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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객잔 정상 영업합니다 (30)화 (31/145)

030화

세화는 창틀에 몸을 반쯤 걸친 채 밖을 내다보았다.

산 위에 쌓인 눈은 좀처럼 녹지를 않아서 어딜 가나 발자국이 남았다. 마당에 난 발자국을 눈으로 따라가다 보면 그 끝에 닿는 건 항상 그 사람이었다.

내 처음이자 마지막.

“시랑.”

작은 소리로 불러도 바로 돌아봐 주는 다정한 사람.

“창문은 또 왜 열었어.”

“심심하단 말이야.”

“춥잖아.”

그가 창가로 다가오면서 눈 위에 새 발자국이 새겨졌다. 세화는 그걸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저 정도 깊이면….’

“왜 그래?”

시랑의 물음에 퍼뜩 고개를 든 세화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발자국도 잘생겼다 싶어서.”

“…….”

“진짠데. 너는 그림자도 잘생겼어.”

세화는 양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 눈앞으로 가까이 끌어당겼다. 잘생긴 얼굴이 순순히 끌려와 눈을 깜빡였다.

“뭐 하는 거야.”

“더 가까이서 보려고. 원래 좋은 건 크게 보랬어.”

작은 숨결까지 느껴지는 거리, 그의 이마부터 턱 끝까지를 차근히 눈에 담았다. 조각 같은 하얀 얼굴과 대비되는 검은 눈동자. 매끄러운 콧등을 타고 내려가 보기 좋은 입매까지 눈길이 닿았다.

“진짜 크게 보니까 더 좋네. 너는 어때?”

“…….”

그 와중에 시랑의 시선은 줄곧 세화의 입술 위에 머물고 있었다. 묻는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그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밀어 냈다.

“아직 다 못 봤어. 기다려.”

어쩔 수 없이 뒤로 밀려난 그의 눈빛에 불만이 가득했다. 세화는 그를 놀리듯 입술을 손가락으로 살살 쓸며 미소 지었다.

“이목구비가 어렸을 때 그대로야. 그동안 키만 컸나 봐.”

시랑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번 접문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손바닥으로 밀어 그의 입술을 막아 냈다.

“기다리라니까? 아무튼 키만 커 가지고 성격 급한 것도 그대로네. 우리 처음 만났을 때는 키도 나랑 비슷했는….”

다음 말은 결국 시랑의 입술에 막혀 버리고 말았다. 그를 밀어 내던 손은 이미 단단히 잡혀 옴짝달싹할 수 없었고, 목덜미를 지그시 감싸며 눌러 오는 손길이 느껴졌다.

‘하여간 참을성 하고는.’

세화는 웃음을 삼키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 맞닿은 숨결을 느끼며 천천히 입을 벌려 그를 받아들였다. 꽉 잡힌 손끝이 저려 와 자꾸만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게 되었다.

처음 하는 것도 아닌데. 이럴 때마다 온몸이 간지러워 처음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그에게서 입술을 떼어 냈다. 세화는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시랑의 얼굴에 몇 번 더 입술을 쪼았다. 쪽쪽 소리가 나도록.

차가운 코끝과 코끝이 닿고, 날카로운 눈매가 부드럽게 풀리는 이 순간을 세화는 사랑해 마지않았다.

“그새를 못 참냐?”

“너무 짧아.”

“안 짧은데?”

“한 번 더 해.”

“너 하는 거 봐서.”

세화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제 몸을 감싸 안은 그의 손을 풀어내고는 창틀에 걸터앉았다. 자연스럽게 겉옷을 벗어 덮어 주는 시랑의 손길에 마음 깊은 곳까지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시랑. 우리 처음 접문했을 때 기억나?”

“아니.”

“그래. 기억하고 싶지 않겠지. 너 그때 나한테 강제로 하고 도망갔잖아.”

“그건….”

“진짜 못됐어. 순진한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순진은 무슨.”

“완전히 발랑 까져 가지고. 나 그날 밤에 억울하고 분해서 잠도 못 잤어!”

“…….”

세화는 큭큭 웃으며 시랑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항상 저를 지탱해 주던 든든한 어깨였다. 평생을 이러고만 있어도 좋을 텐데.

잠시 침묵하던 세화는 보다 차분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그다음 날 너 잡으러 갔잖아.”

