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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객잔 정상 영업합니다 (23)화 (24/145)

023화

“이게 마지막이야. 더는 못 줘.”

제하는 마지막 해바라기 씨 한 톨을 내밀었다. 양쪽 볼이 불룩해진 다람쥐가 쪼르르 달려와 그것을 낚아채고는 다시 한 보 물러났다.

“너도 빨리 가을이 왔으면 좋겠지?”

열심히 껍질을 벗겨 내는 다람쥐를 바라보며 제하는 중얼거렸다.

“가을이 되면 그분을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까. 그때까지는 꾹 참을 거야.”

마음 같아서는 당장 만나러 달려가고 싶지만.

하산하여 사천에 가자고 스승님을 졸라 보아도 늘 돌아오는 대답은 ‘안 된다’였다. 자신의 감정을 앞세워 타인을 불편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스승님의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어떤 인연은 아주 짧은 시간 내에도 뇌리에 깊게 박혀 감정을 널뛰게 했다. 나는 지금 이런데 그분은 어떠실까.

객잔 일로 바쁘시겠지 싶다가도 저를 한 번이라도 떠올리셨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울적해졌다. 기나긴 기다림 끝에 남는 건 그리움뿐인가 보다.

“너도 그리운 사람이, 아니, 다람쥐가 있어? 그리움이 뭔지는 알아?”

질문을 알아들은 것인지 만 것인지. 다람쥐는 목을 쭉 빼고 일어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윽고 제하의 손에 더 이상 먹을 것이 들려 있지 않다는 걸 확인하고서는 홱 돌아서 숲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모르면 말고. 네가 뭘 알겠어.”

제하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을 툭툭 털어 냈다. 스승님께서 가끔 안주 삼아 까 드시는 해바라기 씨를 몰래 가지고 나왔지만, 이런 일로 혼을 내실 분은 아니었다. 어쨌든 산속의 생명에게 보탬이 되는 일이니.

나무 기둥에 기대어 세워 놓은 검을 집어 들었다. 검은 특별히 제작된 것처럼 아이의 몸집에 딱 맞았다. 지난번 사건 이후 스승님께서 구해다 주신 첫 검이었다.

검날이 검집에서 빠져나오며 스르릉 맑은 소리를 냈다. 매끄러운 표면에 비치는 연갈색 눈동자가 누가 봐도 어린아이의 것이라, 제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분 앞에서 울고 어리광 부리는 아이로 남고 싶다고 해서 외양까지 어리게 보이고 싶은 건 아니었다. 언제쯤 키가 훌쩍 자라 동등한 눈높이에 설 수 있을까. 일부러 수면 시간도 반 시진이나 앞당겼거늘.

됐다. 계속 생각해 봐야 마음만 어지럽지.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언젠가 검기를 맺고 검강1)을 맺는 날이 오면 그분도 분명 기뻐해 주실 것이다.

제하는 머릿속을 차분히 비워 내고, 스승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초 검법의 제 1초식을 전개해 나갔다.

천지의 기운을 받들어 자연과 하나 되라 하셨다. 섭리를 거스르지 않고 동화되는 힘.

상대를 볼 때엔 정과 사를 구분해 나누기보단 그 사람의 내면을 보라 하셨고. 상대를 해하기 위한 검이 아닌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한 검을 쓰라 하셨다.

내가 지키고 싶은 사람은 아무래도…. 다정하고 고운 사람. 가을의 계화 향을 닮은….

“잡념이 가득하구나.”

“스승님!”

제하는 황급히 검을 거두어들였다. 집중한다고 했는데 또 생각이 다른 길로 새 버렸다. 왠지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민망해졌다.

그나저나 스승님께선 서신을 보내러 표국2)에 들렀다가 친우분을 만나고 오신다며 외출하셨는데. 왜 벌써 돌아오셨지?

“검법보다 중요한 것이 맑은 정신이라 하였거늘.”

“시정하겠습니다.”

“됐다. 가서 짐이나 챙기거라.”

“짐… 이라니요?”

소명은 말없이 돌아서 집으로 향했다. 제하도 검을 검집에 넣고 쫄래쫄래 그의 뒤를 따랐다.

무슨 일일까. 보통 하산하게 되면 적어도 사흘 전에 미리 언질을 주시고는 했는데.

“스승님….”

“사천으로 간다.”

“그게 정말입니까?”

뜻밖의 대답에 제하의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이 기뻤다. 두세 달은 더 기다려야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째서 일정을 바꾸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객주님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신난 마음에 집으로 뛰어가다시피 하자 소명이 제하의 옷깃을 잡아 멈춰 세웠다.

“들뜨지 말거라. 은혜 갚으러 가는 길이니.”

“은혜요? 당가를 방문하는 것이 아닙니까?”

“…….”

소명은 잠시 제하를 내려다보더니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건네주었다. 정갈한 서체가 종이 위를 빼곡히 메우고 있었다.

누군가의 서신으로 보이는 그것을 읽어 내려가던 제하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

“이게 다 무슨….”

멀리서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객잔 벽에는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 있었고, 뜨거운 태양 아래 인부들이 땀을 흘리며 분주하게 자재를 실어 날랐다.

“뛰지 말래도.”

급한 마음에 객잔 내부로 달려가려던 제하는 충동을 꾹꾹 억눌렀다.

괜찮으실까…. 다치신 곳은 없어야 할 텐데.

다친 사람은 숙수님뿐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이렇게 급히 서신을 쓰신 걸 보니 객주님의 안위도 걱정되었다. 안 그래도 몸이 안 좋으신 분인데 이번 일로 건강이 더 상하셨다면 어떡하지.

조심조심 객잔 안으로 들어섰을 땐 덜컥 겁이 날 정도였다.

