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화
청연은 객잔 후원에 있는 나무 한 그루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유독 굵은 가지 위에 자리를 잡고 유유자적하게 누워 있는 도경의 모습이 보였다.
원작에서 그는 무학에 재능이 없었다. 타고난 근골이 약하고 내공이 쌓이는 속도가 느려 또래들보다 한참 뒤처졌기에 남궁세가의 이름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진 두 형님에게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유약하기만 한 막내 공자로 자라나는 듯했지만, 그는 사실 날카로운 발톱을 숨기고 있었다.
도경은 자신을 무시하는 두 형님의 독살을 시도했다.
그는 매일 차를 마실 때마다 대공자 남궁건의 찻잔에 극소량의 독을 묻혔다. 마시는 사람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아주 적은 양이었다. 무공으로 튼튼하게 다져진 건의 몸에는 기별도 없을 만큼의 독이었지만, 몇 년에 걸친 노력 끝에 그는 결국 중독되어 시름시름 앓아눕고 말았다.
꾸준하게 섭취된 소량의 독은 이미 몸에서 분해되어 병증의 원인을 찾을 수도 없었고, 강인했던 남궁세가의 대공자가 갑자기 병에 걸렸다는 소문이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이때 우연히 근처를 지나던 소명이 나타나 그를 치료한 것이었다.
그렇게 독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도경은 포기하지 않았다. 몇 번이고 함정을 파서 형님들을 해하려 들었다. 그가 소명에게 첫눈에 반했다며 따라다니기 시작한 것도 사실은 독에 대한 비밀을 알고 있는지 떠보기 위함이었다.
이후에도 꾸준히 두 형님을 암살하기 위해 계략을 꾸미는 것은 물론이고, 주인공수를 경계하며 그들을 사사건건 방해하려 들던 도경은 결국 꼬리가 길어 행적이 발각되고 말았다. 결국 그는 저지른 죄를 용서받지 못해 남궁세가에서 파문당하며 자취를 감췄다.
거기까지가 원작에서 그려진 도경의 이야기였다.
웬만하면 개입하지 않으려고 했다. 무호의 일로 이미 지쳐 있었기에 더 이상 복잡한 사건에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가 찻잔에 독을 묻힐 걸 알면서도 주문하는 대로 내어 주었다.
몇 달 전, 제하가 납치되도록 내버려 두었던 것처럼. 그렇게 방관자로 남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날 밤 아이를 찾아 돌아다니며 그토록 뼈저린 후회를 맛보았기 때문인지, 몸이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그래서 독이 묻은 잔을 밀어 떨어뜨렸다.
단순히 대공자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어차피 그는 중독된다고 해도 소명에게 치료받아 죽지 않을 테니. 그보다는 계속해서 악행을 저지르며 자라나, 언젠가는 세가에서 파문당할 도경이 조금은 걱정되는 마음에 벌인 일이었다.
그가 속으로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해도, 아직은 어린아이다. 형님들에게 대놓고 무시당하는 아이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어쩌면 그의 운명을 바꾸기에 늦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도 참 어쩔 수 없는 오지라퍼구나.’
청연은 그가 누워 있는 나무 아래로 천천히 다가갔다. 발소리가 분명히 들릴 텐데, 모르는 척 눈을 감으며 시선 한번 주지 않는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거기서 주무시면 떨어지십니다.”
팔짱을 끼고 맞은편 나무에 기대어 선 청연이 도경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 말에 도경은 살며시 눈을 뜨더니 미소 지었다.
“떨어지면 받아 주시렵니까?”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해맑고 순수한 아이의 것으로 생각할 만한 웃음이었다. 청연은 그 웃음에 속지 말자고 여러 번 되뇌었다.
“그러기엔 제힘이 변변치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작고 연약한걸요.”
그와 동시에 도경의 몸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청연은 흠칫 놀라 팔을 뻗으려다가 이내 얼굴을 굳혔다.
‘지금 떨어지는 척하려는 거지?’
역시나 아무 문제 없이 땅 위에 사뿐히 착지한 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뒷짐을 지고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왔다. 청연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사람 놀라게 하는 데 재주가 있으십니다.”