“응.”

“분명 화내고 따지려고 간 거였는데 정신 차려 보니까 접문을 또 하고 있더라?”

“그건 네가 허락했어.”

“알아, 알아.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나 봐.”

“…….”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매일 치고받고 싸우면서도 꼭 쌍둥이처럼 붙어 다니던 그때로. 접문 한 번에 설레고 간지러워서 잠 못 자던 그날 밤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눈이 오려나 봐.”

시랑의 말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희뿌연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응. 눈 오겠다.”

“시장은 다음에 다녀와야겠어.”

“뭐?”

세화는 시랑의 어깨 위에 턱을 올려놓으며 울상 지었다.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한 채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집에 밀가루가 똑 떨어졌는데?”

“일단 다른 거 먹어.”

“아, 안 돼. 오늘은 꼭 너한테 국수 만들어 주고 싶단 말이야.”

“국수는 매일 먹잖아.”

“오늘의 국수는 또 오늘의 맛이 있다고.”

“그게 무슨….”

“귀찮아하지 말고 빨리 다녀와. 눈 펑펑 오기 전에.”

세화는 시랑의 등까지 떠밀며 독촉했다. 너는 걸음이 빠르지 않으냐, 연약한 정인을 위해 그 정도도 못 해 주느냐 종알거리는 목소리에 그는 못 이기겠다며 하산할 채비를 했다.

“가는 김에 술도 좀 사 와.”

“너 술 마시면 안 돼.”

“깐깐하게 구네, 정말.”

“또 나돌아 다니지 말고 꼭 방 안에 따뜻하게 있어.”

“아, 알겠어. 걱정하지 마.”

시랑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세화는 마당까지 나가 그를 배웅했다. 오늘만큼은 그의 하얀 얼굴을 잠시라도 더 보고 싶었다.

“잘 다녀와.”

“어서 들어가.”

“눈길 조심해. 다치지 말고.”

겨우 눈길 정도에 다칠 사람이 아니라는 건 잘 알지만.

그렇게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바람에 휘날리는 흰 옷자락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마지막 순간을 마음에 새겼다.

***

시랑.

우리 어릴 때 했던 얘기 기억나?

네가 세상을 구하면 나는 그런 너를 구하겠다고. 내가 허풍처럼 말했었잖아.

사실 그거 진심이었어.

그때의 너는 누구보다도 빛났거든. 사람한테서 후광이 비칠 수 있다는 걸 나는 처음 알았다?

꿈이라는 게 그런 건가 봐. 사람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작은 불씨 같은 거.

그 불씨가 꺼지지 않게, 네 곁에서 지켜 주고 싶었어. 함께 나이 들어 가면서 친구처럼. 자연스럽게.

그런데 그 불씨를 내 손으로 꺼 버린 것 같아.

나는 이제 너를 구하기는커녕, 내 몸 하나 제대로 건사할 수가 없어.

그런 내 옆을 지키는 네게 죽도록 미안하면서도 네 손을 놓고 싶지 않았어. 어쩌면 우리끼리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버텼어.

내 곁에 있는 너는 점점 빛을 잃어 갔는데. 그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던 것 같아.

그동안 내 이기심이 너를 얼마나 괴롭게 했던 걸까.

매일 밤, 내가 잠들고 나면 침상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던 거 알아.

네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저 산 밑을 내려다보는 내내 나는 네 뒷모습만 지켜봤거든.

네 속이 얼마나 시커멓게 죽어 있을까. 그런 생각 하면서.

시랑.

한때는 내가 우러러보았던 네 뒷모습이 이제는 나를 초라하게 만들어.

아직 너를 사랑하지만, 너와 함께 있는 시간이 더 이상 행복하지 않아.

그러니까 여기서 그만하는 게 맞는 것 같아.

너는 돌아갈 곳이 있고, 나는 도망칠 곳이 있을 때.

이런 식으로 떠나게 돼서 미안해. 남은 평생 나를 욕한다고 해도 달게 받을 거야.

네 얼굴 보고서는 절대 말 못 할 걸 알아서. 그리고 너도 날 보내 주지 않을 걸 알아서. 이렇게 서신 한 통으로 작별을 전할게.

내가 없는 곳에서 꼭 다시 빛날 수 있기를.

너의 친구이자 형제이자 정인이었던,

세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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