“이렇게 텅 비다니요….”

말 그대로 텅 비어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탁자와 의자가 잘 정돈되어 있어야 할 식당 공간이, 마치 폐업이라도 한 것처럼 말끔하게 비어 버렸다.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이 마교 놈들이 정말!”

“입조심.”

“…….”

욕을 배운 적이 없어 이렇게 원통한 건 처음이었다. 아는 욕이 있었다면 한 시진, 아니, 한나절은 줄줄이 뱉어 냈을 것이다.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는 그저 ‘나쁜 놈들’, ‘천벌 받을 놈들’을 속으로 되뇌는 것뿐이었다.

“객주님께선 어디 계실까요?”

“올라가 보자.”

스승님 못지않게 예의를 중히 하시는 분이니 마중을 나오셔야 마땅한데. 그럴 틈도 없을 만큼 다망하신 걸까.

제하는 소명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천 리 길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2층에 도달했을 때,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청연은 굳게 닫힌 방문 앞에 말없이 서 있었다. 깊은 수심에 잠긴 듯한 얼굴을 보자 즉각적으로 가슴에 찌릿한 통증이 일었다. 반가움과 걱정이 교차해 그를 눈앞에 두고도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거라.”

그를 만나기 위해 지금까지 기다렸으니 조금 더 기다리는 건 전혀 문제 되지 않을 터인데. 왠지 모르게 입이 바짝 마르고 손끝이 저렸다.

소명은 제하를 뒤로하고 청연에게로 다가갔다. 누군가가 가까이 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 그는 고개를 들더니 흠칫하고 놀랐다.

“아, 오셨습니까.”

“예.”

“제가 마중을 나갔어야 했는데…. 아니, 먼저 이리 갑작스럽게 걸음하시게 하여 죄송….”

횡설수설하던 청연은 말을 멈추고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얼마나 세게 물었는지 안 그래도 붉던 입술이 더욱 붉어졌다.

“상태는 어떻습니까?”

“그… 의원님께서 다녀가시긴 했는데 간신히 숨통만 붙어 있는 꼴이라고….”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 방 안에 그 아이의 누이가 있는데 대인께서 설득하여 내보내 주시겠습니까. 여태 한 끼도 먹지 않아 걱정이 되는데 제 말은 영 들으려 하지 않아서….”

“염려 마십시오.”

소명은 짧게 대답한 후 방문을 열었다.

이내 다시 닫힌 문 앞에서 이리저리 방황하던 청연은 그제야 제하를 발견하고 한 걸음씩 다가왔다.

“왔어?”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차가운 손이 제하의 앞머리를 쓸고 지나갔다. 억지로 끌어 올린 듯한 입꼬리가 어색해 보였다.

“객주님….”

“미안한데 나 아래층에 좀 다녀올게.”

“잠시만….”

제하를 그대로 스쳐 지나가려던 청연은 얼마 지나지 않아 비틀거리며 계단 위에 풀썩 주저앉았다. 어지러운지 이마를 짚고 난간에 몸을 기댄 모습에 놀라 그의 곁으로 달려갔다.

“객주님.”

제하는 계단에 살며시 걸터앉아 청연의 얼굴을 살폈다. 며칠은 못 잔 사람처럼 눈 밑에 깊은 그늘이 져 있었고 안색이 창백했다.

약은 제때 드신 걸까. 끼니는. 정이 많으신 분이니 숙수님 일에 크게 충격받으셨을 것이다. 어찌 위로를 해 드려야 할지.

“스승님께서 오셨으니 다 괜찮을 겁니다. 못 고치는 병이 없으시고 죽어 가는 사람도 살리시는 분이니….”

“응, 알아.”

“그러니 객주님 몸도 챙기셔야지요.”

제하는 조심스레 청연의 손을 끌어다 잡았다. 피로 해소에 도움이 된다는 혈 자리를 작은 손으로 꾹꾹 열심히도 눌렀다.

그때 인부 한 명이 계단을 오르며 청연에게 말을 걸어왔다.

“둘러보니 주방 벽에도 웬 손자국이 하나 있던데, 그것도 수리해 드릴까?”

“아….”

작게 탄식을 내뱉는 그의 목소리가 온 천하에서 가장 슬픈 소리처럼 들려, 자칫하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닙니다. 그냥 두세요.”

인부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떠났고, 제하는 열심히 주무르던 청연의 손을 끌어 올려 제 뺨에 가져다 댔다.

‘이리하는 걸 좋아하셨던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한층 따뜻해져 마음이 조금 놓였다. 뺨 정도는 얼마든지 내어 드릴 수 있으니 어서 기운을 차리셨으면.

“칼이라도 들고 다니라고 할걸.”

“…예?”

청연은 제하의 볼살을 쓸며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렸다.

“시장에 같이 가자고 할걸.”

“객주님?”

“떠나지 말라고 할걸.”

“…….”

“아니다. 내가 너한테 무슨 소리를….”

숙수님 일 말고도 다른 일이 있었던 걸까. 도통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떻게든 그를 위로하고 싶었다. 제하는 머리를 굴려 어디선가 들어 본 말들을 늘어놓았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어…. 떠남이 있으면 돌아옴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 제가 매번 밥을 챙겨 주는 다람쥐가 한 마리 있습니다. 늘 밥만 먹고 떠나 버려서 야속하기는 하지만 때가 되면 꼭 돌아오니… 객주님?”

갑자기 희미하게 웃음을 터뜨린 청연 때문에 제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우스운 얘기를 한 건가?’

“다람쥐….”

청연은 이내 웃음을 멈추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살짝 말려 올라간 입매가 슬퍼 보였다.

“그 다람쥐 진짜 밥만 먹고 갔네.”

객주님께서도 다람쥐를 돌보셨던가? 제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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