하냐. 진짜 싸울 것도 아니면서.
“둘 다 그만 좀 해. 언제까지 그렇게 애들같이 굴 거야?”
그 말에 제하는 팔짱을 끼며 도경을 쏘아보았다.
“객주님 말씀이 옳습니다. 약관에 가까우신 공자께서 이리 어린아이처럼 구셔야 하겠습니까?”
“제하 너도 그만해!”
청연은 도경에게로 돌아서며 물었다.
“밥은 먹었어? 아직이면 같이 먹을래?”
“괜찮아요. 저는 갈 곳이 있어서. 형님 얼굴이나 잠깐 보러 온 거예요.”
“진짜 어딜 그렇게 다니는 거야? 남궁세가 삼 공자가 혼자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한다고 소문이 자자해.”
도경은 해사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있어요. 형님한테는 다음에 말씀드릴게.”
“그래…? 알겠어.”
“아, 이따 시간 나면 잠깐 또 들를게요. 그때 저랑 차나 한잔….”
“안 됩니다!”
제하의 외침에 청연은 그를 돌아보았다. 제하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탁자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단호히 말했다.
“객주님께선 저와 가실 곳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예. 회룡산에 저와 함께 가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러니 공자께서도 다시 오실 생각 말고 가십시오.”
아니, 내가 언제?
청연은 어리둥절해져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자 도경은 무언가 알겠다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형님, 다음에 찾아뵙겠습니다.”
“어…. 응. 그래, 그럼.”
“그때까지 건강하세요.”
“너도. 잘 가고.”
도경은 비단 옷자락을 휘날리며 사라졌다.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청연은 다시 의자에 앉으며 제하에게 물었다.
“회룡산에 함께 간다니?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예. 객주님께서 저와 같이 가 주셨으면 합니다. 성도에서 그리 멀지 않고 가는 길의 풍광이 뛰어나다고 하니 나들이 가듯이 다녀오시지 않겠습니까?”
“내가 같이 가면 걸음이 느려질 텐데?”
청연은 망설이며 답했다. 그의 제안이 솔깃한 건 사실이었다. 한동안 객잔 일로 바빠 바깥바람을 못 쐰 지 오래였으니까.
게다가 월야초의 쓰임새를 잘 알고 있는 그에게는 흥미가 돋는 일이기도 했다. 훗날 중원 전역에 역병이 돌기 시작했을 때, 소명이 이 약초를 이용해 사람들을 치료해 냄으로써 능력수의 입지를 넓혀 갔단 말이다. 그런 멋있는 풀을 먼저 구경할 수 있다는 것도 빙의자의 특권 아닐까.
“그런 건 문제 되지 않습니다. 급한 일이 아니니 천천히 다녀와도 됩니다.”
“그래도….”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면서 무작정 따라가는 건 망설여졌다. 물론 큰 사건이었다면 제가 기억했을 테니 위험한 일은 아닌 것 같았지만, 쉽사리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하긴, 나도 마음이 안 놓이는데 어떻게 애 혼자 보내.’
제하가 이미 자신보다 훨씬 강해졌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5년 전, 잠시 객잔을 비운 사이 무호에게 벌어졌던 일이 트라우마가 되어 버렸는지 애를 산속에 혼자 들여보낸다는 게 영 껄끄러웠다. 혹시 무기 같은 걸 챙겨 따라가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 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제하의 계속된 간청에 주저하던 청연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뭐 하세요?”
해우가 청연을 돌아보며 물었다. 청연은 아무것도 아니다 고개를 저으며 가지고 있던 향낭을 꺼내 들었다.
그는 향낭을 열어 내용물을 비워 낸 후, 주방에 있던 향신료를 한 줌 집어넣었다. 이거면 비상시에 무기로 쓸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