“칭찬 감사합니다.”
“…….”
눈치가 빠른 아이니 이미 알고 있을 텐데. 제 비밀을 내게 들켰다는 걸.
청연은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저와 할 이야기가 있지 않으십니까?”
“아. 아침 식사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감사히 잘 먹었습니다. 솜씨가 아주 좋으셔서 형님들께서도 칭찬하셨습니다.”
“그게 아니라….”
“그런데 저는 한창 자랄 나이라서 그런지 벌써 배가 고픕니다. 들어가서 간식을 좀 먹어야겠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만들어 드릴 테니….”
“챙겨 온 게 있으니 괜찮습니다.”
도경은 그대로 청연을 스쳐 지나가려 했다. 청연은 황급히 그의 소매를 붙들었다.
“공자.”
“…….”
“공자께서 가려 하시는 그 길의 끝은 낭떠러지입니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꾸시는 게….”
“낭떠러지라니, 간식 한번 먹으러 가는 길이 그렇게 위험하답니까?”
도경은 청연의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 눈을 곱게 접어 웃으며 말했다.
“식시제일강(먹을 때가 제일 강함)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좀 강해져야겠습니다.”
“그걸 또 언제 보셨…,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맛있게만 먹으면 내공이 육십갑자라니. 제게는 참으로 반가운 소식입니다.”
“…….”
“그럼 이만. 육십갑자의 내공을 쌓으러 가 보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빠르게 멀어져 가는 도경의 뒷모습을 보며, 청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 돌리는 솜씨가 수준급이네. 열세 살짜리 애가 벌써….’
제하와 겨우 두 살 차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무래도 두 아이가 객잔에서 부딪치는 건 최대한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작에서 한창 등장했을 때보다는 어린 나이라지만, 소명에게 접근하며 제하 속을 살살 긁어 놓던 걸 생각하면 둘이 만나서 좋을 일은 없을 것이다.
‘…골치 아프게 됐네.’
청연은 터덜터덜 객잔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도경은 품속에서 자그마한 병을 하나 꺼냈다. 입구를 막고 있는 마개를 열어 남은 양을 확인했다.
‘아직 많이 남았네.’
무색무취의 이 액체는 독이었다. 고수도 단번에 쓰러뜨린다는 맹독은 아니지만, 오랜 시간 꾸준히 사용해도 내성이 생기지 않아 효과가 제법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중원 제일가는 무림세가에서 태어나 이런 짓이나 하는 걸 알면 다들 손가락질하겠지만, 하필이면 그 무림세가 출신인 것이 문제였다.
무공에 재능이 없다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으니, 주변에서도 도경에게 무공 실력을 기대하지 않았다.
어차피 서자이고 막내지 않느냐. 형들이 뛰어나니 동생 하나쯤은 시나 읊고 그림이나 그리며 살아가도 나쁘지 않다. 그런 말들을 위로랍시고 내뱉는 자들에게 도경은 고맙다며 웃어 주었다.
서자라고 해도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었으며, 돈 한 푼 부족할 일 없었으니 그것도 꼭 틀린 말은 아니다. 평생을 빈둥거리며 놀고먹어도 굶어 죽지 않을 것이다.
다만 견디기 힘든 건 멸시와 조롱의 눈빛이었다. 집안 어르신들은 제게 큰 관심이 없었고, 형님이라는 것들은 하나같이 오만하고 과시하기에 바쁘니, 그 사이에서 저는 발에 차이는 돌멩이 취급밖에 받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결심했다. 무력으로 제압할 수 없다면 비겁한 술수라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해서라도 제 머리 꼭대기 위에서 노는 형님들을 이겨 볼 수 있다면 더 이상 소원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은 어떻게 알았지?’
분명 아무도 못 봤다고 생각했는데. 짐짓 실수라는 듯 잔을 떨구며 저를 바라보던 눈빛에 경계가 가득했다.
‘알면 뭐 어쩌겠어.’
