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화
“아니, 이걸 또 틀리셨어요? 장부랑 돈이 하나도 안 맞잖아요.”
“죄송합니다, 총관님….”
청연은 화가 난 해령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이래서야 누가 객주이고 누가 직원인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훌륭한 어른으로 자라 청연객잔의 총관 자리를 꿰찬 해령은 누구보다도 유능한 직원이었지만 그만큼 엄격하고 깐깐했다. 요새 일이 너무 바빠 정산 실수를 몇 번 했더니 오늘도 역시 불호령이 떨어졌다.
청연은 시선을 피하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변명했다.
“근데 그거 원래 네가 해야 하는 일 아니니….”
“손님 불만 들어 드릴 동안 잠깐만 봐 달라고 부탁드렸잖아요. 그새 그걸 틀리시면 어떡해요.”
“시정하겠습니다.”
모두 무능한 객주의 잘못입니다. 청연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물었다.
“그래서 그 손님은 뭐가 불만이시래?”
“하…. 이 층 두 번째 객실이요. 천장에서 물이 샌대요. 확인해 보니까 그 윗방 바닥에 구멍이 났더라고요.”
“뭐? 또 누가 방 안에서 검 휘둘렀어!”
“모르죠. 아무튼 수리할 사람 불러 놨어요.”
청연은 고개를 들어 3층 객실들을 노려보았다. 증축 공사가 끝나기 무섭게 바닥에 구멍이라니. 확 강호인 출입 금지 구역으로 만들어 버릴까 보다.
아무래도 조만간 경고문을 써서 객잔 여기저기에 붙여 놔야겠다. 지붕 위에서 혈투 벌이기 금지, 2층 난간에서 뛰어내리기 금지, 독 묻은 암기가 날아올 때 젓가락으로 잡기 금지, 요즘 잘나간다는 강호인의 뒷담화를 하다가 하필이면 그 사람과 딱 마주쳐 시비 붙기 금지.
“객주님!”
그때 얼마 전에 고용한 신입 점소이가 헐레벌떡 달려오며 청연을 불렀다. 열여섯 살 소년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가득했다.
“뒷간 문이 안 열려요. 누가 안쪽에서 잠근 것 같아요.”
“아니 또 어떤 놈이야? 저번에 그놈인가.”
“저번 그놈이요?”
“있어. 뒷간에서 폐관 수련하겠다고 문 걸어 잠그고 안 나오던 놈. 주화입마 올지도 모르니까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고 얼마나 진상을 피우던지.”
“에엑? 뒷간에서 폐관 수련을 어떻게 해요?”
“나도 몰라. 그쪽 터가 영험하다나 뭐라나.”
안 믿기지? 나도 믿고 싶지 않았단다.
청연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일단 가서 계속 두드려 봐.”
“그러다 진짜 주화입마 오면 어떡해요?”
“그러면 그냥 뒤지라고 해.”
“네에….”
점소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뒷간으로 향했다. 덕분에 경고문에 추가해야 할 항목이 하나 늘었다. 뒷간에서 뻘짓 금지.
마침 손님 한 명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주문하려는 눈치이길래, 청연은 그에게로 다가가 물었다.
“주문하시겠어요?”
“여기서 불언치도 한다는 게 사실이오?”
“네. 오시까지 영업합니다.”
“거참, 잘됐군. 나는 아침잠이 많아 식사 때를 놓치기 십상이었는데.”
고대 중원 사람들은 대부분 점심을 먹지 않았다. 아침저녁으로 하루에 두 끼를 먹는 것이 일반적이었기에 객잔도 점심시간에는 문을 닫았다.
그리하여 틈새시장을 공략해 보기로 했다. 남들보다 조금 늦게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아침 식사를 오후 한 시까지 팔기로 한 것이다. 점심이라는 단어보다 색다른 표현이 있을까 고민하다가 불언치(不言治)라 이름 붙였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돈 많고 시간 많은 부자 손님들은 객잔이 북적이는 아침 시간을 피해 느지막이 찾아와 여유로운 식사를 즐기는 편을 선택했다. 그렇게 돈 많은 큰손들이 자주 찾는 객잔이라고 입소문 타기 시작하며 인기를 끌게 되었다. 덕분에 소면과 만두가 아닌 비싼 음식들도 제법 잘 팔리게 되었고.
‘증축까지 했으니 말 다 했지, 뭐.’
주문을 받은 청연은 주방으로 향했다. 한창 바쁘게 움직이는 해우와 보조 숙수들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뿌듯해졌다.
‘내가 직원들을 참 잘 뒀어.’
크고 작은 일들을 함께 겪으면서 지난 5년간 함께해 준 해령과 해우 남매에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일을 게을리하는 것도 아니고 항상 열심이었으니까.
“주문 들어왔어. 회과육 하나.”
“네, 객주님.”
청연은 바삐 돌아가는 주방을 지켜보다가 이내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약을 먹어야 할 시간이었다.
그간 소명이 처방해 준 약재를 꾸준히 달여 먹었다. 덕분에 처음 빙의했을 때와 비교하면 몸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 여전히 건강하다고 말하기엔 어려웠지만 적어도 아무 데서나 픽픽 쓰러지는 일은 없었다.
