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우리 객잔 정상 영업합니다 (25)화 (26/145)

025화

남궁세가의 가주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다. 장남이자 소가주인 남궁건, 차남 남궁환, 그리고 막내이자 유일한 서자인 남궁도경이었다.

삼 형제 중의 막내. 가장 작고 여려 보이는 아이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유독 뽀얀 피부와 발그레한 뺨이 복숭아를 연상시키는 예쁜 아이였다.

‘그러니까 쟤가 원작의 서브공이라는 거지.’

나이로 따지면 제하보다 두어 살 많을 텐데 성장 속도가 느린 건지 두 사람의 체구가 비슷해 보였다. 그래도 세가의 공자님이라서 그런지, 어딘가 애어른 같은 분위기를 풍기기는 했지만.

번지르르한 옷자락을 휘날리며 객잔 안으로 향하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청연은 생각했다.

‘왜 하필 지금이야…. 주인공수가 객잔에 와 있는 이때….’

원작대로라면 소명과 도경의 첫 만남은 대략 삼 년 후에 이루어졌어야 맞다. 남궁세가의 대공자 남궁건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고, 우연히 안휘성 근처를 지나던 소명이 이를 치료해 주면서 인연이 시작된다.

도경은 세가에 찾아온 소명을 보자마자 첫눈에 반하고, 그 이후로 그를 따라다니면서 온갖 수작질과 플러팅을 날리는 서브공으로 발전하게 된다.

음, 서브공보다는 이물질이라고 불러야 하나. 소명의 성격에 그런 수작질이 통할 리는 없었고, 제하의 질투심을 유발하는 장치로만 쓰이다 버려졌으니.

아무튼, 싸움에 말려든 해우가 다치고 소명과 제하를 급히 불러온 탓에 세 사람의 만남이 원작보다 앞당겨질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전개가 어떻게 틀어질지도 예측하기 어려웠다.

“에라 모르겠다….”

원작을 알고 있다고 해서 모든 게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으니 이번에는 정말 아무것도 안 하련다.

청연은 목덜미를 긁적이며 그들을 따라 객잔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첫째 공자와 둘째 공자는 잠시 휴식을 취하러 방으로 올라갔지만, 막내 공자는 1층에 남아 자리를 잡고 앉았다. 부드럽고 공손한 말투로 차를 주문하는 모습에서 기품이 묻어나는 듯했다.

“형님들께서 내려오시면 바로 드실 수 있게 준비 부탁드립니다.”

“예, 공자.”

시종이 많으니 주문은 굳이 직접 하지 않아도 될 텐데. 형님들을 위하는 마음 씀씀이가 큰 것인지, 도경은 이런 일에 제법 익숙해 보였다.

청연은 찻주전자와 잔 세 개를 준비해 가져다주었다.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을 때마다 도경의 시선이 소맷자락으로 따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소매에 놓인 자수가 곱습니다.”

“예? 아….”

뜬금없는 칭찬에 청연은 제 옷소매를 들여다보았다. 그리 좋은 옷도 아니고 특별한 것 없는 자수인데, 미래의 서브공은 입에 발린 칭찬이 습관화돼 있는 것인가.

“제 옷이 아무리 고와도 공자의 옷만큼 곱겠습니까. 그렇게 결 좋은 비단은 처음 봅니다.”

그 말에 도경은 미소 지으며 자신의 옷소매를 만지작거렸다.

“저희 남궁세가 사람들은 대대로 청색 옷을 입는데, 객주님께서도 물빛의 푸른 장포를 입고 계시니 반가운 마음에 눈길이 갑니다. 타지에서 만난 인연인가 싶기도 하고요.”

“아…. 그렇습니까.”

별것도 아닌 걸로 엮지 말아 줄래….

처음 보는 이에게 눈웃음을 살살 짓는 이 도련님이 조금은 부담스러워, 청연은 자리를 피해 객잔 한쪽으로 물러났다. 마침 제하가 다가오며 도울 일은 없느냐 물었다.

“괜찮으니까 방에 올라가서 스승님이랑 있어.”

“제가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까?”

말 한마디에 눈썹을 늘어뜨리고 울먹거리는 게 귀여워 말랑한 볼을 다시 꼬집어 보았다. 이렇게 해도 군말 없이 손길을 받아 주는 게 순둥이가 따로 없다.

“얼른 가. 순둥아.”

“순둥… 순둥이 아닙니다아….”

“공자님들 오시기 전에.”

그분들은 아직 네가 감당할 수 있는 레벨이 아니란다.

그렇게 제하가 마지못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궁세가의 공자들이 내려와 자리에 앉았다. 미리 차를 주문하고 기다리던 도경에게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은 채.

둘째 공자 환은 허리를 펴고 바른 자세로 앉아 차를 한 모금 넘긴 뒤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정상적인 객잔을 찾은 것 같아 마음에 듭니다, 형님. 그간 유행이랍시고 괴상망측한 짓을 하는 객잔들이 많아져서 말입니다.”

“그래. 내 특별히 신경 써 찾으라고 분부했다.”

뜨끔하네.

괴상망측한 유행의 주동자였던 청연은 슬금슬금 벽으로 다가가 지금까지도 남아 있던 문구(‘야, 너는 먹을 때가 제일 강해’, ‘맛있게 먹으면 내공 육십갑자’ 등) 몇 개를 떼어 내 등 뒤로 감췄다.

