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화
객주님께서 어딘가 이상해지셨다.
다행히 숙수님의 상태가 호전됨과 동시에 조금 기운을 차리기는 하셨지만, 더운 날씨 때문인지 자꾸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반복하시는 것이다. 멍하니 앉아 ‘세상은 요지경’, ‘살어리 살어리랏다’ 같은 말들을 중얼거리시거나 객잔 바닥 아무 데나 널브러져 누워 계시는 건 기본이었다.
어떨 때는 빨랫줄에 빨래처럼 걸려 계셔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거기서 뭐 하고 계시냐 여쭈면 뇌를 세탁하고 말리는 중이시라나. 그렇게 물먹은 솜이불처럼 축 늘어진 객주님을 억지로 끌어 내리는 것도 참 고된 일이었다.
어느 날은 구멍 난 벽을 메우기 위해 일하던 인부들을 전부 돌려보내시기도 했다. 어쨌든 구멍이 막히기는 했지만 작업이 덜 끝나 표면이 우둘투둘하고 가루가 떨어지는데, 그게 나름대로 마음에 드신다며 그대로 두겠다고 하셨다.
심지어 어디선가 나무토막을 가져와 의자라고 부르시거나, 벽돌을 대충 쌓아 탁자라고 부르시기까지. 물론 영민하신 분이니 다 계획이 있으시겠지만 조금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음…. 저렇게 두면 탁자가 의자보다 낮으니, 음식을 먹기에 불편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걸 감성이라고 부르지.”
“예…?”
감성이라는 단어에 제가 모르는 다른 뜻이 있었던가. 제하는 한참을 고민했다.
또 어떤 날은 널따란 나무판자를 가져와 그 위에 무언가를 휘갈겨 쓰고 계셨다. 제하는 그걸 빤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무얼 하고 계십니까?”
“차림표를 만들려고.”
“아! 그럼 어떤 음식이 있는지 매번 설명하지 않아도 되니 편하겠네요.”
역시 현명하고 친절하신 분이다. 이런 방식으로 점원의 고생을 덜어 주시다니.
제하는 감탄하며 차림표를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문자인지 그림인지 알아볼 수 없는 꼬불꼬불한 선들만 가득한 것이다.
“어…. 이게 무어라 쓰신 겁니까?”
“쿵파오 치킨.”
“쿵파오 치… 뭐라고요?”
“궁보계정이야.”
제하는 그 밑에 쓰인 다른 문자를 가리켰다.
“그럼 이건요?”
“덤플링.”
“덤ㅍ….”
“만두라는 뜻이야.”
“…그 밑에는요?”
“까르보나라.”
중원에 그런 음식이 있었던가. 어쨌든 음식에 대해서는 객주님께서 더 잘 아실 테니.
“그런데 이렇게 쓰면 손님들이 알아보시기에 힘들지 않겠습니까?”
“괜찮아. 어차피 엑스트라들은 죽엽청이랑 소면밖에 안 시켜.”
“…예. 액서투라들이 좀 그렇죠.”
역시 객주님의 넓은 지식과 깊은 뜻을 따라잡기에 저는 너무 어린 듯했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견문을 넓혀 지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하고 제하는 다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객주님은 꾸역꾸역 객잔 문을 다시 여셨다. 이유는 몰라도 무언가 서두르시는 분위기였다. 일할 직원도 없이 혼자서 어떻게 장사를 하시겠느냐 여쭈었더니, 다 방법이 있으시단다.
“당분간은 손님이 많지 않을 테니까 괜찮아. 요리야 뭐 내가 대충 하면 되고.”
그렇게 객잔 문이 열리고, 처음으로 들어온 손님들은 가게 안을 보며 조금 당황하는가 싶더니 나무토막 같은 의자에 슬금슬금 자리를 잡았다.
치료에 전념하시던 스승님께서도 소리를 듣고 내려와 살펴보시더니 객주님께 물으셨다.
“왜 이리 서두르시는 겁니까?”
“돈을 좀 벌어야겠습니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돈 벌어서 도망갈 겁니다.”
그 말에 제하는 깜짝 놀라 청연의 팔을 붙들었다.
“도망이라뇨? 어디로요? 객주님께서 왜 도망을 가신단 말씀입니까?”
“…그렇게 됐다.”
“당장 가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제가….”
“당장은 아니고. 한 십 년 안에.”
“그럼 객잔은요?”
“팔아 버려야지.”
객잔을 팔아 버리신다니. 도망을 가신다니. 모든 말들이 제하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십 년 뒤면 내 나이가 약관을 겨우 넘겼을 터인데. 어른이 된다 한들 객주님께서 안 계신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그때였다. 한 손님이 성을 내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봐, 주인장!”
“네.”
“주문받으러 안 오고 뭐 하는 거요?”
“하….”
청연은 티가 나게 한숨을 내쉬더니 양손을 가슴 앞으로 모아 합장하며 말했다.
“주문은 전음으로 부탁드려요.”
“…뭐요?”
“저기 써 놓았는데 못 보셨어요?”
그가 가리킨 벽에는 정말 ‘주문은 전음으로’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렇다면 전음을 못 하는 사람들은?
물론 객주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도 다 이유가 있겠지만, 이러다 손님과 싸움이라도 나면 어쩔까 걱정이 되었다.
“주인장, 여기 뒷간은 어딨소?”