청연의 과거에 대해서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꿈속에서 세화가 설산을 떠난 뒤로 꿈을 꾸는 빈도가 확연히 줄어들었고, 최근에는 거의 꾸지 않게 되었다. 꿈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을 바탕으로 시랑과 누님에 대한 정보를 수소문해 보았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약을 달여 마시고 있자니 제하가 떠올랐다. 요즘에도 분기별로 한 번씩 객잔을 찾아오는데, 볼 때마다 키가 쑥쑥 자라 있어 무서울 지경이었다. 그는 원작의 스토리를 차근차근 밟아 가며 빠르게 성장하는 중이었다. 주인공답게 어딜 가든 기연을 마주치고, 특유의 바르고 올곧은 성정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기니 벌써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었다.
5년 전, 소명 대신 제하를 구한 일로 두 사람의 관계가 완전히 틀어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제하는 스승님을 존경하고 따랐고, 소명도 제자에게 조금은 부드러워졌기에 둘의 사이가 발전하고 있음은 확실했다.
물론 청연이 제하의 속내까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제 열여섯 살이니까 슬슬 자신의 감정을 자각할 때가 가까워지지 않았을까 어렴풋이 짐작했다.
서브공 도경도 이따금 객잔에 찾아왔다. 지난번 비무대회 우승자를 두고 벌인 내기에서는 당연히 청연이 승리했고, 따라서 도경은 약속했던 대로 독살 시도를 그만두었다.
그는 원작과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었다. 아주 느리지만 조금씩 무공을 익히기 시작했고, 한 발 한 발 천천히 나아가는 성취감을 알게 되었다나.
어찌 됐든 제하와 도경은 의외로 제법 잘 지냈다. 두 사람이 자주 만날 일은 없었지만 가끔 마주치면 티격태격하면서도 죽이 잘 맞는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을 떠올리던 청연의 머릿속에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미래에 주인공이 서브공이랑 이어지면….’
에이 설마. 그럴 일이 있겠어?
청연은 머리를 흔들며 불안한 상상을 지워 냈다. 물론 애들만 행복하다면 그만이긴 하지만, 원작 스토리의 주축이 되었던 사랑의 화살표가 그렇게까지 틀어지는 건 조금 두려웠다.
전개가 이상하게 바뀐다면 저도 중원의 미래를 전혀 예측할 수 없게 되니까. 이를테면 정마대전이라든가….
‘정마대전….’
무호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올해 스물이 되었을 것이다. 그가 마교주가 되기까지 앞으로 5년이다. 막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어렵겠지.
그 전까지 무언가 대비를 해 두어야 한다. 돈을 있는 대로 끌어모아서 객잔을 팔고 어딘가로 도망쳐 잠적해 버린다든가.
그러다 만약 도망에도 실패한다면….
천마가 된 무호와 재회했을 때 과연 그를 설득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때의 무호는 제가 알던 그와 매우 다를 것이다. 정파를 몰아내고 중원 땅을 차지하는 데 혈안이 된 걸로도 모자라, 피와 살육에 미쳐 있을 테니까.
너는 정말 나를 감금하고, 고문하고, 고통 속에 죽어 가게 할까. 원작에서 그랬던 것처럼….
똑똑.
“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해령인가. 청연이 문 앞으로 다가가려고 할 때, 마침 문 너머에서 쾌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객주님, 접니다.”
“어…?”
“문 열어 주세요.”
***
삼천오는 사지를 벌벌 떨며 네발로 기었다. 바닥에 찰박찰박하게 고인 피 웅덩이가 양손과 다리를 축축이 적셨다.
눈이 닿는 곳엔 전부 시신이 있었다. 팔다리가 뜯겨 나간 시신, 몸에 구멍이 난 시신, 머리가 없는 시신 등 다양했다. 이 넓은 대련장에 죽음만이 가득해 산 사람의 기운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저 한 사람만 빼면.
두려움에 찬 시선이 저 멀리 우두커니 서 있는 남자의 형체를 훑었다.
공통으로 지급되는 평범한 무복을 입었음에도, 그가 뿜어내는 위압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큰 키와 근육으로 단단하게 짜인 몸,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칼을 보고 있자면 숨이 막혔다.
겨우 약관이라고 들었다. 약관의 나이에 이 정도의 실력이라면. 심지어 이 거리에서도 느껴지는 저 폭발적인 기운이라면.
그렇다면 미래에는….
남자의 시선이 느릿하게 움직여 삼천오에게 꽂혀 왔다. 허공에서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란 삼천오는 곧장 머리를 수그렸다. 유일하게 숨이 붙어 있는 먹잇감을 찾아낸 맹수의 눈동자가 붉게 빛난 것만 같았다.
이제야 알겠다. 저쪽이다. 이 한목숨 유지하려면 저쪽에 붙어야 하는 것이다.
삼천오는 열심히 시신을 넘고 피 길을 건너 그의 발치까지 기어갔다. 커다란 그림자가 몸 위에 드리워 세상이 한층 어두워졌다. 가까이서 올려다보니 그에게서 풍겨 오는 위압감이 더욱 강해져 이가 딱딱 소리를 낼 정도로 떨려 왔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검은 눈동자가 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왼쪽 눈가에 그어진 흉터를 바라보던 삼천오는 곧장 바닥에 이마를 박으며 말했다.
“주군.”
“…….”
“주, 주군으로 모시겠습니다. 앞으로 어떠한 길을 가시든, 주군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바닥에 고인 피가 이마에 묻어나는 것도 모른 채, 삼천오는 그의 발치에서 충성을 맹세했다. 한참 동안 그를 말없이 내려다보던 남자는 입을 열었다.
“이름.”
“삼, 삼천오입니다.”
“그거 말고.”
“예…?”
삼천오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이마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다시 한번 울렸다.
“네놈 진짜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