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화
“대인께서 소흥주를 좋아하신다고 하여 가져왔습니다.”
소명의 시선이 청연의 손에 들린 술병으로 향했다. 그는 책을 덮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가 자고 있으니 자리를 옮깁시다.”
두 사람은 1층으로 내려가 탁자에 자리 잡았다. 등을 켜자 어둑했던 객잔이 밝아졌다.
“제가 이 술을 마신다는 건 어찌 아시고.”
“제하가 말해 주었습니다.”
“별 이야기를 다 하는군요.”
호박색을 띠는 술이 잔을 가득 채웠다. 소명은 잔을 집어 술을 그대로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고수들은 술도 잘 마신다더니.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술을 물처럼 마시는 모습이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맛이 어떻습니까?”
“씁니다.”
“달다고 하실 줄 알았는데.”
“한 번도 달았던 적 없습니다.”
그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눌러 닦으며 청연을 바라보았다.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아…. 그런 건 아닙니다.”
사실 딱히 할 말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마음이 복잡해서 술이나 한잔하고 싶었는데 같이 마실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다.
청연은 제 앞에 놓인 잔을 들어 비워 냈다. 쓰디쓴 술맛에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정말 씁니다.”
“객주님 몸에는 술을 드시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만.”
“…….”
“오늘은 예외로 칩시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연거푸 몇 잔을 더 마셨더니 금세 술기운이 올랐다. 청연은 안주로 내온 땅콩을 씹으며 푸념했다.
“어째 제 마음대로 돌아가는 일이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
“저는 나름대로 노력한다고 했는데 그게 부족했던 탓인지.”
“…무슨 일이 있었기에.”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 아이 목숨도. 제 목숨도. 그리고 다른 무수한 사람들의 목숨도. 그런데 지키기는커녕, 죄 없는 다른 이까지 휘말려 다치게 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
“저는 이제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더 이상 어떤 일에 말려드는 것도, 누군가의 인생을 바꿔 보겠다며 나서는 것도 하지 않으렵니다.”
“도망가신다던 게 그런 말씀이셨는지….”
“예. 그냥 도망이나 가렵니다.”
점점 머리가 띵하고 발음이 꼬이는 것만 같았다. 청연은 턱을 괴고 앉아 애꿎은 땅콩 껍데기를 만지작거리며 괴롭혔다.
반면에 여전히 멀쩡해 보이는 소명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나 싶더니 술 몇 잔을 더 따라 마시고 입을 열었다.
“제가 왜 소흥주를 마시는지 알고 계십니까.”
“어… 아뇨?”
그는 빈 잔을 내려다보며 손가락으로 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소흥 지역에서는 집안에 딸아이가 태어나면 이 황주를 담가 꽃 그림이 그려진 단지에 넣고 땅에 묻어 둡니다. 그리고 아이가 자라 시집갈 때가 되면 묻어 둔 술을 꺼내 동네 사람들과 나눠 마시는데, 그 술을 여아홍이라 부릅니다.”
“아, 들어 본 것 같습니다.”
여아홍이라면 무협 소설에서 자주 보았던 기억이 있었다.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를 하시지….
“제 누이가 태어났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시집갈 때 꺼내 마시려고 술을 담가 마당에 묻어 두었지요.”
“예? 누이가 있으십니까?”
이것도 원작에 없던 얘긴데. 원작에서는 제하와 소명의 현재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에 모든 등장인물의 과거는 네다섯 줄 정도로 간략히 설명되었다. 소명의 가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고.
“정확히 말하자면, 있었습니다. 일찍이 세상을 뜨기는 했지만.”
“아….”
“제가 객주님 나이쯤 되었을 때일 겁니다.”
좀처럼 개인사를 늘어놓지 않는 그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차분히 말을 이어 나갔다.
“그날따라 비가 많이 왔던 것 같습니다. 빗방울이 창을 때리고 간간이 천둥소리도 들려왔지요.”
당시에는 소명도 스승에게 배우는 입장이었던지라, 밤늦게까지 불을 밝히고 침술을 연구하던 중이었다. 창밖이 빗소리로 시끄러웠고 연구에 워낙 몰두한 탓에 누군가가 담장을 넘는 기척을 알아채지 못했다.
한밤중에 찾아온 불청객을 알아차린 건, 그 사람의 희미한 신음이 들려왔을 때였다.
소명은 우산을 들고 방을 나섰다. 의심스러운 소리가 들려온 곳을 따라 걸어가다 보니, 담장 밑에 웅크린 한 남자의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중상을 입은 채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움찔움찔 떨고 있었다. 빗물이 피를 씻어 내리기 무섭게 다시 피가 고여 땅을 흥건하게 적셨다.
이 밤중에 무슨 일이지. 관아에 신고해야 하나.
의심스러운 사내가 검흔을 입은 채 남의 집 담장 안으로 침입해 오는 건 예삿일이 아니었으니.
출혈이 심해 이대로 두면 금방 죽을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낯선 이를 무턱대고 집 안으로 들이는 것도 찝찝하여, 소명은 그 자리에 서서 잠시 고민했다.
‘살려… 살려 주시오.’
남자는 애처롭게 떨며 소명을 향해 손을 뻗었다. 기운 빠진 손은 얼마 못 가 바닥으로 툭 떨어져 내렸다.