휴, 보기 전에 떼서 다행이다.

남궁세가 공자들에게는 감성 객잔이 통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재밌지 않습니까?”

잠자코 있던 도경이 말을 꺼내자 건과 환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재밌다니?”

“그 새로운 유행 말입니다. 늘 똑같던 객잔에도 신선한 변화가 일어나니 젊은 무인들이….”

“도경아.”

대공자 건은 도경의 말을 뚝 끊고 엄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예, 형님.”

“세가의 미래를 이끌어 갈 사람으로서 하잘것없는 유행이나 좇아서야 되겠니.”

“…….”

“전통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평범한 객잔이라고 해도 말이다.”

“…예. 형님 말씀이 옳습니다.”

‘뭐야, 완전 젊은 꼰대잖아. 별것도 아닌 거 갖고 동생 구박하네.’

청연은 혀를 쯧쯧 차고는 도련님들께서 드실 다과를 준비하러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 안에서도 그들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막내에게 너무 뭐라고 하지 마십시오, 형님. 이제 겨우 열셋 아닙니까.”

“내가 열셋일 땐 저리 철없이 굴지 않았다.”

“형님과 저는 어려서부터 무공을 익혀 무인의 자세를 갖추지 않았습니까. 막내는 무공에 영 재능이 없어 서책 조금 읽고 그림 조금 그릴 줄 아는 게 전부이니 철이 늦게 드나 봅니다. 형님께서 이해하십시오.”

“쯧. 무림세가에서 무학을 게을리하는 게 뭐 그리 자랑이라고.”

정말 크게 될 꼰대들이군. 막냇동생이 조금 그릴 줄 안다는 그 그림이 나중에는 억만금에 팔릴 텐데. 청연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이번 비무대회는 아주 흥미진진할 것 같지 않습니까, 형님. 형님께서도 멋진 활약을 보여 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글쎄.”

건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나야 집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형식적으로 참가하는 것이지. 사실 승자는 정해져 있는 거나 다름없으니 그다지 흥미롭지 않구나.”

“승자라면… 아, 무당의 소요검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소요검 명휘. 구파의 후기지수1)들 사이에 아주 명망 높더구나. 이번 비무대회 승자는 역시 무당에서 나올 테지.”

마침 당과 몇 개를 내온 청연은 탁자 위에 그릇을 턱 올려놓았다. 그때 청연의 손목이 건의 찻잔을 툭 치고 지나간 바람에 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쨍그랑, 하고 잔이 깨지는 소리에 대화가 잠시 멈추었다.

“아이고. 이걸 어쩌나.”

청연은 무미건조하게 말하며 깨진 조각을 주섬주섬 주워 들었다.

“제가 실수했습니다, 공자.”

“아닙니다.”

건은 괘념치 말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새 잔을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청연은 잔을 가지러 다시 주방으로 향하며 도경을 힐끗 바라보았다. 아이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웃어?’

도경은 형님들에게 구박받았던 게 서럽지도 않은지 해사하게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곤륜의 여운도 승산이 있다고 봅니다.”

“여운? 곤륜 태허검 말이냐?”

“예. 사실 실력으로 따지자면….”

“곤륜은 이전에야 그 명성이 드높았지, 지금은 빛을 잃은 지 오래다. 그자가 아무리 뛰어나도 무당의 대제자에겐 상대가 안 될 것이야.”

“허나….”

“되었다. 막내 너는 남의 무공을 평가할 실력이 되지 않으니 그만하거라.”

청연은 새로 꺼내 온 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자리를 뜨려는데, 갑작스러운 도경의 질문이 그를 멈춰 세웠다.

“객주님께선 어찌 생각하십니까?”

“예? 뭐를요?”

“이번 비무대회의 승자 말입니다. 누가 이길 것으로 예상하십니까?”

“그걸 저 같은 사람이 어찌 알겠습니까….”

그런 걸 왜 나한테 묻니. 나는 이 대화에 끼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청연이 대충 얼버무리고 지나가려는데, 환 또한 말을 얹었다.

“객잔을 운영하시다 보면 이런저런 정보가 많이 흘러들어 오지 않습니까. 다른 이들은 어찌 생각하나 한번 들어나 봅시다.”

“에….”

이들과는 엮이고 싶지 않지만, 물으니 답할 수밖에.

청연은 먼 산을 바라보며 답했다.

“곤륜파 여운이 이깁니다.”

“예? 어째서요? 그자가 무당의 소요검보다 뛰어나다는 겁니까?”

“그냥… 제 감이 그럽니다.”

왜냐하면 비무대회는 보통 전회 우승자가 나온 곳에서 열리는데, 원작에서 언급되었던 대회는 곤륜파가 있는 청해에서 열렸거든. 거기서 제하가 주인공 버프를 받아 무소속인 최초로 승리를 거머쥘 거고.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 청연은 그들이 더 말을 걸어오기 전에 급히 자리를 떴다.

***

그날 밤, 청연은 술 한 병을 들고 소명의 방을 찾았다. 그는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고, 한쪽 침상에는 곤히 잠들어 있는 제하가 보였다.

아이를 깨우지 않기 위해 목소리를 낮춘 청연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와 술 한잔하시겠습니까?”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