또 다른 손님의 질문에 청연은 이렇게 답했다.
“하…. 그런 말투로 문의하시면 답변 못 해 드려요. 기본적인 개념 좀 탑재해 주세요.”
역시 객주님께선 예의범절을 중요히 생각하시나 보다. 그런데 왜 자꾸 합장하시는 거지. 혹시 불가에 몸담으셨던 걸까.
그렇게 청연은 어딘가 나사 하나가 빠진 것처럼 굴었고 손님들도 처음에는 크게 당황하였지만, 이상하게도 날이 갈수록 객잔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일찍 예약하지 않고서는 자리를 잡기도 힘들 정도였다.
하나같이 불편한 의자에 앉아 허리를 낮게 수그리고 가루보나라를 주문하여 먹는 것이 젊은 무림인들에게 유행처럼 번져 나갔고, 머지않아 다른 객잔들도 이 유행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는 소문이다.
***
“살어리 살어리랏다….”
하늘은 푸르고 땅은 누렇고. 청연은 벽에 기대어 앉아 활짝 열린 문밖을 내다보며 의미 없는 말들을 중얼거렸다.
역시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은 걸까. 이 세계에 빙의하기 전, 제가 운영하던 카페처럼 객잔을 꾸며 보았더니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제는 감성객잔이 너무 흔해져 버린 것 같아 다시 평범한 모습으로 돌려놓기는 했지만.
어쨌든 소명의 노력 덕분에 해우의 의식이 돌아왔고 해령도 기운을 차렸다. 조금만 더 지나면 모든 게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정말 돌아갈 수 있을까….’
겉모습을 돌려놓는다고 해서 마음까지 편해지지는 않을 텐데.
무호는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원작처럼 그가 천마가 된다면. 그로 인해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럼 결국에는 제하가 무호를 죽여야 할 텐데.
자책하고 또 자책하기를 여러 번, 이제는 그냥 정신을 빼놓고 미친 사람처럼 지내는 쪽이 더 편할 지경이었다.
“객주님, 오늘은 무슨 생각 하세요?”
귀여운 얼굴로 말을 붙여 오는 제하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미쳐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청연은 아이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제하야.”
“네?”
“저번에 네가 날 지켜 주겠다던 말. 아직도 유효해?”
염치없는 어른은 주인공 버프에라도 기대 봐야겠다. 고문 엔딩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으니까.
“당연하죠! 제가 꼭 강해져서 객주님을 지킬 것입니다!”
기특한 것. 청연은 제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난번에는 부담스럽게만 느껴졌던 아이의 과보호가, 이제는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되어 버렸다. 정말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더니.
아무튼 보험을 하나 들어 놓았으니, 조금은 안심해도 되는 걸까.
“든든하네. 너만 믿을게.”
“제가 지킬 것이니…. 그러니 객주님께서도 도망가지 마세요. 대체 왜 도망을 가시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제가 꼭 곁에 있겠습니다.”
“…….”
“저는 객주님 곁에 있고 싶습니다. 기뻐하실 때는 물론이고, 지금처럼 슬퍼하실 때도요.”
그렇게 멋진 말은 너희 스승님한테나 하라니까.
청연은 결연한 표정을 한 제하의 볼을 꼬집었다.
“괜찮아. 나 하나도 안 슬퍼.”
“매일 그렇게 누군가를 기다리시는 것처럼 문밖만 바라보고 계시면서….”
“그냥 손님 기다리는 거야.”
“아, 그런데 오늘은 어찌 손님이 한 명도 없습니다?”
“예약이 있거든.”
“예약이요?”
“응. 아까 어느 가문에서 시종을 보내왔는데 객잔 전체를 다 비워 달라고 하더라고. 얼마나 대단한 가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야 돈 많이 벌고 좋지. 나 이제 진짜 부자다?”
“…….”
그때 마침 객잔 밖에서 끼익,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마차 여러 대가 문 앞에 줄지어 섰다.
“왔나 보다.”
청연은 돈줄이나 다름없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그들이 끌고 온 마차는 무려 세 대나 되었다. 가장 뒤에 있던 마차에서 시종 몇 명이 내리더니 객잔 안으로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또 다른 시종은 앞의 마차로 다가가 공손한 자세로 문을 열었다. 이윽고 마차에서 내린 사람은 총 셋이었는데, 모두 십 대 청소년쯤으로 보이는 남자아이들이었다. 딱 봐도 고급스러움이 줄줄 흐르는 최상급의 비단옷을 걸치고 화려한 장신구를 한 것이, 명문세가의 공자님들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그중에 가장 어려 보이는 아이는 청연을 힐끗 바라보더니 꾸벅 인사하며 웃음 지었다. 하나로 단정하게 묶은 머리가 찰랑거렸고, 고운 눈매가 반달처럼 휘어졌다.
“들어가시죠, 공자님.”
“응. 내 붓이랑 서책 다 챙겼지?”
“예. 다 옮겨 놓았습니다.”
시종과 대화하는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던 청연의 머릿속에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설마….
청연은 마차 위에 앉아 있던 마부에게로 살며시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 어느 지역의 어떤 가문에서 오신 겁니까?”
“그걸 몰라 묻소?”
마부가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그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는 것처럼.
“안휘성의 남궁세가요.”
“…X 됐네.”
남궁세가가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