몸에서 검출되지도 않을 만큼 소량의 독이니 물증도 없겠다. 그 사람이 진실을 떠들고 다닌다 한들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유약한 남궁세가의 막내 공자를 죄인으로 몰아간다며 비난받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인해 봐야겠다. 그 사람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세가와 관련된 사람이 정체를 숨기기라도 한 건지.
도경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을 나섰다.
2층 난간에 기대 아래를 내려다보니 제 또래 아이 하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객주의 모습이 보였다.
“청소 안 해도 된다니까?”
“혼자 하시기엔 너무 많습니다! 제가 도와드릴 겁니다.”
“이 순둥이가 정말….”
“순둥이 아니라니까요!”
“알았어, 아가. 너 순둥이 아니야.”
“아가도 아닙니다!”
아들인가? 자녀를 둘 만한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 뭐, 이른 나이에 혼인했으면 그럴 수도 있지.
“오늘 저녁은 뭐 먹을래?”
“음… 음… 저는….”
“천천히 생각해 봐, 아가.”
“아가 아니라고요!”
“알았어, 알았어.”
눈빛 하나, 손길 하나가 더럽게 다정하다.
언제나 냉철하고 엄격하기만 한 제 아버지를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속이 끓었다. 부자지간은 원래 그런 건 줄로만 알았는데.
상관없다. 애초에 가지고 싶은 건 다정한 아버지 따위가 아니었다.
도경은 발소리를 죽이고 복도를 따라 걸었다. 그가 멈춰 선 곳은 복도 끝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방 앞이었다.
객주가 쓰는 방을 미리 눈여겨봐 두었다. 문고리를 잡고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히 돌리니 잠기지 않은 문이 손쉽게 열렸다.
‘정말… 조심성도 없는 사람이네.’
문을 살며시 밀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깔끔하게 정리 정돈 되어 있는 방 안에서는 은은한 약재의 향이 풍겼다.
향을 따라가다 보니 방 한쪽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약재가 눈에 띄었다. 도경은 그중 몇 가지를 집어 자세히 살펴보았다.
약학에 대한 지식이 깊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잡다한 서책을 많이 읽었기에 그 약재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이것들은 한눈에 보아도 시중에서 구하기 힘든 고급 약재였다. 대부분 기력 증진에 효과가 좋기로 기록된 것들이었다.
‘어디 아픈 사람인가?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는데.’
도경은 약재를 내려놓고 손을 털었다. 객주가 돌아오기 전 다른 곳도 살펴봐야 할 것 같았다.
어디서부터 뒤져 볼까.
그렇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마침 침상 옆에 놓여 있는 협탁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위에 놓여 있는 부채 하나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도경은 살며시 다가가 부채를 집어 들었다.
하필 그것이 눈에 들어온 까닭은 부챗살 하나가 부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걸 다시 붙이려 한 건지, 엉성한 솜씨로 이어 놓은 꼴이 우스웠다. 이래서는 부채를 제대로 쓰지도 못할 텐데 차라리 새로 살 것이지.
대충 붙여 놓은 이음매를 매만지자 역시나 똑 하고 부러져 내렸다. 도경은 혀를 쯧쯧 차며 부러진 부채를 다시 협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른 곳을 마저 살펴보기 위해 걸음을 떼려던 순간, 등 뒤에서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사특한 기운이 느껴졌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는 어느 방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궤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런데 그 안에서 풍겨 오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등줄기에 소름이 돋고 머리까지 쭈뼛 서는 듯한….
‘저 안에 뭔가 있어?’
도경은 한 발 한 발, 천천히 궤를 향해 다가갔다. 가까이 갈수록 그 기운이 더욱 맹렬해지는 것만 같았다.
‘한번 열어 볼까….’
도경이 길쭉한 문짝 위에 손을 얹은 그때, 마침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 발소리는 여러 방을 지나, 분명 이곳을 향하고 있었다.
‘객주인가?’
도경은 손을 거두어들이고 주변을 살폈다. 한쪽 벽으로 나 있는 커다란 창이 보였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와중에, 도경은 창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내려 가볍게 착지했다. 그리고 짙은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아무래도 내일은 그의 아들에게 접근해 봐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