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화
청연은 아침부터 손님들의 식사를 준비하느라 바빴다. 그간 혼자서 일을 도맡아 했기에 몸이 많이 지친 것인지 오늘따라 기운이 없었다.
심지어 어젯밤 꿈자리가 뒤숭숭했다. 요즘 들어 꿈을 꾸는 일이 잦아졌는데, 배경은 항상 같았다. 산속의 그 집.
꿈속에서 세화의 상태는 호전되었다가 다시 악화되기를 반복했다. 어떤 날은 연인과 알콩달콩 사랑만 나눴다면 또 어떤 날은 앓아눕거나 종일 우울함에 시달렸다.
세화의 상태가 일정하지 않은 이유를 청연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어젯밤처럼 꿈속에서 세화가 아프기라도 했던 날에는 그다음 날까지 몸이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일까. 자꾸만 머리가 지끈거려 청연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일어나서 약을 먹었던가….’
아무래도 정신이 없어 잊은 것 같다. 이놈의 저질 체력. 평생 약 없이는 살아가지도 못할 운명인가 보다.
청연은 눈앞에 놓인 당근을 힘주어 썰며 중얼거렸다.
“아이고, 민아야…. 내가 지금 당근을 썰게 아니라 너를 썰어 버려야 하는데.”
“민아라니요?”
“헉.”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주방 문 앞에 서 있는 제하의 모습이 보였다. 제하는 청연이 놀랄 것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당황하며 허둥지둥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객주님을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괜찮아, 괜찮아.”
청연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제하에게 웃어 주었다. 예민한 기감을 가진 스승님과 함께 사는 아이니까, 당연히 이 정도로 놀랄 줄은 몰랐겠지.
제하는 청연의 손을 끌어당겨 혈 자리를 꾹꾹 누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런데 민아가 누굽니까?”
“있어. 내가 아는 사람.”
“당근처럼 썰어 버리고 싶은 정도라면 큰 원한을 맺은 이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제가 객주님 대신….”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혹시나 주인공이 쓸데없는 복수라도 결심할까, 청연은 기겁하여 외쳤다. 그러나 제하는 진지한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그 민아라는 사람이 혹여 객주님 단전을 파괴한 자라면 저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아니더라도 객주님의 신변을 위협하는 자는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아이를 보며, 청연은 머리가 더욱 아파 왔다.
‘지금 내 단전이 여기서 왜 나오니. 아니, 엄밀히 따지면 민아가 작가니까 걔가 파괴한 게 맞긴 하는데. 일단 민아 얘기 좀 그만하자.’
청연은 대충 화제를 돌렸다.
“주방엔 무슨 일이야? 이렇게 이른 시간에.”
그의 질문에 제하는 표정을 굳히더니 잠시 망설이다 답했다.
“별거 아닙니다.”
“별거 아닌 게 아닌데?”
“아닙니다!”
“말해 봐, 아가.”
“언제까지 아가라고 부르시려는지….”
“아, 미안. 입에 붙어서 자꾸 깜빡깜빡한다.”
제하는 입을 삐죽 내밀면서도 계속해서 청연의 손을 주물렀다. 그 모습이 귀여워 더 놀려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꾹 참아 냈다.
“어제 공자님이랑은 그게 끝이었어? 뭐라고 더 말씀하진 않으셨고?”
“네에….”
“왜 그런 걸로 싸우고 그래. 내 아들이란 소리 좀 들으면 뭐 어때서.”
“…….”
그러자 제하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그 모습을 본 청연은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제하에게는 남다른 의미일 텐데. 생판 남이랑 엮이면서 부자지간이냐는 말을 들었으면 기분 나빴을 수도 있겠다.’
제하에게 혹시 모르니 도경을 조심하라 일러두긴 했지만, 이렇게 감정까지 상해 가며 싸울 줄은 몰랐던 터라 마음이 안 좋았다. 도경도 아직은 어린데, 제하에게 일찍부터 그에 대한 선입견을 심어 준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제하야.”
“객주님, 저는….”
“응?”
제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객주님 아들도, 아가도, 순둥이도 아닙니다.”
“으응…. 그렇지.”
그동안 애라고 너무 무례하게 굴었던가. 시무룩해진 아이의 말을 들은 청연은 내심 반성했다.
***
그날 오후, 청연은 필요한 식재료들을 사기 위해 시장에 갔다. 약도 챙겨 먹었는데 무슨 일인지 여전히 몸이 좋지 않았다.
‘스트레스 때문인가.’
역시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인가 보다. 이번 손님이 떠나고 나면 잠깐 객잔 문을 닫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장을 보고 있을 때, 문득 옆에서 들려온 아삭, 하는 소리에 청연은 고개를 들었다.
소리가 들려온 곳에는 3~40대쯤 되어 보이는 한 남자가 서서 손에 든 사과를 베어 물고 있었다. 표정은 살짝 웃는 듯 마는 듯했고, 시선은 정확히 청연을 향해 있었다. 마치 그를 알아본 것처럼.
‘뭐지? 처음 보는 사람인데.’
열심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저런 얼굴을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익숙하지? 꼭 예전에 알던 사람같이.