안 되겠다. 일단 사람은 살리고 봐야겠지.
소명은 결국 그를 집 안으로 옮겼고, 성심성의껏 치료했다.
남자의 의식이 돌아온 건 대략 보름 정도가 지난 후였다. 그는 길에서 마주친 강도에게 협박당하고 쫓기다가 그런 신세가 되었다 설명했고, 목숨을 구해 주어 고맙다며 소명에게 몇 번이고 감사 인사를 올렸다.
조만간 크게 보답하겠다 호언장담한 그는 떠나는 순간까지도 끊임없이 감사를 표했다.
“그래서, 보답받으셨습니까?”
소명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 반대였습니다.”
“반대라면….”
“그자의 손에 제 누이가 살해당했습니다.”
“예?”
“알고 보니 그자가 유명한 강도였더군요.”
제 손으로 살린 사람에 의해 누이가 죽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청연은 뭐라 위로의 말을 전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그 뒤로 의술에서 손을 떼었습니다. 선인이든 악인이든, 사람이라면 살려야 한다는 신념이 깨져 버렸고, 저는 침 한 대도 놓을 수 없는 몸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돌아오시지 않으셨습니까.”
“참으로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중원 전역을 방황하며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짓들을 많이 벌였습니다. 누이의 복수랍시고 무고한 사람들에게 화풀이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저 자신이 낯설 정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마음을 다잡으신 겁니까?”
소명은 탁자에 놓여 있던 술병을 가리켰다.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와 땅을 파 보니, 그 아이가 태어났을 때 담가 둔 술이 그대로 있더군요. 어차피 시집보낼 일도 없어졌겠다, 꺼내 마셨지요.”
“…….”
“술이 그렇게 쓸 수가 없었습니다. 쓴 술을 진탕 마시고 취해서 잠들었는데, 누이가 처음으로 꿈에 나오더군요.”
오라버니는 타고나길 선한 사람이시니, 사람을 해하는 길보다는 살리는 길이 어울리신다. 그러니 그만 방황하시고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을 따르시라.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꿈에서도 착한 아이였습니다. 그 아이가 해 준 말이 아니었다면, 저는 길거리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다 생을 마감하였을 겁니다.”
그는 술병을 집어 마지막으로 남은 술을 졸졸 따라 냈다.
“죄책감을 완전히 지워 버린 것은 아닌지라, 아직도 환자를 보고 나서는 이 소흥주를 마십니다. 꿈속에서라도 누이에게 사죄할 수 있을까 하여….”
“그런 일을 겪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제하에게 습관처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소명은 술을 들이켜 잔을 비워 내고 말했다.
“아무리 타고나길 선한 사람이라도 선과 악은 칼로 베는 것처럼 정확히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내면에 잠들어 있는 악을 언제나 경계해야 한다고. 항상 선한 쪽으로 나아가도록 노력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입니다.”
“…….”
“저는 객주님께서 선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입으로는 도망가겠다 말씀하실지언정, 그와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
“일전에 잔을 깨신 것 말입니다.”
“아….”
‘다 알고 계셨나. 언제부터 보고 계셨지.’
청연은 무덤덤한 얼굴의 소명을 향해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술이 올라 어지러웠던 머리가 한순간에 맑게 개는 느낌이었다.
***
다음 날 아침, 도경은 역시나 가장 먼저 식당으로 내려와 세 명분의 아침 식사를 주문했다.
어린아이가 아침 일찍 일어나 저렇게 완벽히 단장한 모습을 보이기도 참 힘든 일일 텐데. 도경은 여유롭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차를 홀짝이며 형님들을 기다렸다.
이윽고 건과 환도 준비를 마치고 내려와 자리를 잡았다.
“도경아.”
“예, 형님.”
“우리는 밖에서 볼일이 있으니, 너는 말썽 피우지 말고 객잔에 남아 있거라.”
“저도 같이 가면 안 되는 것입니까?”
그 말에 환이 끼어들어 도경을 꾸짖었다.
“형님이 남아 있으라면 남아 있을 것이지 말이 많구나!”
“예. 그럼 저는 전에 못다 그린 그림을 완성하고 있겠습니다.”
도경은 기가 죽지도 않는 것인지, 생글생글 웃으며 그러겠다 답했다.
“그림 그릴 시간에 무공이나 익힐 것이지. 쯧.”
마침, 미리 아침 식사를 준비해 두었던 청연이 그릇을 내왔다. 요리를 하나씩 탁자에 올려놓던 그는 다시 한번 손목으로 건의 찻잔을 툭 쳐서 떨어뜨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건의 행동이 더 빨랐다. 그는 손을 뻗어 떨어져 내리던 찻잔을 가볍게 받아 냈다.
“손이 빠르십니다.”
“…조심하셔야지 않겠습니까.”
건은 성가시다는 듯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러고 보니 잔에 먼지가 묻은 듯한데, 새 잔으로 바꿔 드리겠습니다.”
“제가 보기엔 멀쩡합니다만.”
“제가 보기엔 더럽습니다.”
청연은 그의 손에 들린 찻잔을 낚아채듯이 빼앗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꼿꼿이 서서 도경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또 웃어?’
청연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미소 짓는 도경을 향해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 내 객잔에서 허튼짓할 생각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