청연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미소 짓던 그는 손에 쥔 사과를 던졌다 받았다 하며 가지고 놀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 그를 훑어보던 청연은, 남자의 허리춤에 달린 물건을 발견하고는 흠칫 놀랐다.
그것은 검은색 가면이었다. 이마에는 작은 뿔이 두 개 달려 있었고, 막혀 있는 입가엔 날카로운 이빨이 그려져 있었다. 특별한 것 없는 가면이었지만, 그걸 보는 순간 청연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뭐야?’
머리가 아닌 몸의 반응이었다. 저런 물건은 처음 보는 것이 분명함에도, 자꾸만 가슴이 쿵쿵 뛰었다.
설마 세화와 알던 사람인가.
청연은 그에게만 들릴 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누구….”
“이런 곳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구나.”
낮은 목소리가 청연의 말을 끊고 전해져 오자, 심장이 더욱 요동치기 시작했다. 저 사람이 누구길래 몸이 이렇게까지 반응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청연은 애써 정신을 차리며 물었다.
“누구십니까?”
“나를 모르는 척하는 것이냐. 아니면 기억을 잃기라도 한 것이냐.”
“…….”
“이리 건강하게 돌아다니는 걸 보아하니 생각보다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다. 지금쯤이면 초주검이 되어 있을 줄 알았건만.”
그가 알고 있다.
세화를 알고 있음은 물론이고, 이 몸의 상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남자에게서 전해져 오는 음침한 기운과 주체할 수 없는 몸의 반응에 청연은 그 자리에 굳어졌다. 때마침 떠오른 말 한마디가 귓가에 들려오는 듯했다.
‘악의를 품으면… 티가 나.’
도박장에 갔던 날, 청연을 등에 업은 무호가 했던 말이었다.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저 남자는 제게 악의를 품고 있었다.
뻣뻣해진 다리로 그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려던 순간, 마침 두 사람 사이로 한 무리의 행인들이 끼어들었다. 그들이 모두 지나쳐 갔을 땐 남자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어디 갔어?’
청연은 미친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고 나서야 저만치 걸어가 멀어지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그의 걸음걸이는 가벼웠다. 남들보다 두 배는 빠르게 걷는 듯했다. 남자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던 청연은 저도 모르게 그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지만, 그보다는 궁금증이 더 컸다.
‘설마 이 몸의 단전을 파괴한 사람인가.’
청연은 그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채로 조심히 그를 뒤따라갔다.
남자는 사람으로 북적이는 시장을 지나, 이 골목 저 골목을 돌면서 나아갔다. 어디까지 가는 걸까. 이 길은 번화가로 향하는 길인데.
그의 빠른 걸음을 따라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점점 숨이 가빠지는 걸 느꼈다. 그를 놓치지 않으려 속도를 높였음에도 자꾸만 거리가 벌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골목 하나를 더 돌고 나서는 남자의 뒷모습을 아예 찾아볼 수 없었다. 허탈해진 청연은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침 눈앞에 놓인 커다란 전각 하나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기루?’
성도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기루였다. 청연은 그 자리에 멈춰 서 전각을 올려다보았다. 창틈으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저 안으로 들어갔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청연은 조심히 기루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아직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기루 안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수상한 남자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청연의 곁으로 기녀 몇 명이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그들에게 청연은 창백해진 얼굴로 물었다.
“방금 남자분 한 분이 들어오시지 않으셨습니까?”
“네? 방금 들어오신 분이 한둘이어야죠. 어떤 분을 말씀하시는지?”
“아. 나이는 이립에서 불혹, 흰옷을 입었고 허리춤에 검은 가면을 달고 있었는데….”
그 말에 기녀들은 골똘히 고민하며 입을 열었다.
“검은 가면? 나는 그런 사람 못 본 것 같은데. 너는 봤어?”
“아니. 나도 못 봤어.”
기녀는 다시 청연에게로 돌아서며 환하게 웃었다.
“입구에서 그러지 마시고 어서 들어오세요. 천천히 놀면서 찾아보시면 되죠.”
여기가 아닌가.
청연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러고서는 발걸음을 돌려 기루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분명 몸이 먼저 그를 알아본 것 같았단 말이지.’
빙의하고 나서 그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그 순간 느낀 감정은 두려움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두렵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경멸에 가까운 복잡한 감정이었다.
청연은 하는 수 없이 터덜터덜 객잔으로 향했다. 안 그래도 몸이 좋지 않은데, 조금 전에 한참을 빠르게 걸어서인지 체력이 고갈되었다. 팔다리가 점점 떨려 오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있는 힘 없는 힘을 모두 끌어모아 객잔에 도착한 청연은 입구에 멈춰서 숨을 골랐다. 머리가 어지러워 방까지 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객주님?”
마침 일 층에 머물고 있었는지, 놀란 얼굴로 달려오는 제하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객주님! 피, 피 나요!”
그의 말대로 코 밑에서 무언가 주르륵 흐르는 느낌에 손으로 닦아 보니 피가 묻어났다. 청연은 옷소매로 코를 틀어막았다.
애 앞에서 또 이런 거 보여 주면 안 되는데.
제 뺨을 치며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결국엔 눈앞이 팽팽 돌기 시작했다. 가쁜 숨을 내쉬던 청연은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땐 다시 꿈속의 설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